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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ulius Aug 15. 2021

8월 15일의 단상 (1) 해방의 날

우리 국민은 독립한 민주국의 자유민이라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三角山이 이러나 뎌덩실 춤이라도 추고

漢江물이 뒤집혀 룡소슴칠 그날이,

이목숨이 끊지기前에 와주기만하량이면

나는 밤한울에 날르는 까마귀와같이

鍾路의 人磬을 머리로 드리바더 울리오리다

頭蓋骨은 깨어저 散散 조각이 나도

깃버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六曹앞 넓은길을 울며 뛰며 뒹구러도

그래도 넘치는 깃븜에 가슴이 미여질듯하거든

드는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처메고는

여러분의 行列에 앞장을 스오리다

우렁찬 그소리를 한번이라도 듯기만하면

그 자리에 걱구러저도 눈을 감겠소이다


시인 심훈이 1930년에 발표한 시에서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날이라고 했던 그날, 보신각종을 머리로 들이받아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 나더라도 한이 남지 않을 것 같다던 그날, 자신의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어도 눈을 감을 수 있다던 그날. 76년 전에 찾아온 그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시인이 그렸던 것처럼 사람들이 종을 울리고 북을 치고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졌을까.


제1편 해방의 날

제2편 해방자, 점령자

제3편 신탁통치안

제4편 단독정부

제5편 광복의 날




알려진 바로는, 해방을 알리는 종소리도 기뻐 날뛰는 거대한 행렬도 없었다. 한반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20세기 한국사를 반분하는 거대한 이정표인 해방은 20세기 한국사를 여는 거대한 이정표였던 조선의 멸망이 그랬듯이, 사건 당일은 그 역사적 의미에 비하면 다른 날과 다를 바 없이 조용했다. 정오가 되자 전날 미리 예고된 대로 히로히토 일왕(이하 '쇼와 덴노')의 항복 선언(정식 명칭은 '대동아전쟁 종결의 조서大東亞戰爭終結ノ詔書', 이하 '종전 조서')이 "대일본제국"의 일부로서의 한반도 전역에 방송되었을 뿐이다.


종전 조서 - 쇼와 덴노의 항복 선언


종전 조서 그 자체는 [일본] 민족의 멸망과 인류 문명의 파괴를 막고 국체, 즉 천황제를 수호하고 태평성대를 열기 위해 [일본] 제국 정부에게 연합국의 공동선언을 수락하도록 명령했다는 내용이라, 명시적으로 항복한다는 문구를 담고 있지는 않다. 이런 애매한 서술은 바로 뒤이어 낭독된 내각 총리 명의의 대국민선언(정식 명칭은 '쇼와 20년 8월 14일의 내각고유昭和二十年八月十四日内閣告諭', 이하 '내각고유')도 매한가지이지만 어쨌든 종전 조서와 내각고유 모두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으며 앞으로 다가올 어려움을 다 함께 이겨나가자는 식의 '침통'한 어조로 서술되어 있으므로 이 선언이 곧 태평양전쟁에서의 일본의 패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항복 선언을 들으며 오열하는 일본인의 사진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쇼와 덴노의 육성으로 낭독되는 항복 선언을 듣고 있는 일본인


하지만 항복 선언과 동시에 한반도 전역이 함성으로 가득 차고 거리마다 사람들이 몰려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일본어를 할 줄 몰라서가 아니었다. 이미 1911년에 제정된 제1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보통학교에서의 일본어 교육이 시작되었고 1938년의 제3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조선어 과목이 선택과목으로 바뀌었으며 1943년의 제4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조선어 과목이 완전폐지되었다.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았다. 낮은 라디오 보급률이 하나의 원인일 수도 있지만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사람들이 모여서 방송을 청취하는 경우가 많았고, 상대적으로 보급률이 높았을 도시 지역에서도 방송 당일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던 것을 보면 이를 절대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시인이 그렸던 그날의 모습이 재현된 것은 다음날인 16일,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고 입소문으로 해방 소식이 퍼져나간 이후였다.


8월 16일 아침, 마포형무소에서 출소한 사람들과 시민들의 환호


정치범과 경제범의 석방은 8월 15일 아침에 여운형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인 엔도 류사쿠遠藤柳作가 만나 합의한 내용의 일부였다. 8월 9일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면서 만주의 관동군은 모래성처럼 무너졌고 소련군 제1극동전선군 산하 제25군의 일부가 참전 당일부터 두만강을 건너 경흥에, 12일에는 웅기, 13일에는 청진, 14일에는 나남까지 진격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는 한반도에서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서는 한국인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이를 위해 여운형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5개 항목에 합의했는데 그중 첫 번째 조항이 전국의 정치범과 경제범의 즉시 석방이었다.


