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안아줄까요? 9

by 브리

# 9 과거


“미국에서 영교를 만났을 때, 나는 너하고 친구가 되도 된다고 허락을 받은 것 같았어. 그 넓은 곳에서 어떻게 영교를 만났을까? 영교에게서 네 이름을 들었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나. 심장이 해파리에 쏘인 것처럼 따끔거렸어.”

-<열여덟 살, 재란이 부치지 않고 저장해 둔 메일 중에서>-



이모는 십 년 만에 만난 조카를 위해 손수 만든 저녁 식사 대신 따끈한 페퍼로니 피자를 주문했다. 그편이 세현에게도 훨씬 좋았다. 외가 식구들이 이모를 떠올릴 때마다 하는 말이 “으음. 명희는 흙탕물을 커피라고 속여 먹여도 모를걸”이랬으니 공인된 요리사의 손으로 만든 피자가 탁월한 선택이다.


피자는 엄청나게 컸다. 한 조각이 사람 얼굴만 했다. 이모부 잭 그린씨는 피자 두 조각을 가뿐하게 먹어 치우고 자리를 떴고 영교는 한 조각도 채 먹지 않고 계속 수다를 떨었다.


“브라이언이 집에 없어서 다행이지 뭐야. 브라이언 방이 꽤 크니까 둘이 지낼 수 있어. 이 집은 원래 손님방이 있는데 엄마가 그 방도 서재로 만들어버렸어. 손님도 안 오는 집에 비워두는 건 쓸모없다고.”

“그 형님은 몇 살이랬지?”

“스물셋.”


브라이언 그린은 잭 그린의 아들로 현재 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영교의 의붓오빠가 되는 셈인데 미국이라 오빠라 부를 필요가 없는 건 편했다. 영교도 그와 친하게 지내는 모양인지 대화 중에 곧잘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브라이언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있어. 방학에는 법률사무소에서 인턴잡하면서 돈 벌어. 그런데도 두 달에 한 번씩은 집에 꼭 오려고 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여차하다간 자기 방 뺏길까 봐. 이 집은 책이 자꾸 증식해서 어느새 방을 차지해버리고 말거든. 엄마도 엄마지만 잭의 책 욕심도 어마어마해. 둘이 서로 서재가 마음에 들어 결혼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야.”

“관심사가 같은 건 중요하지.”

“재란이랑 나도 관심사가 비슷해.”

재란이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피자를 한입 베어 물었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졌다. 재란의 팔목에 빨간 팔찌가 느슨하게 걸려있다. 형광등 불빛에 팔찌가 반짝 빛이 나면서 세현을 눈부시게 했다. 세현은 세 번째 피자 조각을 집어 들며 물었다.


“그런데 한국에 있을 때도 너희 둘이 친했어?”

“얼굴만 아는 정도였지. 그렇지만 단순히 미국에서 만났다고 해서 친해진 건 아니야. 잘 통하고 잘 맞아. 한국에서부터 친하게 지냈으면 좋았을걸. 글쎄 얘는 내가 자기 환송 파티가 간 것도 기억 못하더라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때 온 애들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여기서 내 얼굴 보자마자 제일 먼저 뭐라고 소리친 줄 아니?”


영교의 웃음이 의미심장하다. 내가 뭐랬더라? 재란이 그들이 다시 만난 순간을 회상하고 있는데 영교의 입에서 폭탄이 떨어졌다.


“나를 보고 ‘박세현!’하고 불렀어. 나를 기억한 게 아니라 세현이를 기억하고 있더라고.”


재란이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영교가 그걸 들었는지 몰랐다. 할머니의 명에 따라 미국에 와서 처음엔 무척 외롭게 지냈다. 전학한 학교는 넓은 숲 한가운데 있는 사립학교로 학생들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했다. 처음엔 재란도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미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은 재란에게 기숙사 생활은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한 학기 만에 통학으로 바꿨다. 나중에 알았는데 통학생들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엔 학교를 옮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만큼 힘든 학교였다. 재란은 버티고 버티다 결국 울면서 삼촌에게 전화했다. 수화기 너머 삼촌은 우느라 제대로 말도 못 하는 재란에게 딱 한 마디만 했다.


