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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ulius Aug 16. 2021

8월 15일의 단상 (2) 해방자, 점령자

우리 국민은 독립한 민주국의 자유민이라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三角山이 이러나 뎌덩실 춤이라도 추고

漢江물이 뒤집혀 룡소슴칠 그날이,

이목숨이 끊지기前에 와주기만하량이면

나는 밤한울에 날르는 까마귀와같이

鍾路의 人磬을 머리로 드리바더 울리오리다

頭蓋骨은 깨어저 散散 조각이 나도

깃버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六曹앞 넓은길을 울며 뛰며 뒹구러도

그래도 넘치는 깃븜에 가슴이 미여질듯하거든

드는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처메고는

여러분의 行列에 앞장을 스오리다

우렁찬 그소리를 한번이라도 듯기만하면

그 자리에 걱구러저도 눈을 감겠소이다


시인 심훈이 1930년에 발표한 시에서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날이라고 했던 그날, 보신각종을 머리로 들이받아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 나더라도 한이 남지 않을 것 같다던 그날, 자신의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어도 눈을 감을 수 있다던 그날. 76년 전에 찾아온 그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시인이 그렸던 것처럼 사람들이 종을 울리고 북을 치고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졌을까.


제1편 해방의 날

제2편 해방자, 점령자

제3편 신탁통치안

제4편 단독정부

제5편 광복의 날




하지만 건준이나 인공의 좌경화가 여운형의 희망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건준이 이념과 상관없이 나라의 미래를 책임 있게 고민할 수 있는 인사들을 망라하여 구성되고 이들이 합심하여 의사결정을 내리고 통일된 행동을 취했다고 하더라도 단시일 내에 자주 독립국을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태평양 전역에서 거의 단독으로 일본과 맞서 온 미국이 전후처리에서 차지하는 지분은 절대적이었다.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주도로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미국은 1942년에 이미 전후 한반도를 국제 사회가 신탁통치하는 원칙을 제시했고 1944년에는 한국의 독립실현 방안으로 연합군의 군정과 국제민간행정을 거치는 지침을 제시했다. 소련 또한 이미 1945년 6월에 그들의 동아시아 정책의 일환으로서 한반도에는 소련과 우호적인 국가가 들어서야 하며 한반도는 일본과 반드시 단절되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만약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한반도에 이 전략을 전개할 수 있는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소련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승전의 지분을 챙기기 위해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에 부랴부랴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루머는 꽤나 매력적이다. 하지만, 소련은 이미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에서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고 3개월 이내에 대일전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독일은 5월 8일에 항복하였으며 (예정 서명 시간은 베를린 시간 밤 11시였으나 실제로는 자정을 넘겨 5월 9일에 서명이 완료되었으며 애초에 예정 서명 시간도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5월 9일이었으므로 소련은 5월 9일을 공식 승전일로 기념)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Молотов는 8월 8일에 주소련 일본 대사 사토 나오타케佐藤尚武를 불러 다음날부터 소련과 일본이 전쟁에 돌입함을 통보했다.