1916년부터 10년 간의 공사 끝에 경복궁 흥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세워진 조선총독부 청사


조선총독부가 항복 결정을 접하자마자 다급하게 한반도에서의 철수를 준비해야 했던 까닭은 일본의 항복 요건을 규정하고 있는 포츠담 선언Potsdam Declaration 때문이었다. 13개 조항으로 구성된 포츠담 선언은 1945년 7월 26일에 미국, 중국, 영국의 3국 정상 명의로 발표되었는데, 제5항에서는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승낙하는 형태 이외의 항복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명시하였고 제8항에서는 전후 일본의 주권을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에 따라 일본의 주요 4개 섬 및 부속 도서로 제한했다. 1943년 12월 1일에 발표된 카이로 선언은 전후 일본의 영토 처리가 처음 언급된 선언이었으며, 향후 몰수, 반환, 그리고 독립 대상이 되는 일본령 및 점령지를 첫째, 1914년 이래로 일본이 점령한 태평양의 섬 둘째, 중국으로부터 탈취한 모든 영토 셋째, 한국으로 명시하였다. 따라서 일본의 항복으로 포츠담 선언 제8항 및 카이로 선언에 따라 일본의 한반도 점령은 종식을 고하게 되었으며 조선총독부는 철수 및 해체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 포츠담 선언 >
제5항
하기의 조건에는 어떠한 대안도 없으며 지연 없이 그대로 이행되어야만 한다. Following are our terms. We will not deviate from them. There are no alternatives. We shall brook no delay.

제8항
카이로 선언의 조건들이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 및 우리가 정하는 부속 도서로 제한될 것이다. The term of the Cairo Declaration shall be carried out and Japanese sovereignty shall be limited to the islands of Honshu, Hokkaido, Kyushu, Shikoku and such minor islands as we determine.
< 카이로 선언 中 >
우리는 조선인이 처한 노예적 상황을 유념하여 적절한 시기에 조선이 해방되어 독립할 것을 결의한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我三大同盟國稔知朝鮮人民所受之奴役待遇,決定在相當時期使朝鮮自由與獨立。


1945년 7월, 독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서 회담한 윈스턴 처칠, 해리 트루먼, 이오시프 스탈린


따라서, 8월 15일에 항복 선언이 라디오를 통해 발표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해방의 기운이 돌지 않은 것은 일본어에 대한 이해 부족이나 낮은 라디오 보급률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본의 패망과 한반도의 해방을 연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이 별개의 나라이고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것은 긴 역사에 있어서 극히 짧은 기간 동안의 일시적 사건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국제관계에서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지지로 연결되는 충분조건이 아니다. 한국인은 독일인에게 박해받은 유대인이라기보다는 독일인의 일부로서 또는 독일인과 함께 전쟁을 수행한 오스트리아인에 더 가까운 위치였다. 게다가 고작 7년 간 독일의 일부였던 오스트리아와 달리 한국은 국제적으로는 35년 간이나 일본의 일부였고 태평양 전쟁기의 민족말살정책 때문에 소수의 친일 반민족 행위자뿐만 아니라 일반 어린 학생들까지도 일본을 조국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사람들이 일본의 패망이 일본의 일부로서의 한국의 패망인지 일본과 별개로서의 한국의 해방인지를 쉽게 알 수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사람들은 일제에 항거했던 정치범이 석방되고 여운형이 휘문중학교 운동장에서 민족이 해방되었음을 알리는 연설을 한 16일에야 비로소 한반도가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영화 암살 중 中


영화 강철비 中


카이로 선언에 기댄 해방, 그리고 해방 당일에 해방된 줄도 몰랐던 사람들. 영화 '암살'에서 안성식(진경 분)이 강인국(이경영 분)에게 차갑게 건네던 "일본은 전쟁 한 번 안 하고 이 나라를 집어 먹었어요, 그래도 이것도 나란데."라는 말이 꿈틀 한 번 못 하고 멸망한 조선의 비굴하고 무기력한 최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면, 영화 '강철비'에서 곽철우(곽도원 분)의 특강을 듣던 학생의 "우리 힘으로 독립 못 했잖아요."라는 말은 해방의 예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으로부터 해방은 됐을지언정 독립은 아직도 요원한 일이어서 조선총독을 대신하여 한반도의 최고 통치권자가 된 사람은 38선 이남에서는 미 육군 제24군단장인 존 하지John Hodge 전시 중장(평시 준장)이었고 38선 이북에서는 소련 육군 제25군 사령관인 이반 치스차코프Иван Чистяков 상장이었다. 

38도선을 기준으로 하는 분할점령안은 1945년 9월 2일에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A. McArthur 연합군 최고 사령관이 일반명령 1호General Order No. I를 통해 한반도에서 북위 38도선 이북의 일본군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소련군 총사령관Commander-in-Chief of Soviet Forces in the Far East에게 북위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은 태평양 방면 미 육군 총사령관Commander-in-Chief, U.S. Army Forces, Pacific에게 항복하도록 명령하면서 공식 발표되었다. 표면적으로 38선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전후처리를 담당할 책임구역의 경계로서 설정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세력 경계였으며 미국의 입장에서는 소련의 남진을 제한하고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저지선이었고 소련의 입장에서는 미래의 일본 (또는 미국)으로부터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소련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저지선이었다. 38도선은 8월 15일에 미국이 소련에게 제시하고 다음날 소련이 동의하면서 결정되었다. 여운형이 민중에게 해방을 알리며 새로운 낙원을 건설하는 데 다 함께 힘을 모으자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을 때, 이미 나라의 허리에는 빨간 금이 그어져 있었던 것이다.


