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노래 들었어. 네 목소리는 정확히 36초 나오더라. 초시계를 들고 숨도 안 쉬고 정확하게 체크한 거야. 그 가사 말이야, ‘사랑은 살고 싶은 내 마음이야’이 부분. 그거 들으면서 나 조금 울었어. 웃기지? 댄스곡 들으면서 우는 사람이라니. 아 참, 나 말이야 팬카페도 가입했다. 나 이제 진짜 네 팬이야.”
-<세현의 아이돌 데뷔곡을 듣고 난 다음 재란이 보낸 메시지>-
-그리웠어..
세현은 재란의 입술 위에서 중얼거렸다. 그는 팔 한쪽을 재란의 허리에 걸치고 손끝으로 부드러운 살결을 가볍게 문질렀다. 연주가의 섬세한 터치에 재란은 피부 아래가 간질거려서 세현의 길쭉한 손가락을 잡았다. 단단한 손톱이 느껴졌다. 단정하게 정돈된 세현의 손은 재란이 사랑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만.”
“너무하다. 이재란. 우리 6개월 만이야.”
재란은 싱긋 웃으며 세현의 입 주위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혹시나 립스틱이 묻어 있을까 닦아주려는 것이었다. 세현이 재빠르게 재란의 허리를 낚아채 품으로 끌어당겼다. 둘은 서로 마주 안았다. 재란은 세현의 날개뼈에서 늑골까지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 사이 세현은 재란의 목덜미에 자잘한 입맞춤을 하다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재란이 덤덤하게 말했다.
“나를 먹어 치울 셈이야?”
“그래도 돼?”
“안돼. 영교 보러 가야 해.”
“늦었어. 그리고 아까 이재 불렀어. 지금 둘이 같이 있을걸?”
“역시 용의주도하다. 그럼 이제 가. 볼일 다 봤잖아.”
세현은 듣기 싫은 말은 입술로 막아버리는 편이었다. 아랫입술을 먼저, 그리고 윗입술. 부드럽게 침범해 들어오는 말캉한 혀가 재란의 다음 말이 나오지 못하게 막았다. 세현은 숨이 다 할 때까지 길게 입술을 밀어 부쳤다. 잠시 후 재란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짜증이 가득한 눈으로 세현을 째려봤다. 세현은 빙긋 웃으며 재란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지금까지 맞선 몇 번 봤어?”
정확한 포인트였다. 금세 재란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꼭 다물었다. 재란은 세현의 손을 풀고 거실로 휑하니 들어갔다. 세현은 천천히 몸을 숙여 발치에 떨어져 있는 재란의 핸드백을 집어 들고 뒤따랐다.
재란이 거실 스위치를 켰다. 낮은 2인용 핑크색 소파와 초록색 커피 테이블만 놓여있는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커피 테이블 위에는 작은 스피커가 놓여있었다. 그것 말고는 없었다. 심지어 커튼도 달리지 않았다. 대신 핑크색 소파 뒤쪽 벽이 선명한 청보라 색으로 채워져서 밋밋한 공간에 생동감을 불어 넣었다. 재란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재란은 강렬하게 대비가 되는 색조를 좋아했다. 뉴욕 집을 원색을 사용해 꾸몄던 걸 생각하면 이 집은 아직 발걸음도 못 뗀 상태였다. 거실은 꽤 커 보였다. 거실과 연결된 작은 베란다에 갈색 타일이 깔려 있어서 거실이 연장된 느낌을 줬다. 거실 옆 주방은 ㄱ자 싱크대가 거의 차지하고 있었다. 냉장고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숨겨놓은 걸까? 덩치 큰 냉장고가 있을 만한 공간은 부엌 바로 옆에 있는 방뿐이다. 이 집에는 문 세 개가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두 개가 방이고 하나가 욕실인 모양이었다.
세현이 거실을 둘러보는 사이 재란은 가운데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곧 물 트는 소리가 들렸다.
“집 좋네. 마음에 들어.”
세현은 핸드백을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온몸을 폭 감싸 안는 푹신한 소파였다. 세현은 엉덩이를 더 깊숙이 밀어 넣으며 등을 기댔다. 시선이 저절로 천장으로 향했다. 정확히 시선이 닿는 곳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별, 달, 구름, 태양, 새, 풍선. 번개, 비행기. 하늘 위에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이 두서없이, 그러나 조화를 이루며 함께 존재했다. 세현은 목을 꺾고 천장에 붓칠했을 재란을 상상해보았다. 재란은 항상 이런 걸 숨겨놓고 혼자 본다. 그 광경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런데 왜 여기야? 내가 사는 데 가까이 오면 좋잖아.”