40년 만의 설욕. 뤼순을 점령한 소련 해군 육전대


소련의 참전은 일본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은 결정적 사건이었다. 1939년 할힌골 전투Бои на Халхин-Голе에서 소련군에게 패배한 이래로 일본은 중국 전선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쩌면 중국 전선이 정리된 이후에도, 소련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것은 그 대가를 짐작할 수 없는 위험한 도박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일본은 1941년 4월에 5년 기한으로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고 불과 2개월 후에 독일이 소련을 전면 침공하였을 때도 이 불가침 조약을 이유로 들어 독일의 협공 요청을 거절했다. 만주는 대륙침략의 발판이었고 만주에 주둔하는 관동군은 일본 육군의 정예가 모여있던 곳이었지만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언제 끝날 줄 모르게 길어지면서 관동군 부대들은 다른 전선으로 계속해서 차출되어 소모되었고 1945년 당시에는 서류상으로만 75만이 넘는 대군이었을 뿐 그 실체는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었다. 1941년과 1942년의 눈부신 승리는 역으로 일본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대한 지역을 유지해야 하는 부담으로 되돌아왔고 미 해군이 반격을 시작한 1943년부터는 방대한 육군 병력이 태평양 각지의 섬에 흩어져서 각개전투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1944년 6월에 있던 필리핀 해 해전Battle of Philippine Sea과 이어지는 사이판 전투Battle of Saipan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1944년 10월에 레이테 만 해전에서 전략 목표를 수행할 수 있는 해군 전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다음 해 2월에는 필리핀마저 상실함으로써 태평양 방면에서 가해지는 미군의 공격에 일본 본토가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미군이 이오지마硫黄島를 점령하고 사이판에서 출격하는 폭격기를 호위하는 전투기를 위한 비행장까지 만든 이후에는 공습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사실상 전무했다. 중국, 인도차이나, 태평양 각지에 아무리 많은 병력이 남아 있어도 의미 없는 일이었다. 4월에 내각 총리로 임명된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는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다 사퇴했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전 총리를 특사로 삼아 소련에 중재를 요청하고자 했다. 중재의 조건은 한반도, 만주, 오키나와, 쿠릴열도 등 모든 해외 식민지의 포기라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었지만 소련은 중재는커녕 고노에의 모스크바 방문조차 허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겠다는 뜻을 전달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중재는 일본이 끝까지 가지고 있었던 희망사항이었다. 소련은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당사자였음에도 현재 일본과 전쟁 중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는데, 이것 역시 일본이 소련의 중재에 일말의 희망을 품게 한 이유가 되었다. 8월 9일 새벽에 소련군이 만주로 돌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내각에서는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한 긴급회의가 열렸고 회의 도중에 나가사키長崎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음 날, 일본 내각은 미국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뜻이 있음을 통보했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소련이 전쟁 준비를 마쳐놓고 여유 있게 참전 시기를 저울질하면서 미국과 일본이 모두 힘 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소련을 너무 악의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이다. 소련이 그야말로 나라의 명운을 걸고 독일과 4년에 걸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 고작 3개월 전이었다. 그냥 평시였더라도 전쟁 계획을 수립하고 부대를 유럽에서 아시아로 배치하는 데만도 몇 달은 걸릴 것이다. 소련은 인구의 10-14%에 달하는 1,800만 명에서 2,500만 명에 이르는 인명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동유럽의 질서를 재편하는 와중에 이를 수행해야 했다. 3개월 내에 전쟁 준비를 마치고 참전하기 위해서 여유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스탈린은 포츠담 회담에서 8월 중순 경 참전이 가능하다고 언질을 주었고 내부적으로는 8월 9일이나 10일에는 군사작전에 돌입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내려져 있었다. 일본의 항복이 없었다면 스탈린이 몇 주 가량 참전을 늦추면서 미국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합리적이다. 하지만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을 통보한 시점에는 아직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지지도 않았고 일본이 포츠담 선언 수락 의사를 통보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소련은 부랴부랴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것은 독일에 승리한 이후 겨우 3개월 만에 소련이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첫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그들이 이틀 만에 전쟁에 돌입한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미국이 소련의 참전을 바란 것은 일본의 전력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의 전쟁수행 의지를 과대평가했기 때문이었다. 태평양 전선의 수많은 섬에서 벌어진 공방전에서 미군이 본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본군의 저항이었다. 테나루 전투Battle of the Tenaru, 타라와 전투Battle of Tarawa, 사이판 전투, 펠렐리우 전투Battle of Peleliu, 앙가우르 전투Battle of Angaur 등에서 미군은 일본군의 '옥쇄'란 것이 무엇인지 보았다. 타라와에서는 일본군 2,600여 명과 조선인 징용노동자 1,200명을 포함한 노동자 2,200명 등 4,936명 중 일본군 17명, 조선인 노동자 129명을 제외한 나머지 전원이 전사하거나 자살하거나 자살을 강요받아 죽었다. 사이판에서는 일본군 3만 2천여 명 중 900여 명만이 포로가 되었을 뿐 일본의 항복을 모른 채 길게는 수십 년 동안 혼자서 계속 전쟁을 수행한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목숨을 잃었다. 2만 5천여 명으로 추정되던 민간인 중 미군의 민간인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은 1천여 명에 불과했다. 2만 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자는 전투의 막바지에 모든 희망을 잃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수천 명을 포함한 수치이다. 앙가우르에서는 1,400명 중 1,350명이 전사했다. 2만 1천 명이 수비하던 이오지마에서의 포로는 216명에 불과했다. 학도병 약 4만 6천 명을 포함해 12만 명 가까운 병력이 수비전을 펼친 오키나와沖縄에서는 11만 명이 넘는 인원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수행능력을 거의 상실한 상황에서도 전투수행의지가 꺾이지 않는 상대와 싸우기 위해서 미군은 상식을 뛰어넘는 전력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사이판의 자살절벽Suicide Cliff (또는 만세절벽Banzai Cliff)에 참배하는 아키히토 일왕과 미츠코 왕비


오키나와 방어전에 간호요원으로 징집된 히메유리 학도대ひめゆり学徒隊. 오키나와 사범학교(여자부)와 오키나와 현립 제일여고의 학생 222명과 교사 18명 중 136명이 사망하였다