여운형이 1944년에 자신이 조직했던, 나중에 건국동맹이라고 이름 붙여지는 비밀결사를 모체로 하여 급하게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출범시켰던 것은 역설적으로 한반도가 또 다른 외국 세력의 지배 하에 필연적으로 놓일 것이라는 여운형의 걱정을 보여준다. 일본이 패망했을 뿐 1945년 8월의 상황이 50년 전보다 더 나아져 있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조선/대한제국이 공식적으로 멸망한 것은 1910년 8월 29일이지만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이 훼손된 것은 이미 오래였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일본이 전쟁 한 번 없이 이 나라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은 강인국 같은 출세지향형 친일파들이 밑에서부터 야금야금 나라를 좀 먹게 한 것도 있었지만 보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조정 자체가 일본의 침략에 무기력했고 심지어는 동조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기습적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임금을 포로로 잡은 1894년 7월 23일 이래로 조선의 자주성은 사라졌다. 이후 9개월 간 벌어진 청일전쟁이나 1905년에 종결된 러일전쟁은 어느 나라가 조선을 점령할 것인지를 두고 벌인 전쟁이었을 뿐 어떤 결과가 와도 조선은 자주 독립국으로 존속할 수 없는 상태였다. 두 차례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영국과 미국도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자 일본은 차근차근 침략의 단계를 밟아 나갔다.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제2차 한일협약부터 1910년 6월 24일 체결된 한일약정각서까지 일본이 네 차례에 걸쳐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탈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나라가 없어진 것은 외교권, 행정권, 군사권, 사법권, 교도행정권, 그리고 경찰권까지 빼앗긴 다음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어졌을 때였다. 망국의 원인을 찾아내자면 책 수십 권을 써도 충분할 리 없겠지만, 망국으로 가는 흐름을 돌이킬 수 없어진 계기는 1894년의 경복궁 피탈이었다. 이 날 조선은 자주적인 근대화의 동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조르주 페르디낭 비고Georges Ferdinand Bigot의 낚시 놀이Une partie de pêche - 1887년 2월 15일에 토바에TÔBAÉ에 실린 삽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왜군의 파죽지세를 이기지 못하고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하는 상황에 몰려서도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해군의 제해권 장악이나 의병의 활약 같은 관민 모두의 분투 덕분이기도 하지만 원천적으로 조정이 그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어 분조를 이끈 것도 임금과 조정이 왜군에 잡혀 전쟁지휘부가 궤멸되는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반대로 병자호란 당시 조선이 불과 수십 일의 농성 끝에 고작 4~5만 명의 청군에 항복했던 것은 인조와 세자와 조정이 적시에 파천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포위당한 사이에 원손과 세자빈, 그리고 봉림대군이 강화도 방어전의 실패로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전쟁지휘부가 궤멸될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1894년 7월에 경복궁을 점령하여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고 1895년 4월 17일에는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거하고 조선 북쪽의 요동반도까지 할양받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자, 조선은 독자적으로 일본에 맞설 수 있는 힘은 고사하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세계 열강의 지지도 잃었다. 이 시점에서 조선이 사실상 일본의 영향력 하에 놓인다는 사실을 용인하지 않는 나라는 러시아 정도뿐이었다.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은 패전국인 청나라, 중간에 낀 조선뿐만 아니라 러시아에게도 커다란 타격이었다. 동북아시아에서 부동항을 확보하여 태평양으로 진출하려고 했던 러시아는 뤼순 항구가 포함되어 있는 요동반도가 일본에 귀속되는 것을 극히 경계했고 프랑스, 독일, 영국에 일본의 요동반도 병합에 반대하는 행동에 보조를 맞춰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중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자 하는 영국을 제외하고 프랑스와 독일이 러시아와 함께 4월 23일에 일본에 요동반도의 반환을 요구하였고, 일본은 이를 받아들여 5월 5일에 요동반도를 반환하는 수정 조약을 체결하였다. 러시아의 요구에 일본이 굴복하는 모습을 본 조선 조정은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데 러시아를 이용하고자 했다. 고종은 친일파인 박영효 등이 중심이 된 제2차 김홍집 내각을 붕괴시키고 5월 17일에는 갑오개혁의 무효를 선언하였으며 7월에 박영효의 왕비 시해 음모 사건 이후에는 명성황후가 주도하여 이 당시까지는 친러파였던 이완용 등을 중심으로 제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였다. 조정이 친러로 기울고 청일전쟁 승리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서의 입지가 좁아지자 일본은 국면을 전환하고자 그들이 임금과 조정의 배후에서 친러 정책을 지휘하고 있다고 믿은 명성황후를 10월 8일 경복궁에서 시해하였으니 이것이 을미사변으로 경복궁 침탈로부터 겨우 15개월가량 지난 때였다. 그나마 전 해의 경복궁 침탈 당시에는 조선군 경군 대다수가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서울을 비운 상황에서도 장위영, 통위영의 일부 병력과 평양 감영의 일부 병력 등 남아 있던 조선군 정규군이 전투 중지와 무장해제를 명령하는 위조된 고종의 명령서를 받을 때까지 일본군 제5사단 혼성 제9여단과 12시간 넘게 교전하였으나, 을미사변 당시에는 조선군 시위대와 무예청 병력이 고작 1시간도 못 버티고 무너졌다. 한 나라의 왕비가 수도의 정궁에서 공공연히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고종은 11월 28일에 미국 공사관으로 망명하려다 실패하였고 (춘생문 사건), 다음 해 2월 11일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하였다. (아관파천)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로 알려져 있는 경복궁 건청궁의 곤녕합과 옥호루


