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안아줄까요?3

by 브리

# 3

“너의 친구로서 부탁하는데 제발 담배 좀 끊어. 도대체 갑자기 왜 담배를 피우게 된 거야? 전자담배도 안돼. 난 너 오래 보고 싶어.”

<2년 전 세현이 산더미 같은 사탕을 재란의 품에 안겨주며 한 부탁>



남자를 보내고 재란은 호텔 정문 앞으로 걸어나 왔다. 벌써 밤 10시가 넘었다. 크림색 원피스와 흰 구두는 밤거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재란은 옷차림이 불편했다. 특히 7센티미터짜리 굽에 발등을 꽉 죄는 끈으로 된 구두는 신데렐라의 언니가 구겨 신은 유리구두 마냥 발을 아프게 했다. 짜증스럽게 재란은 핸드백을 열었다. 담배 한 대를 피웠으면 좋겠다. 그러나 담배는 2년 전에 세현의 부탁으로 끊었다. 담배 대신 재란이 꺼낸 건 엄지손톱만 한 사탕이었다.

하아. 재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에서 지내려면 마음 달래 줄 게 필요하다. 성운동 할머니가 ‘나 죽은 다음에 후회할 생각하지 말아라’라고 차갑게 쏘아붙이며 들어오라고 명령내리지 않았다면 여기에 없었을 텐데. 할머니는 나이가 들면서 더 까다로워지고 고집이 세졌다. 원래부터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재란이 신 여사를 처음 본 건 일곱 살 때였다. 키가 허리에 닿을락 말락 하는 작은 꼬맹이를 앞에 놓고 냉정한 눈으로 샅샅이 흩어보던 그 눈은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지난 2년 동안 재란은 엄마와 할아버지 제사 때 한국에 들어와 한 달가량 머무르며 할머니 비위를 맞췄다. 그러다 출국할 때가 되면 할머니 신경질이 늘었지만 “할머니가 부르면 언제든지 올게요”라고 거짓말로 달래면 괜찮았다. 그랬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의사가 할머니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했고 외삼촌인 김난수 회장과 사촌들이 약속이나 한 듯 들어오라고 합창을 했다. 할머니의 입김이 작용한 게 분명했다. 거기다 할머니와 한 약속이 있다. 현재 할머니의 관심은 오로지 재란이 마약과 무질서가 판치는 미국에서 돌아와 안전한 가정을 꾸리는 일이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죽기 전에 그 일을 완수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지 않고는 제대로 눈 감을 수 없다고 노래를 불렀다. 성운동 왕고집, 알아주는 독재자 신희녀 여사는 당신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사람을 달달 볶는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다 피곤해진다. 어쩔 수 없이 재란은 얌전하게 준비된 선 자리를 나가 주었다. 할머니가 하라면 하면 된다. 하지만 선이 잘 되고 안 되고는 재란이 결정할 것이다. 물론 잘 될 생각은 아예 없었지만

재란은 핸드백을 다시 뒤졌다. 꺼 놓았던 핸드폰에 전원을 넣고 켜지기를 기다리며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우아하게 웨이브를 넣은 긴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웠다. 핸드백 속에 머리끈 하나 정도는 들어있을 텐데 보이질 않는다. 가방 속을 헤집고 있는데 옆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재란은 고개를 들어 자기 앞에 선 검은 정장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오셨습니까? 댁에 모셔드리겠습니다.”

갸름한 얼굴에 안경 쓴 얼굴이 낯익다. 재란이 말없이 보자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 김승호 전무님 비서 오현택입니다.”


분명히 필요 없다고 했는데…. 재란은 이기적인 직장 상사 때문에 지금까지 퇴근을 못 하는 비서가 안타까웠다. 한두 살 먹은 어린 애도 아니고 혼자 집에 못 갈까 봐? 재란이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차는 주차장에 있습니다. 언제 나오실지 몰라서…. 전무님이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잠시 계시면 차를 이리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같이 갈까요?”