오키나와 점령한 이후 수립된 몰락 작전Operation Downfall은 1945년 11월 1일 80만 명의 병력으로 규슈九州에 상륙(올림픽 작전Operation Olympic)하여 이를 혼슈本州 공격의 거점으로 삼고 1946년 3월 1일에는 도쿄 앞인 사가미 만相模湾에 110만 명을 상륙시켜 간토関東를 점령하고 도쿄로 진격한다는 거대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대규모 작전이었다. 규슈 상륙을 기만하기 위해 시코쿠四国에 양동 상륙을 수행할 파스텔 작전Operation Pastel에 참여할 병력만도 8만 명에 달했다. 유럽 전선에서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 (또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 50일에 걸쳐서 상륙시킨 총병력 수가 약 150만 명이었다. 영국에서 도버 해협만 건너면 상륙할 수 있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와야 상륙할 수 있는 일본은 상륙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보급에 있어서도 그 난이도는 비교할 수도 없이 높았다. 최종적으로 미군은 약 5백만 명, 영국군 등 기타 연합군은 약 1백만 명이 이 작전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수십만 명이 죽거나 다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일본군의 해안방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상륙전 준비사격의 단계에서는 해안 방어시설에 원자폭탄 투하가 예정되었다. 미군조차도 원자폭탄의 위력과 그 이후의 방사능 낙진의 부작용에 대해 아직 잘 모르고 있던 때였다. 소련은, 참전한다면, 북쪽에서 사할린Сахалин, 홋카이도北海道를 거쳐 혼슈의 도호쿠東北 지방에 상륙할 것이었다.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더 이상의 인명과 물자의 소모를 막으려면 소련의 도움이 절실했다. 소련이 1942년부터 미국과 영국에게 대서양에 제2전선을 만들어 달라고 수 없이 요청했던 것처럼 유럽 전선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이번에는 미국이 소련에게 동아시아에 제2전선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소련의 참전은, 그리고 이어진 일본의 항복은 모두 미국의 예상보다 더 빨랐다. 미국은 향후 수년간에 걸쳐 예상했던 엄청난 인명손실과 물자의 소모를 피하는 대신 자신들이 계획한 대로 전후처리에 들어갈 준비시간을 갖지 못했다. 미군이 일본에 진주할 군대의 상륙 준비도 갖추지 못한 반면 소련군은 거침없이 육로를 이용해 남하하고 있었다. 포츠담 회담에서 연합군은 일본에 대한 분할 점령안을 논의한 바 있었다. 소련에게 할당된 지역은 홋카이도와 도호쿠로 일본 열도의 거의 40%에 육박하는 넓은 땅이었다. 이대로라면 4년 동안 일본과 싸워 온 미국이 허둥지둥 대는 사이 마지막에 숟가락만 얹은 꼴인 소련이 일본의 40%를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질 판이었다. 미국은 기존에 논의된 일본 분할 점령안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8월 15일에 미국은 소련에 만주와 남사할린, 그리고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소련군의 관할지역으로 하는 안을 제시했다. 8월 16일 소련은 쿠릴열도와 홋카이도 북부도 소련군 항복 지구에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다. 8월 18일 미국은 쿠릴열도에 대한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요구는 거절하였다. 소련과 미국의 관심사는 모두 일본이었다. 미국은 아마도 일본 본토 점령이 협상거리가 될 때를 대비하여 최초 제시안에 물리적으로 미군이 진주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한반도의 남쪽 절반을 자신들의 관할지역에 포함시켰다. 소련은 일본 본토를 자신들의 군대를 진주시킬 수만 있다면 굳이 한반도 남쪽 절반을 두고 미국과 신경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소련은 그들이 가지려고 했다면 가질 수 있는 것을 다 갖지는 못했지만 충분한 흑자를 보았다. 미국은 애초에 계획한 것보다 소련에게 덜 양보했고 아시아 대륙에 처음으로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흥정 와중에 일본의 분할통치안이 폐기된 대가로 한반도가 분할되었다. 반세기 전 러시아와 일본이 막후에서 논의하던 한반도 분할협상안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현실화된 것이다. 민족이 해방을 깨닫고 지도자라는 인물들이 분열은커녕 합심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이제 한반도의 북부에서는 소련의 동아시아 전략이, 남부에서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실행될 것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각자의 전략을 실행하는 양상은 판이하게 달랐다. 소련은 해방자를 자처했다. 함흥을 점령한 치스차코프 상장은 8월 26일에 조선 인민들에게 보내는 포고문에서 조선은 자유이며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조선인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고 이제 자기의 행복은 스스로 창조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조선 민족의 훌륭한 민족성을 발휘하여 조선의 경제 및 문화를 다시 발전시켜라, 조선에게는 정직한 친구인 소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소련과의 친선을 지지하라. 소련은 단순히 포고문에서만 해방자를 자처한 것이 아니었다. 8월 24일 함경남도, 8월 26일 평안남도, 8월 31일 평안북도, 9월 13일 황해도, 9월 말에 이르러스는 함경북도까지 건준 지부와 지역 공산주의자들이 연대하여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자마자 소련군은 해당 도의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했다. 미국은 점령군을 자처했다. 미군의 서울 진주와 동시에 발표된 포고문에서 미 육군 태평양 방면 육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미군이 38선 이남의 조선을 점령함에 따라 조선에 대한 모든 통치권은 맥아더의 권한 하에 시행되며 이에 복종하지 않고 반항한다면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38선 이북에서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가 열리고 있던 10월 10일에 38선 이남에서는 미 군정 이외의 어떠한 정부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이 발표되었다.