이때부터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1896년 5월에는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Карл Иванович Вебер와 주조선 일본 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가 베베르-고무라 각서를 체결하여 러시아와 일본이 조선에 각각 최대 800명까지의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는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자기들 마음대로) 서로 확인하였다. 6월에는 일본의 전 총리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북위 39도선 부근을 경계로 하는 조선 분할점령안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했지만, 곧이어 체결된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에서도 베베르-고무라 각서의 유효성은 재확인되었다. 1897년 2월에 고종이 경운궁(이후 덕수궁으로 개칭)으로 환궁하고 10월에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였지만 이것이 러시아나 일본의 대 한반도 정책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사건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그 해 12월에 요동반도의 뤼순 항과 다롄 항을 강제로 점령하였는데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협조가 필요해졌고 이를 위해 다음 해 4월에는 일본이 한반도에서 우월한 경제적 지위를 가진다는 사실을 상호 확인하는 로젠-니시 협정을 주일 러시아 공사인 로만 로젠Роман Романович Розен과 일본 외무장관인 니시 도쿠지로西德二郞 사이에 체결하였다.


1900년 6월, 청나라에서 부청멸양(扶淸滅洋; 청나라를 도와 서양을 물리친다)을 기치로 의화단義和團 운동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대규모 병력을 만주에 파병하였고 일본도 이를 한국을 점령할 기회로 보았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을 영향권 안에 완전히 넣는 것을 막고자 북위 39도선 부근을 경계로 하는 분할점령안을 제시하였으나 이번에는 일본이 이를 거부하였고, 1901년 1월에는 러시아가 한국의 중립국화를 제안하였으나 일본이 다시 이를 거부하였다.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한국에서 일본의 영향력과 등가 교환되어야 한다고 보아 한만국경을 양국의 세력권으로 삼을 것을 러시아에 제안하였지만 이는 러시아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는 일본의 행동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막아 온 영국의 방침에 부합하였으며 이에 두 나라는 1902년 1월에 동맹을 체결하고 한국에서 일본의 이익과 중국에서 영국의 이익을 (역시 자기들 마음대로) 상호 확인한다. 1903년 8월에 일본이 일본의 한국 지배와 러시아의 만주 철도 부설권을 교환하는 안을 제시하였지만 러시아는 이를 거절했고, 10월에는 러시아가 다시 한번 북위 39도선을 중립지대로 하여 세력 경계로 삼을 것을 제안했지만 일본이 이를 거절했다. 일본은 만약 중립지대를 두어 세력 경계로 삼겠다면 그 경계선은 한만 경계선, 즉 압록강과 두만강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내부적으로 대한제국을 병합해야 한다는 강경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러시아가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무단 점령하여 군사기지화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완공되어 일본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 이점이 상실되기 전에 군사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1904년 2월 8일에 뤼순 항에 진주하고 있던 러시아의 제1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러일전쟁 발발 후, 르 프띠 빠리지앵Le Petit Parisien에 실린 삽화


