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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ulius Jul 25. 2018

의빈, 정조를 사로잡은 여인

너도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정조? 정종? ...정약용?" 영화 '건축학개론' 중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서연은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왕릉이자 그가 사는 동네 이름이기도 한 정릉이 누구의 능인지 알지 못했다. 영화 속 인물들이나 관객들이 '정약용'이라는 자신 없는 서연의 답에 폭소했던 것은 '정'자로 시작하는 인물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서연의 순진무구한 추리가 틀렸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서연이 그전에 '정조'와 '정종'을 말했을 때는 그것이 틀렸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웃지 못했던 것일 게다.


성북구 정릉

정릉은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계비는 후궁이 아니라 정실부인이다. 일부일처제가 자리 잡은 조선시대에 임금은 동시에 두 명의 왕비를 둘 수 없었다. 계비는 왕비가 먼저 세상을 떠나 임금이 새로 맞아들인 왕비이다. 다만 고려시대에 태어나 일생의 절반 이상을 고려왕조에서 보낸 태조는 당시의 풍습대로 함흥에 향처인 한씨를, 개성에 경처인 강씨를 정실부인으로 두고 있었다. 한씨는 조선 건국 전에 사망하였으며 이후 신의왕후로 추존되었다. 조선 건국 당시 유일한 왕비였던 강씨는 조선 건국 후 4년 만에 훙하였고 그 능이 지금의 정동 자리에 조성되었다. 정동이라는 이름이 정릉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신덕왕후와 정치적으로 적대했던 태종이 즉위하자 정릉은 도성에서 더 멀리 떨어진 지금 자리로 강제 이장당했으며, 능에 사용된 12 지상 등의 석물은 청계천의 광교를 만드는 데 쓰였다. 태종은 대 놓고 신덕왕후를 후궁으로까지 격하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위패는 종묘에서 치워졌고 제사는 후궁의 예로 지내 졌으며 무덤은 능이 아니라 일반인의 무덤인 묘로서 관리되었다. 250년이 지난 현종 대에서야 그녀의 위패가 다시 종묘에 모셔졌고 그 무덤도 다시 능으로 복권되었다.


선정릉

한자는 다르지만 한글로 정릉이라 표기되는 능은 강남구에 하나가 더 있다. 강남구에 있는 정릉은 조선의 11대 임금인 중종의 능이다. 정릉과 그 옆에 있는 선릉을 묶은 능역을 선정릉이라 부르는데 선릉은 9대 임금인 성종과 그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다. 정현왕후 윤씨는 중종의 모후이니 가족의 무덤이 모여 있는 셈이다. 정릉, 선정릉, 태릉 등이 도심 안의 왕릉이 된 것은 서울특별시의 강역이 계속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왕릉의 이름은 그곳의 지명이 되었고 왕릉은 담 바로 바깥과는 사뭇 다른,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이 그 자리에 남았다. 그러나 왕릉이 아닌 무덤에는 그런 행운이 주어지지 않았다. 경국대전에 따라 도성에서 10리 내지 100리 거리에 조성되었던 많은 무덤이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에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장되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에는 그런 식으로 이장된 왕실의 무덤들이 모여 있다. 격식에 맞는 석물도 갖추지 못하고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무덤들 중에는 정조의 장자인 문효세자와 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무덤도 있다.


문효세자는 정조가 31세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얻은 아이였다. 조선 초기에는 왕의 자손이 많아 흔히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알려진 무인정사나 수양대군이 일으킨 쿠데타인 계유정난처럼 왕자들 간의 권력투쟁도 있었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실의 자손이 점점 귀해졌다. 특히, 왕비로부터 자식을 얻는 경우가 드물어져서 조선의 마지막 공주는 1822년에 태어난 덕온공주이고 조선의 마지막 대군은 1624년에 태어난 용성대군이다. 태조부터 13대 임금인 명종까지는 오직 적자 승계로만 왕통이 이어졌지만, 그 이후에 적자로 왕위를 계승한 임금은 순종을 포함해도 겨우 다섯 명뿐이다. 조선 후기의 왕실은 왕비에게서든 후궁에게서든 아들이 한 명만이라도 태어나기를 바라야 했다.