“내가 알아서 하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어떻게 한 건지 외가 쪽에서 사람을 보내 학교를 옮겨줬다. 새로 옮긴 학교가 뉴포라비치 이곳이었다. 집 한 채를 빌리고 집안일을 봐줄 아줌마와 학업을 책임질 선생님 겸 관리인으로 씨유스넘 대학에 다니는 여자 대학원생 한 명을 들여 재란을 돌보게 했다. 그제야 재란은 숨을 좀 쉴 수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 멍하니 수평선을 바라보며 한국을 생각했다. 그리고 가끔 세현을 떠올렸다. 한국에서 찍었던 사진. 그 마지막 장에 세현이 담겨 있다. 방학이 끝나고 얼마나 컸을까? 그 나무에 가서 다시 키를 재봤을까? 재란이 기억하는 한국에서의 마지막 추억이 바로 세현이었기에 그 애가 생각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재란은 생각이 나면 생각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디지털카메라를 켜서 세현의 사진을 확대해 살짝 처진 눈꼬리와 가늘고 긴 손가락을 보다가 그림을 그렸다. 세현이 서 있던 나무도 그리고 운동장도 그리고 나중에는 학교와 동네 정류장, 기억나는 걸 모두 그렸다. 화단에 핀 꽃, 교문 앞 비석, 붉은 학교 담장에 드리워진 초록 잎사귀 같은 것.


그렇게 한국으로 가득 차 있을 무렵 한인교회에서 주최한 포틀럭 파티에서 영교를 봤다. 그때 뒤로 돌아서 있는 영교 위에 세현의 몸 윤곽이 겹쳐 보였다. 키부터 전혀 다른데도 사촌이라서 그런가, 몸의 형태가 비슷했다. 긴 팔다리, 쭉 뻗은 목. 무용수를 떠올리게 하는 우아한 어깨. 그래서 불쑥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박세현. 실제로 입 밖으로 소리 내 본 건 처음이었다. 영교가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재란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사람들 틈에 숨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우스운 꼴을 당할 뻔했다. 세현은 아마 영교에게 재란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들이 잠깐 스쳤던 순간은 재란에게만 의미가 있었다. 한참 뒤에 재란은 감정을 수습하고 태연하게 영교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

“혹시 서영교?”

그녀를 알아본 영교의 환한 얼굴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랬는데 사실은 들었다고? 그리고 그걸 지금까지 감쪽같이 숨기고 있었고? 재란은 난감한 얼굴로 입술을 축였다.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저절로 세현에게 시선이 갔다. 세현은 놀랐는지 입을 살짝 벌리고 재란을 바라봤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들키고 싶지 않아 재란은 탁자에 팔꿈치를 대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너보다 내가 더 친했으니까 당연히 내 이름이 먼저 나오지.”


세현이 얼른 표정을 갈무리하고 친근하게 말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여야 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재란은 표정 없이, 조각같이 반듯한 옆 모습만 보였다. 거기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세현은 지금 재란이 난처하지 않을까 짐작했다. 열여덟 소년의 마음에 기사도 정신이 불타올랐다.

“웃기시네. 그럼 왜 한 번도 재란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데?”

“내 사생활까지 다 공유해야 하냐?”

“사생활? 그 말이 더 수상한데? 재란이가 왜 사생활이야?”

“너희랑 상관없는 친구 한 명쯤 있을 때도 됐잖아. 친구 나눠주기 싫어서 그랬다. 왜?”

“그럼 둘이 내 생각보다 꽤 친한 거네. 그래서 재란이가 네 소식을 궁금해했던 건가?”

언뜻 보니 재란의 볼에 붉은 기가 돌았다. 기분이 좀 나아진 건가? 세현은 과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으로 가고 연락이 끊어져서 아쉬웠는데 다시 만나니 너무 좋다. 일찍 알려줬으면 좋았잖아. 이게 뭐냐? 2년이나.”