아관파천(1896년 2월)부터 러일전쟁 발발(1904년 2월)까지 8년 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조선/대한제국 조정/내각의 의중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오로지 남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러시아와 한반도, 나아가 중국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일본 간의 줄다리기에 따라 움직였다. 안타깝게도 1945년 8월의 정세는 이 시기와 비교하여 크게 다르다고 보기 어렵다. 소련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위협을 줄이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일본이 한국에서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어야 한다고 보았다. 1945년 6월 29일에 작성된 소련 외무성 제2극동국의 보고서에서는 러일전쟁 당시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이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여 한반도를 군사적 거점으로 활용한 것은 여전히 소련에 위협적인 유효한 전략이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소련을 공격하는 일본의 (또는 일본과 연합하는 임의의 다른 강대국의) 전초기지로 전환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을 만큼 한국의 독립이 효과적이어야만 하고 장차 한국 정부가 수립될 때 반드시 한국과 소련의 긴밀하고 우호적인 관계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만주와 한반도를 일종의 완충지대로 삼는 개념은 유럽전선에서의 전후처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소련은 다수의 동유럽 국가들을 공산화시켰던 것처럼 만주와 38선 이북의 한반도를 공산화시키고자 했다. 다만, 유럽에서 소련이 독일 일부를 점령한 것과 달리 일본 일부에 대한 소련군의 진주 요구가 미국에 의해 거부되었을 뿐이었다. 20세기 초에 러시아와 세력다툼을 벌였던 것은 일본이었지만 이미 1945년 8월에 소련은 그 상대가 미국, 또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일본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50년 전의 중국은 열강의 침탈에 제 몸 추스르기 바빠 청일전쟁 패전 이후에는 한반도 정세에 개입할 여지가 없었고, 지금의 중국은 일본의 침략에서만 겨우 벗어났을 뿐 국민당과 공산당의 불안한 동거 때문에 한반도 정세에 개입할 여지가 없을 것이었다. (불과 4년 만에 공산당이 중국 전체를 장악하고 6.25에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을 1945년에 예측하기란 쉽지 않다.)


예전에는 최소한 이름만은 대한제국인 나라가 수천 년의 민족사와 500년의 왕업을 등에 업고 존재했었다. 이제는 일본의 패망으로 무주공산이 된 한반도에 소련과 미국이 들어오는 셈이니 50년 전보다 상황이 딱히 더 낫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이 연합국에 의해 보장되었다고는 하지만, 돌이켜 보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도 각종 협약과 조약과 각서와 비밀조항에서 조선과 대한제국의 독립과 주권은 수도 없이 보장되었었다. 급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건준의 결성은 최소한 내부 분열을 막고 민족을 최대한 커다란 한 덩이로 모아야 외국 열강과 협상이라도 해 볼 수 있다는 믿었던 여운형의 절박함을 보여준다. 


건준 본부에서, 몽양(夢陽) 여운형


건준의 당면과제는 외국에 의한 직접 통치가 시작되거나 어떠한 형태로든 간섭이 구체화되기 이전에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조직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건준의 지휘부를 구성하고 건준을 전국 조직으로 확대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최소한의 행정력을 발휘하는 문제도 함께 해결해야 했다. 여운형은 이미 엔도와의 협상에서 경성에 3개월치의 식량을 확보하고 치안유지 및 건설 사업에 조선총독부의 구속과 간섭을 부인하기로 합의했다. 건준 산하에 건국 치안대를 두어 각지의 경찰서를 접수하고 무기를 확보하여 주요 기관에 대한 경비를 시작한 것과 식량대책위원회를 두어 일제의 전시 식량 통제 기구인 조선식량영단을 접수한 것은 최소한의 행정력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짧은 기간 안에 국내외의 독립운동가 모두의 중지를 모아 조직을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국내의 사실상 유일한 독립운동 지하조직인 건국동맹이 건준의 모체가 되었고 각 지방에는 건준의 지부가 세워졌다. 여운형 본인이 위원장이 되었고 안재홍이 부위원장이 되었다. 중도우파 민족주의자였던 안재홍의 건준 참여는 건준의 외연 확대를 위해 매우 중요했다. 건국동맹은 해방 전 불과 1년 동안 기본적인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을 갖췄을 뿐 아니라 국외 무장독립세력과의 연계를 시도하는 등 거의 유일하게 활동하는 국내 독립운동조직이었고 다양한 배경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합류해 있었지만, 주류 인적구성은 사회주의자였다. 암울했던 민족말살통치기에 사상으로 무장된 사회주의자들이나마 독립운동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 평가받아 마땅한 사실이지만, 사회주의자들이 민족보다 사상을 우선시한다고 보는 시각은 민족주의 계열이 건국동맹 참여에 부정적이었던 이유였다. 안재홍 또한 같은 이유로 건국동맹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해방이라고 하는 결정적 순간이 다가오자 자주 독립 국가 건설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중도 좌파로 평가받고 있던 여운형의 손을 잡고 건준에 합류한 것이었다.


