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너는 주로 한국에 있고 나는 주로 뉴욕에 있으니 매년 생일 선물 보내는 게 보통 일이 아니야. 앞으로는 선물 말고 현금으로 주는 거 어때? 네가 돈을 보내주면 내가 알아서 내 선물을 살게.“
<선물을 챙긴 지 오 년이 넘어가자 재란이 세현에게 한 말>
재란은 골목 입구에서 차를 보냈다. 골목은 어두웠지만 편의점 불빛이 환하게 주위를 밝혔다. 집에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재란은 허리를 굽혀 구두끈을 풀었다. 그리고 구두 바닥이 긁히거나 말거나 구두를 질질 끌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안은 한적했다. 영교가 좋아하는 해장국은 이쪽 선반에, 재란이 좋아하는 라면은 그 건너편에. 재란은 둘러볼 필요도 없이 바로 집었다. 그리고 맥주 코너로 가서 6개짜리 한 묶음을 들어 힘겹게 팔 위로 얹었다. 라면에는 맥주지. 입에 군침이 싸악 돈다.
“욕심 너무 냈다. 한 번에 다 먹게?”
등 뒤에서 손 하나가 쑥 들어와 맥주 묶음을 들었다. 재란은 깜짝 놀라 뒤로 돌았다. 긴 머리카락이 누군가의 가슴을 탁 치며 흩어졌다. 재란은 익숙한 체취를 맡았다. 누군지 안 봐도 안다. 재란과 같은 향수를 쓰는 남자다. 재란의 눈 앞에 남자의 목젖이 보였다. 고개를 드니 날렵한 턱이,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이, 그리고 적당하게 솟은 콧날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이 향수 쓰네? 박세현.”
재란은 세현과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세현이 쓰고 있는 검은 야구모자 챙 아래로 길고 갸름한 유선형의 눈매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여긴 왜 왔어? 너 이러고 다니면 안돼.”
“오래간만에 만나서 하는 인사가 퍽 정답네. 우리 얼마 만인 줄 알아? 6개월 만이야. 그게 얼마나 긴 시간이냐면 이재란 주량이 맥주 한 캔에서 여섯 캔으로 늘어날 정도의 시간이지.”
재란은 다시 세현의 손에서 맥주를 낚아챘다.
“계산해야 하니까 줘. 그리고 넌 나가 있어. 혼자 있어도 눈에 띄는데 너하고 나, 쌍으로 있으면 보라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들어주는 건 좀 있다 하자.”
안 그래도 편의점 직원이 유심하게 그들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재란은 태연하게 계산대로 가 카드를 내밀었다. 저 바보는 우리가 왜 6개월이나 못 보게 됐는지 까먹은 게 분명했다. 증권가에 찌라시가 왜 돌았겠는가? 크리스마스 휴가 때 뉴욕에서 같이 타임스퀘어를 걷다가 들킨 거 아니냐고.
“15700원입니다. 적립할 카드 있으세요?”
“괜찮아요.”
재란은 서둘러 편의점을 나왔다. 세현은 편의점 옆 골목 어둠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재란이 나오자 빠르게 다가왔다. 재란이 맥주캔을 내밀자 세현이 냉큼 받아들고 다른 손에 있던 해장국과 컵라면도 가져왔다. 실랑이하기 싫어서 재란은 내버려 두었다.
“영교랑 연락했어?”
“응. 너희 둘 다 똑같아. 어쩌면 그렇게 연락을 안 하냐? 영교 이사한 거, 나만 몰랐더라.”
“그것만 몰랐겠니? 나도 이사했어. 영교랑 같이.”
“그래. 그것도 나는 몰랐어. 네가 먼저 전화할 줄 알았지. 네가 그랬잖아? 헤어질 때 공항에서. 다시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라며. 기다렸더니 선을 보네? 이렇게 이쁘게 입고?”
세현은 하얀 모란 같은 재란의 원피스를 보며 콧방귀를 꼈다. 재란은 세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요계의 신사, 피아노 치는 교회 오빠, 어디 하나 모난 데 없이 매끈한 말투,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따뜻한 눈빛을 가진 세현이 지금처럼 입을 삐죽이는 건 재란이나 영교 앞에서뿐이다.
“내일 엄마가 영교네 집에 들르신대. 그 김에 너한테 줄 갈비찜도 가져오신다 그러시고. 아마 전화하실 거야.”
“한촌 이모랑도 통화했구나. 그럼 내가 따로 더 말할 것도 없네.”
세현의 엄마는 영교의 이모고 세현과 영교, 둘은 사촌지간이었다. 예전부터 재란은 세현의 엄마를 한촌 이모라고 불렀다. 이모가 사는 곳이 한촌 아파트여서 그렇게 자연스레 굳어졌다. 영교랑 친해지고 난 다음 서로의 인간관계도 겹쳐졌는데 한촌 이모는 재란이 얻는 최고의 수확이었다. 엄마가 없는 재란은 한촌 이모를 보며 엄마 이미지를 구체화했다. 사랑이 넘치고 사람 잘 챙기며 웃음이 많은 중년 여자. 돌아가신 엄마도 살아있어 나이를 먹었다면 분명 이런 분이셨을 거다.
“이모 오신다니까 집에서 얌전히 기다려야겠다.”
“넌 나보다 우리 엄마를 더 좋아하지?”