그러니 문효세자의 출생은 대경사였다. 정조는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始聞爲人父之稱, 是可幸也 (정조실록 14권 정조 6년 9월 7일 첫 번째 기사)'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생모인 성씨는 그 즉시 정5품 상의에서 정3품 소용으로 봉작되었다가 몇 달 후에는 정1품 빈의 자리에 올랐다. 정조는 직접 의빈이라는 빈호를 골라 주었다. 의빈 성씨는 다음 해에 또다시 아이를 가졌고 이번에는 딸을 낳았다. 손이 귀한 왕실에서 잇달아 원자와 옹주를 출산하였으니 정조뿐만 아니라 왕실 어른들 모두가 의빈을 예뻐했을 것이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본인이 친정에서 데려온 몸종과 유모를 보내 의빈의 출산을 돕기도 했다. 아마 혜경궁으로서는 더욱 기뻤을 것이다. 의빈 성씨는 본래 혜경궁이 친정에서 궁녀로 데려와 후궁이 되기 전까지 근 20년을 곁에 두고 딸처럼 아끼며 기른 아이였기 때문이다. 남편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당시에 혜경궁은 영조의 명에 따라 아들 정조와 함께 친정으로 보내져 있었다. 영조가 세손을 믿고 사랑하여 그 아들인 사도세자를 건너뛸 생각으로 아들을 죽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미래의 시점에서 볼 때나 가능한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고 당시의 상황은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혜경궁은 두 차례의 자결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어떻게든 세손을 보위에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허락받은 그녀는 세손을 영조가 머무는 경희궁으로 보냈다. 친정집의 청지기의 딸인 의빈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온 것이 그때쯤인 것으로 추측된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아들을 떼어 놓고 홀로 남은 혜경궁을 옆에서 모신 것이 의빈이었다. 혜경궁의 딸인 청연군주와 청선군주가 3~4년 후에 시집을 간 후에도 의빈은 창덕궁에서 혜경궁을 모셨다. 외로웠을 혜경궁에게는 시중을 두는 궁녀라기보다는 친정에서 데려온 수양딸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혜경궁의 두 딸과도 친밀했는지 나중에 함께 곽장양문록이라는 소설을 필사하기도 했다. 세손이 혜경궁의 사가에 머물고 있을 당시에 이미 세손과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정조와 의빈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드라마 '이산'

정조는 그때 이미 의빈을 보고 사랑에 빠졌던 것 같다. 열다섯이 된 정조는 한 살 어린 의빈에게 승은을 내리려 했다. 다시 말하자면 후궁이 되어 달라고 청한 것이다. 후일 정조가 직접 남긴 글에 따르면, 의빈은 '울며 사양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고 한다. 후일 효의왕후가 되는 세손빈이 아직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감히 세손을 모실 수 없다는 이유였다. 언제고 왕위에 오를지 모르는 세손이었지만 이 일을 더 이상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생전에 후궁을 들였다가 학문은 가까이하지 않고 여자를 탐한다고 한 달이 넘게 영조에게 꾸중을 들었던 게 그의 나이 스물의 일이었다. 영조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는 마당에 세손이 강제로 궁녀를 후궁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들어가면 좋을 것이 없었다. 또한, 의빈은 단순히 궁녀가 아니라 어머니가 친정에서 데려와 딸처럼 기르는 궁녀였다. 혜경궁이 이 일을 몰랐을 리 없고, 영조에게 이 사실이 알려질까 염려하며 의빈의 편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세손이 의빈을 정말 사랑했기 때문이다. 왕이 궁녀를 사랑했다는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이야기를 더 하기에 앞서 정조가 의빈을 묘사한 글 몇을 소개한다.  


'빈은 나면서부터 맑고 총명하며 생후 만 1년이 갓 되자 능히 이름을 구별할 줄 알고, 단정한 태도와 자세를 수양하고, 맑고 올곧고, 더욱 상서로이 화기로우며 온화했다'
'길쌈에 민첩하고 요리를 잘 하고 다른 일도 가까이하여 붓글씨도 역시 스스로 범상함을 넘었다. 수리 학문을 익히면 능히 알아차리고 모두 이해했고, 정신과 식견은 느끼는 곳마다 밝은 지혜가 열려 도를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빈은 덕을 실천하고 지키는 마음은 그 무엇과도 섞이지 않고 온전히 드러냈으니 이는 본디 그대로의 것이 드러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체가 낮고 천한 여염에서 이 같이 빼어난 사람이 태어나서 세자를 낳고 영화로움을 받들어 빈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는 마땅히 우연이 아니다'
'세상에 어찌 빈과 같은 사람이 많겠는가'