재란은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툭 털어버리고 가방을 고쳐맸다. 그리고 비서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비서가 얼굴을 붉히고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제가 차를 몰고 오겠습니다”


남자들의 이런 반응은 일상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 남자들은 끊임없이 재란 주위를 서성였다. 그들은 다정하거나 장난치거나 아니면 심술을 피우기도 했다. 재란이 초등학교 3학년일 때 할머니가 친하게 지내는 S대 철학과 교수님이 있었는데 그분이 심심풀이로 사주팔자를 봐주신 적이 있었다. 처음엔 장난이었다. 예쁜 꼬마 숙녀가 얼마나 더 예뻐질까? 한 번 봐주마, 하고 시작한 건데.


이런 사주는 연예인이 되는 게 딱 맞는데……. 무대에 서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일을 하면 좋게 풀릴 테지만 그냥 놔두면 애정사가 심각하게 꼬일지도 몰라요.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외숙모들 얼굴도 창백해졌다. 할머니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 집안의 어두운 기억을 건드렸다.


“이래서 씨도둑은 못 한다더니. 제 부모 인생을 그대로 닮았나 봐.”


어린 재란은 작은외숙모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그 후 재란은 보살핌이라는 감옥에 갇혀 끊임없이 교육받았다. 절제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함부로 틈을 보이지 말고 사람 쉽게 만나지 말고…. 지나친 반응이었지만 재란의 친부가 누구인지 안다면 할머니의 조치가 이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어렸을 땐 미칠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냥 할머니가 불쌍했다. 할머니는 재란을 싫어했고 동시에 재란을 사랑했다. 그냥 재란을 버리면 될 텐데 억지로 끌어안느라 주변 사람들까지도 힘들게 했다. 그런 할머니를 보며 짓눌린 재란은 언제나 물러섰고 인내했다. 그래야 주위 사람들이 덜 불행한 것 같았다. 직장인에게는 해야 할 업무가 있듯 재란에게도 그 몫이 있는 거다.


-그래도 완전히 바닥은 아니잖아. 나 정도면 꽤 괜찮게 컸지.


재란은 입을 꼭 다물고 호텔 입구 쪽 기둥에 기대어 섰다. 발이 아프다. 차가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다음 선 자리에 나갈 때는 절대 이 구두를 신지 않을 거다. 내가 신데렐라도 아니고. 이건 유리구두보다도 더 융통성이 없는 구두였다. 재란은 아픔을 잊기 위해 핸드폰 바탕화면에 있는 glaceto 어플에 들어갔다. 이건 수제 그릇 판매 앱이었다. 양평에 아는 공방이 있고 뉴욕에서 여러 활동을 하고 있지만, 최근에 그녀가 가장 몰두하고 있는 건 도자기 작업이었다. 열다섯 살 때부터 구슬을 꿰어 팔찌를 만들어서 프리마켓에서 팔았고 대학에 가서 조소를 배우자 흙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림과 달리 도자기 공예품은 돈이 되었다. 재란은 JG라는 브랜드로 접시와 컵, 화병, 작은 장식품 등을 만들었다. 마침 대학 동기 중에 메어린이라는 친구가 작은 소품 가게를 가지고 있어 재란의 상품을 팔아주었다. 3년 전부터 시작한 사업이 지금은 제법 단골도 생겼다.


눈으로는 그릇을 훑으며 머리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가는 대로 컵라면 하나를 먹고 시간이 늦었으니 할머니에게 보고는 내일 하면 될 거고…. 영교에게 같이 먹자고 할까? 재란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핸드폰이 울렸다.


재란은 굳어있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핸드폰 액정을 봤다. 영교였다.


-여보세요

-란. 어디야?

-일 끝나고 지금 들어가려고. 넌 집?

-응, 집이긴 한데…. 재란아 나 다쳤어.

-뭐? 언제?


오전 11시쯤 고객과 약속이 있다며 신나게 손을 흔들고 나갔는데 다쳤다니! 재란은 기대섰던 몸을 똑바로 세우고 전화에 집중했다.

-어딜 얼마나 다쳤는데?

-발목. 그리고 덤불 위로 굴러서 여기저기 생채기 좀 나고.

-어쩌다가?

-내 탓이지 뭐. 오늘 현장 답사갔는데 땅도 너무 좋고 나무도 괜찮고 그래서 신이 났거든. 그래서 막 달리다가 앞에 구덩이가 있었는데 그걸 못 보고 굴렀지. 병원에 갔는데 발목이 좀 많이 부었어. 깁스도 했어. 걷기 힘들어. 지금

-혼자 병원 간 거야? 나한테 전화하지. 내가 같이 갈 텐데.