< 치스차코프 포고문 中 >
조선 인민들이여! ...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 일제의 통치하에서 살던 고통의 시일을 추억하라! 담 위에 놓인 돌멩이까지도, ... 괴로운 노력과 피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절머리 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구히 없어져 버렸다. 조선 사람들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의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죄다 당신들에게 달렸다. ... 조선 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 조선 사람의 훌륭한 민족성 중 하나인 노력에 대한 애착심을 발휘하라. 진정한 사업으로서 조선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대하여 고려하는 자라야만 모국 조선의 애국자가 되며 충실한 조선 사람이 된다. 해방된 조선 인민 만세!


소비에트 민정청 군정장관 이반 치스차코프 소련 육군 상장


< 맥아더 포고 제1호 中 >
조선 인민에게 고함. ... 일본 천황의 명령에 의하고 또 그를 대표하여 일본 제국 정부의 일본 대본영이 조인한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의 지휘 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 [조선 인민은]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 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리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 점령의 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 ... 함에 있다는 것을 새로이 확신하여야 한다. ...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 영토와 조선 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 권한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 하에서 시행된다. ... 주민은 본관 및 본관 권한 하에서 발포한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군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또는 공공안녕을 교란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자에 대해서는 용서 없이 엄벌에 처할 것이다. ... 이후 공포하게 되는 포고 법령 규약 고시 지시 및 조례는 ... 주민이 이행하여야 될 사항을 명기할 것이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자 소련은 독일과 나아가 서유럽 국가들로부터 가해질 수 있는 위협을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감소시키기 위해 독일의 일부를 점령하고 독일과 소련 사이에 위성국들로 구성된 완충지대, 일명 철의 장막을 둘러쳤다. 일본의 생각 외로 빠른 항복으로 인해 일본 일부를 점령하겠다는 구상은 비록 실현되지 않았지만 한반도에 소련의 위성국을 세우고 이를 일본 사이의 완충지대로 삼겠다는 구상은 여전히 유효했다. 군정을 실시하면서도 공식적인 통치기구의 이름을 소비에트 민정청이라고 칭하거나 자유와 독립을 강조하면서도 실질적인 통치권을 그 나라 출신의 소련인에게 이양하는 행태는 동유럽과 북한에서 유사하게 관찰된다. 즉, 소련은 한반도에 세워질 국가가 소련의 동아시아 전략에 부합할 것이라는 확신만 얻을 수 있다면 굳이 직접적으로 한반도에 통치권을 행사하거나 보다 깊숙이 한반도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을 소련의 선의로 연결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소련은 그 확신을 새로 세워질 국가의 선의에 기대어 얻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전략을 충실히 수행할 것이 확실한 정부에게만 한반도의 통치권을 넘겨줄 계획이었다.