“당연한 걸 왜 물어? 넌 덤이야. 한촌 이모한테 딸린.”
세현은 아무 말이 없다. 화났나? 재란은 슬쩍 세현의 눈치를 봤다. 골목은 짧았고 금방 집 앞에 도착했다. 구두를 슬리퍼처럼 끌고 걸어 발등이 쓸렸는지 이번엔 그쪽이 아팠다. 재란은 세현의 손에서 맥주를 잡았다.
“이리 줘. 해장국만 영교 갖다주면 돼.”
“넌?”
“집에 가야지. 집에 가서 샤워하고 영교네 집으로 갈게. 그렇게 전해줘. 그런데 내가 영교네 집에 가면 넌 안 보여야 해. 알겠지? 샤워까지 하면 한 30분? 그 정도 걸릴 거니까 그 안에 돌아가.”
이제야 찌라시가 잠잠한 데 또 같이 있다가, 불씨를 피울 이유가 없다. 재란은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재란은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야!”
세현이 재란의 허리를 잡아 그대로 어깨에 둘러멨다. 비명이 밤하늘을 울리자 제 목소리에 너무 놀란 재란은 입을 막았다. 그 바람에 손에 있던 맥주는 놓쳐버렸다. 맥주를 감싸고 있던 종이 포장이 찢어지며 6개의 맥주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세현은 재란의 발에서 구두를 벗겨 들고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야. 박세현!”
크게 소리도 못 내고 재란이 세현을 불렀다.
“얌전히 가자. 발 아프잖아. 공주님 안기로 바꿔줄까?”
“내려 줘!”
“집에 가서.”
“세현아.”
재란의 말투가 애원 조로 바뀌었다. 세현은 이미 그 수법을 알고 있기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재란은 쫑알거렸다. 피가 쏠려서 죽겠다, 맥주는 어떻게 할 거냐, 한촌 이모에게 이를 테야. 그러거나 말거나. 세현은 순식간에 4층 재란의 집 앞에 서서 도어락 덮개를 밀어 올렸다.
“비번”
짧게 물었다. 재란은 바로 대답했다.
“네 생일 여섯 자리.”
진짜 힘들긴 한 모양이네. 평소라면 절대 말해주지 않을 텐데. 세현은 씩 웃으며 자신의 생일을 눌렀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잠금장치가 풀렸다. 노란 현관 등이 켜지고 그들 쪽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게 느껴졌다. 창문을 열고 외출한 모양이다. 세현은 조심스럽게 재란을 내려놓았다. 현관이 다시 잠겼다. 재란은 씨근덕거리며 말했다.
“비번 다시 바꿀 거야. 네가 절대 알 수 없는 거로.”
세현은 헝클어진 재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주었다. 익숙한 촉감이다. 허리에서부터 목덜미로 오래 기다렸던 감각이 타고 올라왔다. 상기된 얼굴을 보이기 싫었는데 마침 현관 등이 꺼졌다. 재란이 다시 불을 켜기 위해 공중으로 손을 휘저으려는데 세현이 재빠르게 그 손을 잡았다.
“이재란. 나 네 집에 들어왔다. 여기까지는 무대포로 밀고 들어 왔지.”
“못 본 사이에 용감해졌네.”
“6개월 못 보면 이렇게 돼. 사람, 미치거든. 내가 비행기표를 몇 번 끊었다 취소한 줄 알아? ”
“몰라.”
“연락한다고 해 놓고 연락 안 했지.”
“까먹었어.”
“내 생일에도 전화 한 통 없었고.”
“너도 안 했잖아. 그리고 우리 서로 생일 안 챙기기로 한 거 아니야? 이제 선물할 것도 없잖아.”
“나한테 선물은 너지.”
재란은 말이 없었다. 세현은 좀 더 몸을 낮추고 재란과 눈을 맞추었다. 어둠 속에서 재란이 입고 있는 흰 원피스가 뿌옇게 드러났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재란의 목덜미와 하얀 두 뺨도 어렴풋이 보였다. 세현은 재란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생일 선물 받고 싶어. 줄 거지?”
실크처럼 부드러운 세현의 목소리가 재란을 감쌌다. 재란은 숨이 막혔다. 어둠이 한 겹, 그리고 세현의 온기가 한 겹 더 그녀를 동여매 숨을 쉬지 못하게 했다. 재란은 손을 벌려 힘껏 쥐고 있던 핸드백의 끈을 놓았다. 두 사람의 발치로 핸드백이 떨어졌다.
“안아줘.”
재란이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 세현이 그녀를 가볍게 당겨 품에 깊숙이 안았다. 현관등이 켜졌다. 그러나 눈을 감아 버린 재란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서로의 체취가 섞였다. 재란은 세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두 팔로 허리를 꽉 죄었다. 세현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재란의 심장도 박자를 맞추었다. 재란은 세현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잘 잡힌 근육이 느껴지자 숨이 부풀어 올랐다. 피부는 따뜻했다. 재란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세현의 코끝이 목덜미를 따라 미끄러지자 재란은 고개를 들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세현이 살짝 웃었다. 옆으로 긴 눈매가 접혔다. 재란은 입을 맞추려 까치발을 했다. 그러나 세현의 입술이 먼저 재란의 이마에, 눈두덩이에, 귓가에 와 닿았다. 어느새 세현의 길쭉한 손가락이 재란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제자리를 찾아 한데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