정조는 의빈의 거절을 받아들였다. 그 후 12년이 지나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던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후궁 간택령을 내릴 당시 '주상의 본래부터의 성념이 미천한 처지의 사람에게서는 마음을 두려 하지 않는다 主上本來之聖念, 至於微賤處, 不欲其有 (정조실록 5권, 정조 2년 5월 2일 세 번째 기사)'고 한 것을 보면, 정조가 의빈을 후궁으로 삼으려 했던 사실은 정순왕후 귀에까지 들어가지는 않은 듯하다. 당시 정조는 임금으로 즉위한 지 벌써 3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효의왕후 사이에 아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정조가 궁녀들에게 눈길을 주거나 하는 것도 아니어서 왕실의 후사가 걱정된 정순왕후가 그렇다면 양반가의 규수라도 간택해서 후궁으로 들여야겠다고 마음먹고 명을 내린 것이었다. 그 해에 원빈 홍씨가 간택되었으나 다음 해에 아이 없이 졸하였고, 곧이어 화빈 윤씨가 간택되었지만 임신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다른 후궁을 더 간택할 것인지를 놓고 왕실과 조정이 고민하기 전에 이번에는 정조가 먼저 움직였다.


승은을 내리겠다는 정조에 대한 의빈의 대답은 이번에도 거절이었다. 거절의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가장 그럴듯한 추측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효의왕후를 생각해서 거절했다는 것이다. 왕조국가에서 왕비의 가장 큰 의무는 후계 생산이었으니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이었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임신해야 한다는 강박이 얼마나 심했으면 효의왕후는 나중에 상상임신까지 하게 된다. 왕후의 시모인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혜경궁도 이를 보며 안타까워했을 것이고 혜경궁 곁에 있는 의빈도 마찬가지의 심정으로 효의왕후를 걱정했을 것이다. 효의왕후는 임오화변 당시 친정으로 돌아가 있으라는 영조의 명에 자신은 이미 세손과 혼인했으니 세손을 따르겠다며 혜경궁의 친정에 함께 머물렀다. 동갑내기인 효의왕후와 의빈이 거의 같은 시기에 궁에 들어와 알고 지낸지도 20년에 가까웠다. 효의왕후가 아이를 갖지 못해 고통받는 것을 알면서 후궁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라는 것이 추측의 내용이다. 아니면, 그냥 후궁 자체가 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궁녀가 인기 있는 직업은 아니었고 후궁보다 궁녀가 나을 리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후궁이라는 자리는 이를테면 폭풍의 한가운데가 되기 십상이었다. 왕후를 저주했다는 탄핵을 받아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은 것이 불과 수십 년 전이었다. 심지어 희빈 장씨는 세자의 생모였고 중전으로 책봉되기까지 했었다. 아니, 세자의 생모였기에 권력암투에 휘말렸을 수도 있다. 내 아들을 다음 임금으로 세우겠다는 생각은 야심이 넘치는 후궁들이나 하는 것이고, 사실 후궁들이 편안하게 살다 가기 위해서는 오히려 왕비가 내명부의 질서를 확실히 잡아주는 것이 나았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왕비가 왕자를 낳아야 했지만 조선 후기의 왕비들은 아들은 둘째치고 자녀를 낳는 경우를 보기가 힘들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궁녀로서 혜경궁 곁에 남는 것이 훨씬 조용하고 안정된 삶일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정조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의빈이 목숨을 걸고, 또는 혜경궁이 뒷배를 봐주는 것을 믿고 어명을 어겼다고 추측하는 것은 의빈의 성정으로 볼 때 무리한 면이 있다.


어쨌든 의빈은 다시금 거절했지만, 정조는 더 이상 할아버지의 눈치를 봐야 하는 15세 세손이 아니었다. 정조가 어명을 거절한 주인을 잘못 모셨다며 의빈 대신 그 하인을 벌하자 의빈도 더 이상은 거절할 수 없었다. 정조의 청을 의빈이 받아들인 건 처음 정조가 의빈을 보고 사랑에 빠진 지 15년 만이었다. 그녀는 금세 임신했고 두 번 유산하기는 했지만, 결국 왕실 모두가 기다리던 원자를 낳았다. 그리고 2년 후에는 옹주가 태어났다. 이것이 그녀가 바라던 삶이었을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남편에게 사랑받고 아들과 딸이 태어난 것만으로도 의빈은 행복했을 것이다.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례를 그린 '문효세자책례계병'