소련은 38선 이북에서 건준의 지방조직인 각 지방 인민위원회에 행정권을 이양한다고 선언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민위원회의 민족주의 인사들이 마음대로 나라를 세우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일례로, 건준의 평안남도 지부는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여 8월 17일에 구성되었지만 10일 후, 소련군에게 행정권을 이양받는 시점에서는 건준에서 16명, 공산주의자 16명으로 구성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양측이 동수였고 위원장은 여전히 조만식이었지만 애초에 건준이 좌우합작으로 구성된 조직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미 좌익이 민족주의자들을 숫자로 압도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소련이 공산주의자들을 후원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인민위원회는 허울만 민족의 자치행정기구가 되었을 뿐 실제로는 소련의 꼭두각시 기관으로 전락했다고 볼 수 있다. 소련의 입장에서는 겉으로는 독립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한국민의 열망을 굳이 부인하지 않으면서 속으로는 자치기구를 손에 넣음으로써 잡음 없이 자신들의 의도를 실현시킬 수 있었다. 명분을 주고 실리를 취하는 소련의 이러한 전략은 이후 미소공동위원회US-Soviet Joint Commission/Совместная американо-советская комиссия 에서 소련이 준비한 한국임시정부 내각 명단에서도 엿볼 수 있다. 소련은 내각이 남북 동수의 인원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수상, 부수상 2인을 모두 남측에 안배하여 명분상으로는 합리적이면서도 양보하는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그 실질을 보면 남측에 안배된 자리 중 수상 (여운형), 부수상 1인 (박헌영), 외무상 (허헌), 경제위원장 (최창익)은 모두 좌익의 차지였으며 우익에게는 고작 부수상 1인, 농림상, 재정상, 교통상, 체신상, 보건상, 상업상이 양보되었을 뿐이었다. 여운형을 수상으로 지명한 것은 그에게 소련의 꼭두각시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조만식처럼 일종의 얼굴마담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는 소련의 동아시아 전략의 실행을 위한 핵심지역이었다. 유럽에서의 승전과 미국의 대일전 참전 요청으로 소련은 자신들의 전략을 실행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얻었다. 소련군이 한반도 이북에 진주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전쟁범죄가 수없이 저질러진 것과는 별개로 소련은 한반도에 친소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정치적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미국에게는 한반도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위한 핵심지역이 아니었다.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환영 대회장에서 고당(古堂) 조만식 (오른쪽에서 두 번째)


앞서 말했듯이 미국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 이미 종전 후 한반도가 국제민간기구에 의해 신탁통치되어야 한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하지만 이는 특별히 한국에만 적용되는 전략이 아니라 전후 세계질서 재편을 위한 전략의 일부였다. 1823년에 제5대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James Monroe가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발표하여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의 간섭을 부인하였을 때만 해도 미국의 선언은 선언 이상의 의미가 없었으며 유럽 열강들은 거기에 콧방귀나 뀔 뿐이었다. 1848년에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거대한 영토를 병합하고 대륙 국가가 되었을 때도 미국은 여전히 유럽과는 다른 세계의 국가에 불과했다. 그러나 독립전쟁 이래로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대초원과 캘리포니아, 그리고 하와이까지 서쪽으로 서쪽으로 팽창하던 미국은 드디어 아메리카를 넘어 아시아에 시선을 두기 시작했다. 1853년, 매튜 페리 제독Matthew Calbraith Perry이 미 해군 동인도전대 소속 프리깃함 2척과 슬루프함 2척을 끌고 일본의 우라가浦賀(현재의 요코스카横須賀)에 나타나 개항을 요구하였고, 에도 막부는 1854년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1871년에는 5년 전에 발생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 삼아 로저스 제독John Rodgers이 군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로 와서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였지만, 광성보를 함락시킨 후에도 조정의 쇄국 의지가 굳은 것을 보고 철수(신미양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아시아 진출은 그들 자신의 내전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5년에 걸쳐 60만 명 이상이 전사한 남북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전후 처리와 재건 작업으로 인해 미국은 한 번 찔러보았던 조선은커녕 이미 문을 열어 둔 일본에도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일본에게는 근대화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준 행운이었고, 결국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며 1875년에 조선을 개항시키고 (강화도 조약) 1895년에는 청일전쟁에도 승리하자 아시아에서 미국이 마음 놓고 손댈 수 있는 지역은 남아 있지 않았다. 미국이 팽창하기 위해서는 유럽 열강이나 일본을 상대로 실력행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미국의 상대는 스페인이 되었다.


광성보 전투가 끝난 후, 조선군 전사자의 시신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는 카리브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고, 미국은 1853년에 스페인에게 쿠바 매입을 제안하였지만 거절당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미국의 자본은 꾸준히 쿠바로 유입되며 스페인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있었고, 19세기 후반에는 쿠바에 독립을 위한 여러 차례의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1895년부터 시작된 독립전쟁으로 스페인 세력이 쿠바에서 점점 밀려나던 1898년 1월, 쿠바 거주 미국인 보호를 명목으로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미 해군 메인 함USS Maine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로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폭발의 진상은 아직도 미궁에 감춰져 있으나, 미국은 이를 먼로 독트린 실현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이 사건의 책임을 스페인에게 물어 전쟁을 선포했다. 미국은 대서양 너머로 대규모 병력을 투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스페인을 상대로 손쉽게 승리를 거두며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전역을 점령했고 이어 전선을 아시아로 확장하여 필리핀과 괌마저 점령했다. 