민세(民世) 안재홍


그러나 해방은 안재홍뿐만 아니라 박헌영에게도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가 이끌던 항일 공산주의 비밀 결사 경성콤그룹이 1941년에 총독부의 일제 검거로 와해된 이래로 지방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이어오던 박헌영은 해방 소식을 접하고 8월 18일에 상경하였고 20일에는 경성콤그룹에서 함께 활동하던 이관술, 김삼룡, 이주하 등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 (이후 '재건파')를 출범시켰다. 1928년 7월에 차금봉 책임비서를 비롯한 지도부 대부분이 일본 경찰에 검거되면서 제4차 조선공산당이 와해되고 이를 재건하기 위한 공식적인 활동이 코민테른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й интернациона́л (Communist International, Comintern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또는 제3인터내셔널)의 권고에 따라 중단된 지 17년 만이었다. 이미 8월 16일에 공산주의 파벌 중 서울파와 ML파, 그리고 일부의 화요파 구성원이 종로 장안빌딩에서 모여 조선공산당 (장안파 조선공산당, 이후 '장안파')을 결성하였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1940년대 이후 항일 공산주의 활동을 포기하거나 전향한 전력이 있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활동의 휴지기 때문에 강력한 조직을 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9월 8일, 박헌영은 장안파의 열성자 대회에 재건위원회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여 '당 통일과 중앙 건설에 대한 보고'를 발표하였으며 다수의 지지를 통해 당 조직을 구성하는 권한을 위임받았다. 박헌영은 9월 11일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주요 지도부를 발표하였는데, 스스로 총비서가 되고 그 외에도 경성콤그룹 출신들을 지도부에 대거 포진시켰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8월 20일에 박헌영이 발표한 '일반 정치노선에 대한 결정'과 이를 토대로 9월 20일에 수정 발표한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정치노선으로 채택하였다. 이른바 '8월 테제'라고 불리는 이 정치노선에서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은 첫째, 조선의 해방은 우리 민족의 주관적 투쟁의 힘에 의해서 실현된 것이 아니라 연합국 세력에 의해 실현된 것이며 조선이 반일 전쟁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은 혁명세력이 미약하기 때문이고 국제 파시즘이 궤멸된 지금 혁명이란 어떤 형태의 사회를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대한 답이라는 점 둘째, 조선의 최우선 과제는 민족의 완전 독립과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통한 토지문제의 해결이며 또한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파업의 자유를 보장하고 8시간 노동제, 무상 의무교육, 국민의용병제 등을 실시해야 하며 여성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향상하고 18세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점 셋째, 조선공산당은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전투적 볼셰비키 당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민주집중제에 따라 노동자, 농민, 청년, 부녀, 문화단체, 소비조합, 실업자 등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전위조직 및 보조적 대중단체를 조직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라는 전략을 실현할 수 있는 인민정권을 수립해야 한다는 점 등을 주장하였다. 박헌영과 경성콤그룹을 주축으로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주장은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독립과 공산주의는 불가분의 관계였고, 그들의 목표는 단순히 조선의 독립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독립된 조국의 수립이었다.


1929년, 소련 유학 중인 박헌영과 아내 주세죽


박헌영은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 아니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전체를 통틀어서도 상당한 거물이었지만, 모든 공산주의자 독립운동가들이 박헌영과 같이 마르크스-레닌주의 (이하 '스탈린주의')를 이론적으로 신봉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공산주의가 독립운동가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비록 공산주의라는 이념 자체가 특별히 우리의 독립을 사상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현실적으로는 효과적인 지원책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런던에서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1848년에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는 한양과 런던의 거리의 100배 보다도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이었지만 1910년대 후반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은 중근세에 유럽에서 이웃나라 간에 전쟁이 벌어져서 이긴 쪽이 진 쪽을 병합하는 것과는 아예 성질이 달랐다. 일본은 마치 당시 유럽 열강이 수천 km 떨어진 아프리카나 아시아 지역을 통치하는 것처럼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았는데, 비록 19세기까지는 특정 국가의 주민들이 이주하여 경영하는 지역으로 원주민을 지배하고 본국 정부에 종속되는 지역을 일컫는 식민지의 정의가 19세기부터는 본국의 군사력으로 정복하여 복속하였으나 본국으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는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뀌긴 했지만, 이웃나라를 식민지로 삼는 것은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에서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 희귀한 경우였다. 일본제국의 한 지방으로 격하되어 대한이라는 이름 대신 조선이라는 옛 이름으로 강제 개칭된 한반도는 일본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보조하기 위한 부속품으로 취급되었다. 1910년대 일본의 한반도 통치는 한반도를 경제적으로는 자원 수탈의 대상이자 일본 산업의 확장된 시장으로, 군사적으로는 대륙 세력으로부터의 완충지대이자 만주로의 세력권 확장의 전진기지로, 민족적으로는 동화 대상이 아닌 원주민의 거주지이자 일본인의 이민 대상지역으로 보는 시각에 기반한 무단통치였고, 이에 대항하는 국내의 세력은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이는 한국민이 일본의 통치에 순응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미 국권 피탈 이전에 일본군에 의해 무력 항일투쟁이 그 싹까지 뽑힐 정도로 분쇄되었던 여파라고 볼 수 있는데, 꿈틀 하지도 못하고 나라를 들어 바쳤다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1905년부터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의병 봉기가 일어났으며 1907년에는 해산된 대한제국군 시위대 및 진위대 수천 명이 의병에 합류하여 의병의 전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의병은 한양 주재 각국 공사관에 교전권 인정을 요구하며, 한양을 일본군으로부터 탈환하고자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선발대가 한양 부근 (현재의 서울특별시 중랑구 일대)까지 진격했으나 일본의 반격과 고질적인 탄약 부족으로 한양 입성에는 실패하였고 이후에는 다시 원래의 근거지로 각각 귀향하여 그곳에서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1909년이 되자 일본은 의병의 뿌리를 뽑고자 의병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전라남도를 목표로 보병 2개 연대와 다수의 헌병보조원, 경찰, 해군을 동원하여 2개월에 걸쳐 이른바 '남한대토벌' 작전을 실시하였는데,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의병을 제압하고자 이를 지원하는 민간인 마을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았으며 이 결과 사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최대 18,000명 가까운 의병이 전사하고 103명의 의병장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혀 처형당함으로써 당시 전국 의병 수와 전투 활동의 50%가량을 차지하던 호남의병이 소멸하고 말았다. 이 여파로 국내의 항일 무장투쟁의 동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살아남은 의병들이 만주 등지로 투쟁 근거지를 옮김에 따라 1910년대에 일본의 통치에 대항할 응집된 세력이 갖추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영국 데일리 메일의 기자인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가 1907년 취재 도중 찍은 의병 사진