“네가 사는 동네는 너무 비싸. 이 동네는 내가 예전에 살았던 대라 익숙해. 친할머니랑 살았던 집도 이 근처야. ”
욕실에서 재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오의 공주님께서 돈 걱정을 한다고? 우리 대표님이 그렇게 짠 사람이 아닐 텐데. 네가 말하면 강남 오피스텔이 문제야? 대표님은 회사라도 팔 걸?”
재란의 얼굴이 반쯤 나오더니 세현을 노려봤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경고다.
“이제 완전히 한국에 돌아온 거야?”
“할머니가 많이 약해지셨어. 옆에 있어 드려야 해.”
“아. 그래서 선보러 다니는 거구나. 그 회장 할머니라면 성공할 때까지 포기 안 하실 텐데. 이재란 곧 결혼하겠다.”
“어쩌면?”
얇은 타올지로 된 목욕가운의 허리끈을 묶으며 재란이 걸어왔다. 잠깐 사이에 화장도 지웠는지 아까보다 친절한 얼굴이 되었다. 세현에겐 이 얼굴이 더 익숙하다.
“6개월 전에 네 할머니랑 한 약속이 이거지? 나하고 스캔들 덮는 조건으로 선 봐서 결혼하겠다고.”
“야, 그땐 진짜 위험했어. 기사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할머니께 너랑 나, 우리가 친구 사이인 거 믿게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줄 알아? 그때 삼촌은 일본 출장도 취소하고 급하게 돌아왔어.
“그래. 그때부터 대표님이 나를 못마땅하게 노려보긴 하지.”
“삼촌이 그래? 음. 그건 네가 좀 견뎌. 나도 지금 견디고 있으니까.
”그런데 할머니가 우리가 친구라는 걸 믿어? 의외인데.“
”너하고 스캔들 난 사람은 나 말고도 많으니까.“
재란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카락이 들썩거리며 공기 중에 나부끼다 소파 위로 흩어졌다. 그녀는 피곤한지 머리를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완전히 기운이 빠진 모습이었다.
“이제 그만 가. 나 씻을 거야.”
“욕조에 물 받는 중 인 거지? 같이 씻을까?”
“어쩌면 다른 남자하고 결혼할 여자랑?”
“내가 그렇게 놔둘 것 같아?”
재란이 피식 웃었다.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안 될 걸 알고 있기에 체념한 것 같기도 했다. 세현은 팔을 들어 재란을 자기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재란의 상체가 그의 겨드랑이 아래로 들어왔다. 미드나잇 로투스 향이 번졌다. 둘이 함께 사용하는 향수였다. 4년 전 영국의 백화점에서 시향을 하다 연한 꽃향기에 머스크, 샌달우드 향이 섞인 이 향수를 발견하고 둘이 동시에 유레카를 외쳤다. 향수 판매원은 이 꽃향기를 화이트 로터스, 즉 연꽃향이라고 알려 주었다.
“걱정하지 마. 난 결혼 안 해. 버텨서 멋진 싱글 할머니가 될 거야. 네가 회사에 벌어주는 돈으로 나는 평생 놀고먹으면서 잘 살겠지. 간간이 짧은 연애도 하고. 너도 세상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거 다 누리고 난 다음 멋진 할아버지가 돼서 그때 나랑 노인정에서 만나자.”
“꿈이 크네.”
세현은 오래 입어 보풀이 보드랍게 일어난 재란의 목욕가운을 만지작거렸다.
“우리,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어디에 어떤 관계로 있든 우리가 친구라는 건 변함이 없었잖아.”
“이보세요. 그건 22살 그날, 그 밤 이전에나 가능했던 이야기지. 지금 우리가 친구인가?”
“아니야?”
재란의 목소리에 섭섭함이 깔려 있다. 그들은 친구이자 연인. 과거이자 현재였다. 그런데 미래만은 함께할 수 없다. 세현도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하냐고 물으면 사랑한다고 바로 대답하지만 내 만의 것이 되어 달라는 말에는 너털웃음을 짓는 이재란. 사랑의 독점욕이 그들 사이에서는 금지되어 있었다.
“넌 내가 이렇게나 소중한데 왜 자꾸 밀어내는 거야?
재란이 고개를 들어 세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치켜올려 뜬 눈이 커다랗다. 긴 속눈썹이 숲처럼 빽빽하게 둘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감춰주었다. 재란은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돌리고 눈을 감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