당시의 유아 사망률은 높았다. 어린 옹주는 생후 두 달 만에 사망했다. 작위를 채 받기도 전이었던지라 옹주는 이름 없이 묻혔다. 불행한 일을 빨리 잊기라도 하려는 듯 정조는 그 해 7월에 의빈 소생의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문효세자는 당시 만 22개월이었는데, 조선에서 이보다 어린 나이에 세자에 책봉된 사례는 세 번 밖에 없다. 고종의 아들인 순종은 만 11개월에 세자가 되었다. 순종 이전 약 50년 동안 왕실에는 세자가 없었다. 아들이 태어나지 않거나 나더라도 10개월도 되지 않아 요절했기 때문이다. 순종은 반 백 년 만에 처음으로 만 1세가 거의 다 된 원자였다.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는 만 12개월에 세자가 되었다. 첫아들을 9세 나이에 앞서 보낸 영조가 7년이 지나 42살의 늦은 나이에 본 귀한 아들이었다. 숙종의 아들인 경종은 만 19개월에 세자가 되었다. 이는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에 대한 숙종의 애정의 표현이기도 했다. 당연히 이걸 달가워할 리 없는 정실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간에 암투도 치열해서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희빈이 중전이 되었다가, 다시 희빈이 폐위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었다가, 인현왕후가 일찍 세상을 뜨자 그것이 희빈의 저주 때문이라며 희빈에게 사약이 내려지고, 종국에는 숙종이 후궁은 중전으로 오를 수 없다는 것을 법제화하는 등 그 시절의 내명부가 파란만장한 회오리에 휘말리기도 했다.


융릉, 사도세자가 고종 대에 장조로 추숭된 후 왕릉으로 격상

어린 원자를 세자로 책봉한 것은 정조가 의빈에게 보이는 애정의 표시이기도 했지만 중전인 효의왕후에게 더 이상 후사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물론 세자의 법모는 의빈이 아니라 효의왕후였지만 그것이 자식을 갖지 못한 효의왕후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효의왕후와 의빈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의빈이 효의왕후를 보아 후궁이 되기를 두 번이나 거절했었고 후궁이 된 후에도 효의왕후 모시기를 지극히 하여 정조의 다른 간택후궁들을 탐탁지 않아하던 효의왕후도 의빈과는 다정했다고 한다. 정조가 의빈을 총애하고 세자를 위해 새로 세자궁을 짓고 행차할 때마다 의빈은 정조에게 효의왕후를 좀 더 가까이해 달라고 간했다고 한다. 물론 다혈질에 자기주장이 강했던 정조가 그 말을 잘 들은 것은 아니어서 그다음 해에 정조의 아이를 가진 것은 또다시 의빈이었다. 애초에 정조의 인생에서 자기 뜻대로 하지 못 한 것을 꼽으라면 15세에 의빈을 후궁으로 들이지 못한 것과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 하지 못한 것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도 결국 보면 정조는 의빈을 후궁으로 들였고 사도세자는 고종 대에 장조로 추숭 되었다.


어제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

왕비이든 후궁이든 아이를 임신조차 하지 못하던 것이 십 수년이었는데 의빈을 후궁으로 들인 지 5년 만에 벌써 다섯 번째 임신이었다. 경사가 계속 이어질 것만 같던 정조 10년 5월, 문효세자가 홍역에 걸렸다. 급히 의약청을 설치하고 약을 쓰자 이틀 만에 세자의 피부에 열도 식고 반점도 상쾌하게 사라졌다.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의약청에 상을 내렸다. 다음날에는 모든 것이 회복되고 열도 다 내렸으니 더 이상 약을 쓰지 않겠다는 보고가 있었고 숙직하던 의원도 철수하였다. 그러나 이틀 후, 갑자기 세자의 병세가 악화되었고 결국 다음 날 오후 훙서했다. 세자의 나이 겨우 다섯 살이었다. 정조는 크게 슬퍼하며 당시 고양군 율목동에 문효세자의 무덤을 쓰고 이를 효창묘라 이름 지었다. 오늘날 효창공원이 있는 자리이다. 세자묘의 신도비에는 정조가 비통한 심정을 직접 글로 남겼다.


‘이것이 꿈인가, 참인가.

참이라 하여 반드시 참도 아닐 것이고, 꿈이라 하여 반드시 꿈도 아닐 것이다.