-아니. 경호 오빠가 같이 갔어. 경호 오빠가 소개해 준 자리였거든. 오빠가 병원에 같이 가주고 집에도 데려다주고 갔어.


재란의 눈이 살짝 커졌다. 경호 오빠? 내 사촌? 그 남자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재란은 목덜미 쪽이 쭈뼛 서는 느낌에 손을 들어 귓불을 만졌다.


-경호 오빠가 가드닝할 게 있었어? 난 몰랐네.

-오빠 친구네 사옥에 작은 정원이 딸려 있는데 방치된 지 오래돼서 관리하고 싶다며 의뢰했어. 여동생 친구라고 일부러 신경 써주고 고맙지.


네가 내 친구라고 신경 써준 게 아니라 너라서 신경 쓴 거야. 이 말을 꾹 누르며 재란은 일단 중요한 일에 집중했다. 지금은 영교가 얼마나 다쳤는지 알아보는 게 먼저다.


-지금 집으로 갈게.

-그럼 나 부탁 좀 하자. 오는 길에 편의점 들러서 삼분 육개장 하나 부탁해.

-육개장 먹고 싶어? 그럼 내가 가게에 들러서….

-아니. 딱 그게 좋아. 선호식품 3분 육개장. 내 소울 푸드야.


명랑한 영교의 목소리에 일순 애절함이 담겼다. 재란은 호텔 정문에 미끄러져 들어오는 검은 차를 보며 대답했다.


-응. 알겠어. 안 그래도 나도 사발면 먹고 싶어서 편의점 들를 생각이었어.

-고마워. 땡큐. 란.

비서 오현택이 재빠르게 내려 자동차 뒷좌석 문을 열었다. 재란은 치마를 살짝 잡고서 우아하게 차에 올랐다. 현택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목적지를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두 달 전 한국에 들어올 때 외가에서는 강남에 오피스텔을 마련해 두었다며 그리로 들어가라고 했지만, 재란은 거절했다. 그 오피스텔은 외가와 너무 가까웠다. 대신 예전 친할머니와 지냈던 대산동에 집을 구했다. 마침 영교도 이사계획이 있어 그 애에게 맡겼다. 그녀가 구한 집은 오래된 빌라였다. 차 한 대가 빠듯하게 오고 가는 골목을 따라가면 주택 사이에 불쑥 솟은 5층짜리 건물이 보인다. ‘세련빌라’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순박한 건물이다. 빌라에는 빈집이 여러 개였다. 요즘은 이런 빌라가 인기가 없다나? 부동산 중개인은 그래도 이 빌라는 관리가 잘 되는 편이라며 열심히 바람을 잡았고 기분파 영교가 거기에 홀딱 넘어갔다. 영교가 보내온 사진을 보고 재란도 동의했다. 영교는 2층, 재란은 옆 라인 4층을 빌리기로 하고 영교가 먼저 이사 들어갔다. 재란이 짐을 넣은 건 두 달 전이었다.


“동네 입구에 있는 편의점에 세워주세요.”

어차피 이 차는 재란 집 앞 골목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동네 초입에 있는 편의점에서 내려 걸어가는 게 편했다. 재란의 말에 기사가 고개를 살짝 돌리고 ‘네’하고 대답했다. 차 창밖으로 조명과 어둠에 잠겨 있는 서울 거리가 지나간다.


다시 전화가 울렸다. 재란은 액정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 잠시 망설였지만,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디야?

-집에 들어가는 길이야.


상대방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재란은 핸드폰을 귀에 바싹 붙였다. 조용한 차 안에 재란의 목소리는 낮게 울렸다. 상대는 말없이 침묵했다. 재란도 상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오고 갔다. 재란은 힐끗 운전석을 보고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영교 소식 들었지?

-... 옆에 누가 있어?

-응

-알았어.


전화가 끊어졌다. 재란은 밝아진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박세현, 전화를 건 사람은 세현이었다. 몇 마디 안 나눴지만, 목소리가 나쁘지 않다. 다행이다. 잘 지내고 있었구나.

작가의 이전글똑똑, 안아줄까요?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