한국과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미국-스페인 전쟁 (또는 '미서전쟁')이 한국 역사에 미친 파장은 나비효과의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다. 첫째, 미국은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이후 유럽 열강의 식민제국을 해체시키는 전략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미 미서전쟁에서 미국은 쿠바와 필리핀을 스페인이라는 압제자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실제로도 미국은 4년간의 군정을 시행한 후 쿠바를 독립시켰는데, 비록 그 이후에도 쿠바는 사실상 미국의 보호국이나 다를 바 없었으나 이후 미국은 이를 유럽의 식민제국과 자신을 차별화하는 데 활용하였다. 둘째, 미국은 필리핀에서 식민통치를 실습하였다. 쿠바에서와 달리 미국은 필리핀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필리핀은 미서전쟁 중에 독립을 선언하고 제1공화국을 수립하였으나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군정을 실시하였으며 무력으로 제1공화국을 무너뜨렸다. 이후 식민정부Insular Government of the Philippine Island를 수립하여 1935년까지 필리핀을 식민지배하였으며 그 후에는 이를 자치령으로 전환하여 미국의 보호국으로 삼았다. 필리핀 자치령은 스스로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여 행정권을 행사하였으며 10년 후에 완전히 독립될 예정이었다. 셋째, 미국의 필리핀 점령 과정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이 함대를 파견하여 미국의 뒤를 받쳐주었다. 필리핀 통치가 안정되기 전까지 본국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필리핀에서 미국의 입지는 생각보다 굳건하지 않았고, 미국은 이 지역에서 다른 강자들과 패권다툼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기록화. 1898년 5월 1일 마닐라 만 전투Battle of Manila Bay 에서 미 해군 아시아전대의 올림피아 호USS Olympia


이 중 세 번째 항목은 직접적으로 대한제국의 목줄을 조이게 된다. 1905년 7월 29일, 미국과 일본은 필리핀에서의 우선권과 대한제국에서의 우선권을 상호 인정하는 가쓰라-태프트 각서를 교환하였다.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의 연합함대가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격멸한 이후 유리한 고지를 점한 일본의 요청으로 미국이 양국 간의 화평을 한창 중재하고 있던 때였다. 이는 비밀협약이었고 조약의 조건을 충족하지는 못하였지만 이 각서를 교환한 가쓰라 다로桂太郎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oward Taft는 각각 당시 일본의 총리대신과 미국의 전쟁부 장관 겸 대통령 특사의 지위로 만난 것임을 감안하면 그 형식과 무관하게 실질은 양국 간의 조약이나 다를 바 없었다. 여기에서 가쓰라는 대한제국에게 러일전쟁의 발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대한제국이 이러한 상황을 납득하지 않고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과 대립하도록 부추겼으며 그 결과 일어나지 않아도 될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가쓰라는 일본이 러일전쟁의 사실상 승리자로서 다시는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방안을 실행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 방안이란 다시는 대한제국이 경거망동하여 이 나라에 붙었다가 저 나라에 붙었다가 하며 이권을 미끼로 다른 나라들의 관심을 끌어 대한제국에서의 일본의 우월한 지위를 위협함으로써 또 다른 전쟁을 야기할 수 없도록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의 관리 하에 두는 것이었다. 태프트는 이에 러일전쟁의 결과로써 일본이 대한제국의 종주권을 확보하는 것은 정당하고 이것이 동아시아에서의 평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것이라는 점은 자신뿐만 아니라 대통령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Jr.)도 동의할 것이라며 가쓰라에게 적극적으로 찬동하였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은 그로부터 4개월 후인 11월 17일이었다.


가쓰라 다로 제11대 일본 총리와 윌리엄 태프트 미국 전쟁부 장관 (이후 제27대 미국 대통령)


첫 번째 항목은 윌슨의 14개 조에서 다시 한번 천명된다. 하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이 윌슨의 14개 조는 승전국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미국의 참전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함께 싸운 연합국들에게 식민지 포기를 강요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영국의 반대로 민족자결조항은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에 반영되지 않았으며, 승전국의 군사적 목적에 따라 패전국 본국에서는 여러 나라가 독립했음에도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산재한 패전국의 식민지는 다만 승전국의 전리품이 되었다. 식민제국의 해체가 단지 민족자결이라는 명분 만으로 실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경험한 바였다.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는 신탁통치라는 잠정조치기간을 두면 유럽 열강의 반발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에 루스벨트는 이미 세계 전역에서 식민제국이 신탁통치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신탁통치가 또 다른 식민통치가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 국가가 특정 지역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는 것을 막아야 했으므로 신탁통치는 필연적으로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수행해야 했다.


