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색 vs 누런 이 색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는 매일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 생각해보면 근 40년을 살면서 지금까지 선택이라는 걸 해본 적이 몇 번 없었다. 학교도, 직장도 내 의지보다는 점수에 맞춰, 취업난에 떠밀려 갔던 거지, 나의 적성이나 기질, 취향을 따져가며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살아온 내가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10-20가지 사항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힘든 일이다.
선택의 폭은 무척 다양하다. 작게는 타일의 종류나 색상, 수전의 종류, 손잡이의 타입 등 앞으로 살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크게는 집의 구조를 어떻게 할지, 에어컨을 시스템으로 할지, 창문의 위치를 어디로 할지 등 한 번 결정했으면 다시는 바꿀 수 없는 구조적, 시스템적인 선택이다. 나의 경우엔 오늘 점심 메뉴도 잘 결정하지 못하는 성격이기에(우유부단 O형), 매일 크고 작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게 마치 수험생이 된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어쩌겠나. 내가 아니면 누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선택의 선택을 거듭해 결정했던 !타일!을 붙이는 날이 왔다. 집 전체 중 타일 시공을 하는 부분은 많지는 않고, 그래 봤자 공간별로 벽 한 면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일의 색과 형태를 정하는 게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어려울 일이다. 전반적으로 밋밋한 집에 타일로 약간의 포인트를 주고 싶기도 했고, 집에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손님에게 보이는 공간이 타일 벽면이기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1층의 현관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주방에는 크림색 타일을 붙이기로 했다. 워낙 아이보리, 오트밀 계열의 색을 좋아하기도 하고, 부엌은 뭐니 뭐니 해도 화이트가 깔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비록 타일 낱장 한 개를 보고 결정하긴 했지만 크림색은 대체적으로 실패할 확률이 낮다.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다.
내가 선택한 건 크림 색 아니었던가?
'크림'이라 하면 보통은 뽀얗고 보송보송하며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뭐 이런 느낌이어야 맞는 거 아닌가..
그런데 부엌의 벽에 붙어있는 타일은 마치 뭐랄까.. 커피 마시고 난 직후의 치아 상태랄까.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가 아니라 누렇게 탁하게 자신 없게! 누런 이빨을 연상시켰다.
아직 줄눈이 들어가지 않아서 이런 걸 거야.. 아직 벽이 도배 전이라 더 누렇게 느껴지는 걸 거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선택한 타일이기에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괜찮아, 괜찮아를 수십 번 되뇌었다. 자꾸 보다 보니 실제로 점점 크림색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예뻐. 진짜 괜찮아.
그렇게 마음에 안정을 얻고 시선을 화장실로 옮긴 순간.
무릎에 탁 힘이 풀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