실력으로 일본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약관화한 상태에서 1910년대 후반에 독립운동가들을 고무시키는 두 가지 움직임이 있었다. 하나는 1918년 1월에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의회에서 발표한 14개 조의 평화 원칙Fourteen Points (이후 '윌슨의 14개 조')이었다. 이 원칙은 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의 성립과 식민지 주민의 이익을 고려하는 식민지 주권 조정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미국의 참전에 힘입어 독일이 항복이나 다름없는 휴전을 받아들이고 제1차 세계대전이 미국을 필두로 한 연합군의 승리로 종결되자 윌슨의 14개 조는 특히 외교적 방법을 통한 독립을 추구하던 독립운동가들을 고무하였는데, 여운형이 조직한 신한청년단과 안창호가 이끄는 미국의 대한인국민회, 연해주에 있는 대한국민회의 그리고 국내에 있던 유림세력까지 각각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보내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고자 하였다. 이 중, 대한인국민회는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를 대표단으로 선발했고 정한경은 장래에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한국을 일본의 통치로부터 즉시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 하에 둘 것을 청원하는 위임통치청원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대표단은 파리로 떠날 수 없었는데, 명목상 일본 국민인 이들에게 일본영사관이 여권을 발급해 주지도 않았을뿐더러 미국 정부 역시 비자 발급에 도움을 주는 걸 꺼렸기 때문이었다. 대표단은 파리행이 어려워지자 2월에 윌슨에게 여러 차례 면담을 요청하고 3월 3일에는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하였으나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했고 결국 이승만이 1919년 3월 16일에 기자회견을 통해 위임통치청원을 공개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상해에 있던 신한청년단은 비자 문제에서 보다 자유로웠기 때문에, 대표로 선임된 김규식은 2월 1일에 상해를 출발하여 3월 13일에는 파리에 도착해 평화회의 한국민대표단을 설치하였다. 김규식은 미국, 영국, 프랑스 정상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한국 독립의 지지를 호소하고 강화회의 참석을 시도하였지만 프랑스 외무성은 정부대표가 아니라 민간단체의 대표에게는 참석을 허용할 수 없다며 거부하였다. 4월 11일에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규식은 외무총장(외무장관) 겸 주파리위원(주프랑스 대사)으로 임명되었고 5월 10일에는 파리 강화회의 의장인 프랑스 수상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에게 독립공고서를 제출하고 각국 대표단과 개별 접촉을 통해 일본에 강제 점령당한 한국의 독립의지를 알리고자 하였으나, 전승국인 일본의 방해와 민족자결원칙을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적용하는 현실을 넘지 못하고 파리 강화회의에서 한국 문제는 공식적으로 전혀 논의되지 않았으며 다만, 임시정부는 6월 27일에 일본대표의 서명으로 인해 발생하는 어떠한 책임에 있어서도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은 어떠한 의무도 부담하지 않는다는 선언만을 강화회의 서기국에 제출하였을 뿐이다.


< 윌슨의 14개 조 中 >
제5조
식민지와 관련된 각 요구사항들은, 주권 문제와 같은 모든 사항을 결정함에 있어서 당사자인 식민지 주민의 이해가 식민지 정부의 통치권과 동등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엄격하게 기초하여 현 상태에 얽매이지 않고 매우 공정하게 조정되어야 한다. A free, open-minded, and absolutely impartial adjustment of all colonial claims, based upon a strict observance of the principle that in determining all such questions of sovereignty the interests of the populations concerned must have equal weight with the equitable government whose title is to be determined.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앞줄 왼쪽부터 여운홍, 사무소 임대인 부부, 김규식. 뒷줄 왼쪽부터 이관용, 조소앙, 황기환 (프랑스인 직원 제외)