약간 거짓말을 하는 것도 괜찮겠지? 재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지켜보며 세현은 조금 더 부풀렸다.


“미국 생활이 힘들어서 연락 못 했다고 생각했는데. 서영교, 네가 연락 못 하게 막은 거 아니야? 이 서프라이즈 중독자야.”

“아니. 그냥 재란이가 딱히 너한테 말해달라고 하지 않았고. 또 네가 아이돌 연습생이니까 관심 가지는 줄 알았지. 이재란. 말해봐. 뭐가 진실이야?”


재란은 턱을 괸 채 눈동자를 떼구루루 굴렸다. 어느새 고개가 바로 돌아와 있었다. 재란은 예쁜 눈을 반 접으면서 생긋 웃었다.


“미안 영교야. 우리 관계가 좀 은밀했어.”


이번엔 세현의 얼굴이 불타오를 차례였다.

×××


#10 과거


“아이오 엔터테인먼트라고요? 그 ‘아이오’가 맞아요? 이태광 대표님이 있는?”

“네. 원래 관심이 있으셨나 봐요. 대표님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요.”

“아니. 뭐…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요. ‘아이오’라면 좋아요. 오디션 받으러 갈게요.”

-<중학교 3학년, 길거리에서 만난 아이오 캐스팅 담당자와 대화 중에서>-



셔츠는 내가 책임질게. 세현은 세탁실로 가는 재란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재란은 아까부터 세탁실을 들락날락했다. 얼룩이 얼마나 빠졌나 확인하러 가는 것이다. 이모 집에 있는 얼룩 제거제를 발라놨더니 케첩과 머스터드의 흔적은 점점 옅어졌다. 그러나 처음처럼 돌아오진 않았다. 그런 거다. 뭐든 생기면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네가 좋아하는 옷인데 어쩌냐?” 이재가 그렇게 말하자 재란이 미안한 얼굴이 되었다. 세현은 이재 녀석 뒤통수를 한 대 갈기려다 말았다. 대신 재란의 컵에 콜라를 더 따라주었다. 셔츠 따위는 잊어버리고 편하게 피자나 마저 먹기를 바랬다.


그러나 갔다 온 지 5분 만에 다시 세탁실로 향하는 재란을 보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세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란을 따라갔다. 부엌 옆 뒤뜰로 향하는 복도에 있는 작은 세탁방은 세탁기와 건조기, 간단한 손빨래를 할 수 있는 싱크볼 하나로 가득 차 있었다. 재란이 대야에 담가둔 젓은 셔츠를 집게손가락으로 끌어올려 요리조리 살피더니 중얼거렸다.


“이게 아닌데. 아, 진짜 서영교… 이런 식으로 사람 당황하게 하네.”

“뭐가?”


갑자기 불쑥 세탁실로 들어온 세현을 보고 깜짝 놀란 재란이 몸을 홱 돌렸다. 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정말 인상적인 눈이었다. 미술책에서 봤던 고전주의 작가들의 그림 속 여자들처럼 우아하면서도 선명하고 생기 넘치면서도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눈이었다. 그런 눈이 세현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 또다시 속절없이 얼굴에 열이 올랐다. 세현이 먼저 눈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뭐가 당황스러운데?”


재란이 손가락으로 세현을 콕 집었다.

“…일단, 오늘 만나게 될 줄 몰랐고.”

그리고 다시 자신을 가리켰다.


“이렇게 내가 사고를 치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영교가 분명 주말은 돼야 올 거라고 했거든.”

“서영교가 하는 말은 두 번, 세 번 확인해야 해. 걔 엄청나게 덜렁거려.”

“일부러 그랬는지도 모르지. 나 놀려 먹으려고.”

“…기분 나빠?”


세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영교와 자신의 대거리가 불쾌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재란은 덤덤히 고개를 저었다. 재란은 셔츠를 다시 물속에 담그고 더운물을 조금 섞었다.