當以爲孰夢孰眞而所謂眞者未必眞而夢者未必夢

(어제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


정조와 의빈은 문효세자의 장례를 함께 지켜보았던 듯하다. 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흑립과 백포 철리를 입고 묘소에 도착하여 최복으로 갈아입고 나머지 일을 지켜보았다. 장사가 끝나자 친히 신주를 쓰고 초우제를 지내고 그대로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 국휼등록에는 의빈이 세자의 장례 때 고유제의 축문을 읽은 후 무덤가에서 서럽게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식들을 모두 앞서 보낸 어미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의빈의 산달이 겨우 두 달 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세자의 훙서는 왕조에서는 국가적인 문제였다. 정조는 새로 태어날 아기가 왕자이길 바라며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이겨내려고 했던 것 같다. 정조는 의빈의 뱃속 아이를 두고 '문효세자가 돌아오려나 싶었다'라고 했다.


'빈은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니 빈이 뱃속에 품은 아이는 문효세자와 동기간이다. 문효세자는 이 아이를 보지 못했지만, 어머니에게 반드시 친밀감을 가지고 소중히 대하며 애틋하게 여기고 그리워하기를 구했을 것이다. 또한 형제가 틀림없이 매우 비슷하고 꼭 닮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呼嬪是文孝之母也嬪之腹之兒是文孝之同氣也文孝不可見而必求其親愛思慕者乎其母待其肖似髣髴者乎

(어제의빈치제제문)'


그러나 의빈은 딸과 아들을 떠나보낸 충격에서 쉬이 회복되지 않았던 것 같다. 정조는 '서로 위로하고 애써 떨쳐내고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평상시처럼 웃으면서 이야기하며 서로 잊고 지내는 듯했다'라고 했지만, 해산달이 가까워지면서 의빈의 기력은 점점 쇠약해졌고 가슴에 통증을 느끼는 병세를 보였다. 이미 '정신이 혼미하고 사지는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정조를 볼 때나 겨우 '기운을 내어 메아리처럼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의빈은 몸을 바로 하고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정조에게 앞으로는 자주 효의왕후를 찾아 대를 이를 아들을 얻으라고 울면서 부탁했다고 한다. 다음 날 의빈이 복중 태아와 함께 돌아가니, 그녀의 나이 서른 넷이었다.


‘의빈 성씨가 졸하였다. ...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하였다

宜嬪成氏卒 ... 上企待方切, 不勝悼惜。 朝野莫不以國本爲憂。... 上曰: "病情奇怪, 竟至於此。 從今國事尤靡托矣。"

(정조실록 22권 정조 8년 9월 14일 두 번째 기사)'


어제의빈묘지명이 적혀 있는 묘비석

의빈의 장례는 정조의 명에 따라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정조의 할머니인 영빈 이씨의 장례와 같은 예로 치러졌다. 정조는 직접 의빈의 묘지명(어제의빈묘지명)을 썼다. 여기에 자신이 두 번이나 승은을 내리려 했으나 거절당한 이야기, 얼마나 의빈이 아름답고 빼어난 여인이었는지에 대한 묘사, 그녀에 대한 사랑, 그녀를 잃은 슬픔이 모두 적혀있다. 효의왕후 역시 자매를 잃은 것처럼 울며 의빈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의빈의 무덤은 문효세자의 무덤인 효창묘에서 겨우 100보 떨어진 거리에 조성되었다.


‘저 고요한 율곡의 언덕은 문효세자가 잠든 곳이니 영원토록 서로를 지켜줄 것이다. 생각하건대 멀고 오랜 세월 동안 배회하며 탄식하고 근심할 것이다.

焉彼窈栗阡文孝攸藏兮永言相守想百世徊徨而咨傷兮

(어제의빈묘지명)'


후궁은 자신의 자식보다 신분이 낮다. 일찍이 효종의 후궁이었던 안빈 이씨는 자신의 딸인 숙녕옹주를 ‘너’라고 불렀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샀는데 결국 효종 생전에는 후궁첩지를 받지 못하고 그냥 상궁에 머물렀었다.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경우에는 그녀가 졸하자 묫자리를 잡았는데 그 묫자리가 있는 산에 명혜공주와 명선공주의 묘가 있었기 때문에 숙종이 이를 해괴하다고 꾸짖으며 묫자리를 잡은 내관을 파직하고 다시 묘산을 구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따라서 의빈의 무덤을 문효세자의 무덤 바로 옆에 두게 한 조치는 관례와 규범을 모두 무시한 파격이었다. 후에 효창묘와 의빈묘의 경계 문제로 두 묘를 관리하는 관청 간에 시비가 벌어지자 정조는 매우 노하며 앞으로는 효창묘와 의빈묘의 경계를 나누지 말 것을 명하였다. 사랑하는 의빈이 죽어서나마 먼저 떠난 아들 곁에서 영면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의빈의 장례가 치러지던 날 정조가 남긴 글에는 애통함이 가득하다.