다른 하나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를 붕괴시키고 10월 혁명으로 탄생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Российская Советская Федеративн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이하 '러시아SSR')이 11월에 러시아 내 모든 민족의 권리 선언에서 각 민족의 자결권 및 자치권을 인정하고, 혁명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이 주도하여 탄생한 코민테른이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고 약소민족의 해방을 지원한다는 정책을 채택한 점이었다. 또한, 1916년에 붕괴된 제2인터내셔널 (정식 명칭은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International Socialist Congress')을 재건하려고 노력하던 사회주의 세력은 1919년 8월에 스위스 루체른에서 만국사회당 대회The International Socialist Conference를 열었는데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는 이 대회에 대표로 파견한 조소앙과 이관용은 한국사회당의 명의로 한국독립 승인요구서를 제출하였고, 만국사회당 대회는 8월 9일 폐막일에 특별결의로 한국에서 자행되는 일본의 압제에 항의하고 한국이 독립된 자유국이 되는 것에 동의하며 한국을 국제연맹의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 자본주의 서구 열강에 비해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계열이 한국의 독립에 보다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경험은 1920년대부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조국 독립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박헌영은 그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은 아니었다. 박헌영에게 조국의 독립은 곧 소비에트 조선의 수립이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수단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중국에서 국공내전에 휘말리고 소련에서 대숙청으로 목숨을 잃고 한반도에서는 짙어져 가는 식민통치에 절망하며 스러져가고 변절하는 동안, 공산주의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사상과 신념의 힘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해방의 날까지 살아남았고 그들의 꺾이지 않았던 투쟁의지가 그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정통성은 재건파에게 장안파를 순식간에 와해시키고 조선공산당의 주류를 차지하는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그 승리는 재건파를 다수 정치세력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길로 이끌었다. 박헌영이 따르던 스탈린주의는 국가는 인민을 통제하고 당은 국가를 통제하고 당 중앙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론과 이상에 완벽히 부합하도록 당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스탈린주의에는 다른 이념을 포용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만국사회당대회 폐막 순서. 제2부 특별 결의의 일곱 번째 항목에 한국이 보인다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만국사회당대회의 영문 결의문


박헌영의 건준 가입은 안재홍 덕분 겨우 맞춰져 있던 좌우 균형을 일거에 좌측으로 기울였으며 이를 경계한 민족주의 세력과 우익이 건준 가입을 거부하면서 건준은 더욱 좌경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좌익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미군의 진주를 이틀 앞둔 9월 6일, 건준은 각 지방의 인민위원회 대표 1천여 명과 경기여고에서 회합하여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를 열고 조선인민공화국 (이하 '인공')의 성립을 선언했고 다음날에는 이승만을 주석, 여운형을 부주석, 김구를 내무부장으로 하는 등의 정부 각료 명단을 발표했다. 정부 각료 명단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독립운동에 힘써 온 명망 있는 민족 지도자들을 아우르고 있었다. 이승만, 여운형, 김구 이외에도 국무총리에 인선된 허헌, 외무부장에 인선된 김규식, 재무부장에 인선된 조만식, 군사부장에 인선된 김원봉, 사법부장에 인선된 김병로, 문교부장에 인선된 김성수, 체신부장에 인선된 신익희 등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해박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 이름은 익히 한 번쯤 들어보았을 인물들이다. 그러나 각료 명단은 현실과 괴리된 이상이었다. 명단에 포함된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이 명단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동의하지 않았다. 이 명단은 이념에 관계없이 오로지 민족의 장래를 위해 합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명단이 아니라 이념에 관계없이 민족의 장래를 위해 일해주었으면 하고 대중이 바라는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냉혹한 현실을 마주했을 때, 아니 이미 현실을 마주하기도 전에 이 명단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승만은 10월 16일에 귀국한 직후 자신이 주석으로 추대된 것은 아는 바 없는 일이라며 주석직을 거부하였고, 김구와 김규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도 11월 23일에 귀국한 후 인공과 사전에 교감이 없었다며 인공의 내각에 입각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귀국 연설회에서의 이승만. 왼쪽에 선글라스를 낀 사람은 하지 미군정 사령관


각료 명단의 상당수가 참여 의사조차 밝히지 않은 사람이었는데도 인공이 성립을 선언하고 굴러갈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을 실제로는 이들 각료를 대신해서 조직을 운영할 대리들 덕분이었다. 각료 명단이 좌우를 고르게 포함하고 있었던 데 반해 인공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대리들은 공산주의자와 좌익이 대거 임명되었다. 이승만이나 김구, 김규식 등의 인공 참여 거절은 인공을 좌지우지하는 좌익에게 이름이 팔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한반도에 남아 있는 우익 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송진우나 김병로, 윤치영 등은 건준 부위원장인 안재홍에게 협조를 요청받았지만 건준의 좌경화를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박헌영은 건준에 민족주의자가 너무 많아 우경화가 우려된다고 주장하였고 여운형이 이에 딱히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자 안재홍마저 건준을 탈퇴하였다. 건준이 결성된 지 불과 2주 후, 인공이 선포되기도 전의 일이었다. 이미 건준 단계에서 좌우의 균형은 무너져 있었고 인공은 좌익, 특히 재건파를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사실상 장악된 상태에서 여운형의 희망처럼 모두가 합심하여 해방 직후의 불확실한 시기를 헤쳐 나가고 외국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자주 독립국을 세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2편 해방자, 점령자'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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