신탁통치라는 방안은 두 번째 항목, 즉 필리핀에서의 식민통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미국이 쿠바를 거의 즉시 독립시킨 데 반해 필리핀은 식민지로 삼은 것에 경제적, 군사적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쿠바는 독립국이었지만 미국이 쿠바의 내정에 간섭하거나 외교를 감독할 수 있다는 내용이 쿠바 헌법에 명시되어 있을 정도로 쿠바의 주권도 제한되어 있었다. 아마도 미국은 식민지인 필리핀에서 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을 독립국인 쿠바에서도 할 수 있었다. 결국 차이는 쿠바나 필리핀이 독립국 체제를 유지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미국의 판단에 기인했다. 즉, 미국이 쿠바의 경우에는 일단 제도를 갖춰놓으면 체제가 유지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필리핀의 경우에는 제도를 갖춰놓아 봐야 현지인들이 이를 통해 체제를 유지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미국은 자신들의 필리핀 통치가 유럽 열강의 식민제국과는 달리 필리핀인들에게 자치능력을 배양시켜주기 위한 선의에 기반한 것이라고 여겼다. 미국에 따르면, 쿠바는 자치능력이 있으므로 4년의 군정만으로 독립했지만, 필리핀은 33년에 걸쳐 법과 제도에 따른 합리적이고 선의에 기반한 통치를 받는 경험(식민통치기)과 10년에 걸쳐 자치능력을 배양하는 경험(자치령기)이 필요하며, 미국의 필리핀 통치는 궁극적으로 필리핀이 자유로운 독립국가를 수립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루스벨트는 1941년 8월 처칠과 회동하여 전후 목표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여기에서 모든 민족이 자결권을 갖고 있으며 이를 침해하는 영토확장을 부인하고 당사국 국민의 의사에 따라 영토 변경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대서양 헌장The Charter of Atlantic을 발표하였다. 루스벨트는 회동 이후, 모든 인민은 '원칙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정부형태를 수립할 권리가 있으며, 이를 위해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후견인들trustees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인민들이 아직 지구 상에는 많이 있으므로 선진국가와 그 국민들이 이타정신을 발휘하여 이들을 돕는 신탁통치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다시 한번 피력했다. 식민지의 인민들에게 자치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루스벨트의 편견이었으나 그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 그리고 다른 열강들도 모두 별다른 고민 없이 공유하는 것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제32대 미국 대통령


'열등한 인민들이 우월한 인민의 지배를 받는 식민통치를 부인하여 유럽의 식민제국을 해체하고, 우월한 인민의 선의로 열등한 인민들을 계몽하여 자치능력을 배양하며, 과거 유럽에 의해 독식되었던 신생 독립국에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여 미국 주도의 질서를 수립한다.', 이것이 미국의 전후 세계전략이었다. 한반도 문제는 별도로 고민해야 할 정도로 특별한 문제가 아니었다.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굳이 미국이 '가장 빠른 시기에 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라는 문구를 수정하여 '적절한 시기에 in due course' 한국을 독립시키겠다고 한 것도 한국에 대한 별다른 뜻이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식민지에는 자치능력을 배양할 신탁통치기간이 필요하다고 본 일반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한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신탁통치가 더욱 필요한 나라였다. 국제적 의미에서 한국이 마지막으로 독립국이었던 1905년 당시에 한국을 바라보는 미국의 시각이 어땠는지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명확하게 보여준다. 40년이 흐른 후에도 한국을 보는 미국의 시각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1942년 미 국무부의 극동국에서 근무하던 윌리엄 랭던William R. Langdon은 한국이 근대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0년가량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1931년 이래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이하 '임정')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던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1942년 봄에 임정을 망명정부로 승인할 것을 고려했을 때 미국이 반대한 것도 대한 별다른 뜻이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식민지에게는 신탁통치 이후에나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본 일반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임정이 한국민의 진정한 대변자임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설사 임정이 모든 독립운동 단체를 총괄하는 유일한 통일체였다고 해도 미국은 임정을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식민제국이었던 영국이 떨떠름하게 바라보는 동안 루스벨트는 여기저기에서 한국과 인도차이나를 예로 들며 자신의 신탁통치 구상을 선전했다. 한국을 신탁통치할 나라는 발언에 따라 3개에서 5개국이었고 신탁통치 기간도 발언에 따라 25년에서 40년이었는데, 이는 어떤 식으로 한국을 신탁통치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은 하나도 세워져 있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루스벨트는 1942년의 라디오 연설에서 "지난 44년 동안의 필리핀의 역사가 지구상의 약소민족과 국가들이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훌륭한 본보기가 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1898년 이후 미군정 3년, 식민통치 33년, 그리고 보호령으로 8년째 미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필리핀이 본보기라면 한국의 완전 독립은 1989년쯤에나 가능할 터였다.