'임금이 완연히 기대었는데, 어찌하여 아이들은 태어나고 멀리 가버렸으며 더욱이 그 어미마저도 멀리 가버린단 말인가.'


'바람 부는 소리에 슬퍼하며 밤에 술잔을 올렸다. 네가 홀연히 죽어서 보고 싶다고 해도 볼 수 없구나.'


'밤 동안 한 가득 걱정하다가 아침에 보내니 장차 서두르지 말라.'


'나는 바짝 이제 와서 네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슬프고 슬픈 사람의 마음은 매여있지 않은 것 같다.'


'나는 글로써 너를 보낸다... 살아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 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걱정과 근심이 많다.'




의빈을 떠나보내고, 정조는 일 년에 수 차례씩 의빈묘를 다녀가고 글로써 의빈을 향한 그리움을 남겼다. 효창공원 앞의 거둥고개는 정조가 몇 번이나 이 곳에 거둥 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임금이 나들이하는 것을 '거둥하다'라고 한다. 사랑하는 여인과 그 여인 사이에 낳았던 아들이 죽어서나마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정조는 그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었을까.


'아아! 후궁으로 있으면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알았으니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聖人)의 다음 가는 사람과 같았다. 지체가 높고 귀한 자리에서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검소함을 지켰다. 이에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는데 문효세자를 잃고 겨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잘못되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빈의 운명은 그것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심히 불쌍하고 슬프도다. 이제 장차 빈을 문효세자의 곁에 보내서 장례를 치르는데 이는 빈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무덤이 아주 가까워졌으나 넋은 막힘없이 잘 통하여 끝난 세상을 원통하게 울면서 사별한다. 이로써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지는 한을 위로한다.

너도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呼在嬪妾而識道理如其賢也 居勞貴而守謹約宣其祿也 絻喪文孝淚猶未乾而又與在腹之兒同歸化盡 嬪之命其亦可哀之甚也 今將送嬪于文孝之側而葬之此固嬪之願 耳玄隧密邇魂氣流通終天泣訣之恨永以爲慰

而亦當哀予之不能忘哀也 其然乎 不然乎

(어제의빈치제제문)'


효창원. 멀리 보이는 것은 백부인 의소세손의 의령원

150여 년이 지난 1944년, 경성 부근에 있는 조선왕실의 무덤 다수가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나라가 이미 수십 년 전에 망하고 그 땅을 강점한 일본 제국주의가 태평양 전쟁 말기를 맞아 국가총동원령을 내린 판국에 강제 이장되는 무덤들이 격식을 따져가며 옮겨졌을 리는 없었다. 신도비, 표석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석물들이 버려졌고 무덤들은 좁은 공간에 구겨지듯 밀어 넣어졌다. 어머니와 아들을 함께 있게 해 준 정조의 배려가 무색하게 문효세자의 효창원은 의소세손의 의령원과 함께 예릉 옆에 조성된 반면 의빈묘는 다른 15명의 빈묘와 함께 효릉 옆에 있는 후궁묘역에 조성되었다. 효창원과 후궁묘역은 거의 1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서삼릉 후궁묘역

문효세자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왕으로 추숭 되지 않았다. 폐세자 된 경우를 제외하고 세자 또는 세손의 위에서 훙서하고도 끝까지 추숭 되지 않은 경우는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의소세손, 그리고 문효세자뿐이다. 순회세자와 소현세자는 정실왕비 소생이었고 의소세손도 정실인 혜경궁 홍씨의 소생이었으므로 의빈은 왕이 되지 못한 세자를 낳은 유일한 후궁이다. 또한 의빈은 희빈 장씨와 함께 그 본명이 알려져 전해지는 단 두 명의 후궁 중 한 명이다. 임금의 평생 사랑이었으나 그 운명은 불행했던, 의빈의 이름은 성덕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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