“좋은 인상 주고 싶었거든. 정식으로 인사하는 자리잖아. 우리 제대로 인사한 적 없지? 중학교 때 말이야 우리 집에서 학교 운동장이 보였어. 주말에 할 일없으면 베란다 앉아서 운동장을 내려다봤는데 그때마다 네가 축구를 하고 있더라. 애들이랑 축구 끝나고 나면 골대 위에 기어 올라가서 음료수 마셨지? 경비 아저씨가 기겁하고 달려오면 그 높은 데서 개구리처럼 팔짝 뛰어서 내려왔잖아. 다리가 멀쩡한 게 신기했어.”

“그 정도로 자세히 보였다고?”


재란이 양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눈에 갖다 댔다.

“망원경으로 봤지. 최고급 성능. 독일제.”

세현이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서 친하다고 착각 했나 봐. 실제로 봤을 때는 반갑다고 손을 흔들 뻔했다니까.”


세현은 방송실에서 봤던 재란의 눈빛을 떠올렸다. 분명 사나운 기운이 폴폴 했는데 어디에 반가움이 있었다는 건지. 그런 세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재란이 덧붙였다.


“물론 그때 내가 상당히 꼬여있어서 제대로 표현을 못 했어. 아무튼, 이번엔 나름 준비를 했거든? 나는 그런 거에 철저한 편이라서. 어떤 옷을 입을 건지, 첫 인사말은 뭐라고 할 건지. 그런데 영교가 제대로 날짜를 알려주지 않아서 망쳤지 뭐야. 이번에도 엉망이네.”

“엉망까진 아니고 강렬하긴 했지.”


팔짱을 끼며 키득키득 웃는 세현을 따스하게 보며 재란이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벌써 친구였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이상했다. 세현의 귀에 그 말은 참 쓸쓸하게 들렸다. 마치 밤하늘에 혼자 떠 있던 별 하나가 아무도 눈치 못 채는 사이 빛을 잃어가는 걸 목격한 기분이었다. 세현은 충동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잡아.”


재란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사람을 궁금하게 만드는 검은 눈동자에 세탁실 불빛이 비쳐 반짝거렸다. 세현은 더 기다리지 않고 재란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들었다.


“악수했으니까 친구 확정. 땅땅땅.”


재란이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땅땅땅’이 좀 유치하긴 했다. 그렇지만 재란이 웃었으니 됐다고, 세현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생각했다.



재란은 8시가 되자 집에 돌아가겠다며 일어섰다. 행동이 빠르다. 머뭇거림도 없이 손을 들어 “안녕”하고 인사를 했다. 세현이 엉덩이를 떼며 엉거주춤 일어서는 사이 재란은 벌써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재란을 배웅하고 돌아온 영교는 피곤하다며 기지개를 켰고 세현은 창 너머 달이 떠 있나 확인했다. 밤길이 어두울까 봐 달을 찾았다.


“쟤네 집 멀어?”

“대각선으로 다섯 집 건너. 참 빨리도 묻는다. 걱정되면 데려다준다고 하지 그랬어?”

“부모님이 엄하신 편이야?”

“재란인 혼자 유학 와 있어. 현숙 아줌마랑 같이 사는데 요리 솜씨가 끝내 줘. 신기하게도 이모 음식 맛이 나. 재란이 못 만났으면 나 여기서 못 버텼을지도 몰라. 엄마는 물론이고 잭도 요리에 관심이 없거든. 너희들도 살려면 재란이한테 잘 보여봐.”


영교도 요리를 못한다. 한국에 있을 때 라면은 무조건 세현이 끓였다. 서영교에게 맡기면 라면이 죽이 되는 마법이 벌어진다. 그런 영교지만 먹을 복은 있는지 주위에서 알아서 챙겨준다. 이재가 안타까운 얼굴로 “어쩐지 살이 더 빠졌다”라고 걱정을 했다. 저렇게 뻔뻔하게 얻어먹고 산다고 말하는데도 이제는 영교가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하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세현은 방에 올라가 창문을 열고 영교가 말한 ‘대각선으로 다섯 집 건너’ 쪽을 응시했다. 그쪽으로 달빛이 더 환하게 비치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똑똑, 안아줄까요?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