루스벨트의 국제신탁통치 구상은 20년 전 윌슨의 14개 조가 그러했듯이 미국과 함께 싸우고 있는 연합국의 반대에 부딪혔다. 영국은 인도에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자신들의 이익이 미국의 구상에 의해 침해될 것을 염려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와 달리 전쟁 수행에서 미국의 기여는 절대적이었지만 두 나라 모두 순순히 식민제국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루스벨트가 기회가 될 때마다 모든 식민지에 일괄적으로 국제적 신탁통치를 시행한 후 독립시키자는 주장을 되풀이한 것처럼 처칠Sir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은 기회가 될 때마다 대영제국의 문제는 미국이 건드릴 수 있는 범위 밖에 있음을 상기시켰다. 유럽 전역의 끝이 보이던 1945년에 이르자 루스벨트는 종전까지 영국을 설득하여 자신의 구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서 그는 한 발짝 물러나 신탁통치의 대상을 첫째, 국제연맹이 관리하고 있는 위임통치령 둘째, 독일과 일본으로부터 분리되는 영토 셋째, 자발적으로 신탁통치를 희망하는 지역으로 한정하는 데 동의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를 여전히 그의 구상 안에 붙잡아 두기 위해서, 그는 만약 이들이 자국 식민지의 완전한 독립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경우에는 해당 식민지에서 그들 독자적으로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데 동의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국제적인 신탁통치가 아닌 단독 신탁통치라면 가깝게는 필리핀에서 미국이 시행하고 있는 것이나 멀게는 일본이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에서 시행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사실상, 독일과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실질적으로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동의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1945년 2월 얄타에서,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고 만주와 한반도로 쏟아져 들어왔을 때 미국의 지상과제는 소련군의 진격을 최대한 일본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붙잡아 두는 것이었다. 미국이 38선을 소련의 남진한계선으로 처음 공식적으로 제시한 8월 15일 이전에 언제 누가 왜 38선을 정했는지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다수의 지지를 받는 설은 소련이 참전하고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할 의사가 있음을 통고한 직후인 8월 11일 새벽에 전쟁부 정책과장보였던 딘 러스크 대령David Dean Rusk이 찰스 보네스틸 대령Charles Hartwell Bonesteel III과 함께 결정했다는 것이다. 딘 러스크가 후일 밝힌 바에 따르면 38선의 결정은 다소 즉흥적이었으며 서울, 부산, 인천을 포함하는 정치적 이유가 고려되었다. 38선이 소련 참전 이전에 이미 기획되었다는 소수설도 있는데, 이 설에 따르면 38선은 앞서와 동일한 정치적 이유 때문에 이미 포츠담 회담에서 상호 묵인하는 방식으로 설정되었다. 다만, 소련의 참전과 일본의 항복 시기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마치 미래를 내다본 것처럼 38선을 사전에 설정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분명한 의문점이다. 당장 포츠담 회담 당시 미국은 아직 단 한 발의 원자폭탄도 투하하지 않았고,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작전의 타임라인은 1947년까지 잡혀 있었다. 어쨌든, 38선의 설정은 미국의 세계전략과는 별개로 소련의 남진 저지라는 보다 국지적인 당면과제를 해결한 것이었다. 미국에게 있어서 한반도는 여전히 그들의 세계전략에 따라 수십 년에 걸쳐 국제적인 신탁통치를 받은 후 독립할 지역이었다. 따라서, 미 육군 제24군단이 한반도에 상륙하여 군정을 시작하였을 때 미 국무부의 다음 목표는 한반도 전체를 신탁통치할 국제적 협의체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군정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이러한 협의체가 구성될 때까지 기본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이것이 소련이 해방자를 자처한 반면, 미국은 점령자를 자처한 원인이었다. 한반도는 아직 독립되기까지 족히 수십 년은 걸릴 지역이었으며 미 군정은 한반도에서 어떠한 정치적 권한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극히 빈약한 정무감각으로 인해 해방 이후 38선 이남의 혼란에 큰 책임이 있다고 비난받는 하지를 군정 사령관에 인선한 것은 미 국무부나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실책이 아니었다. 하지는 오히려 그들이 원하던 인물이었다.


'제3편 신탁통치안'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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