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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송어 Sep 29. 2020

리얼 다큐 <보건교사 안은영>

<보건교사 안은영> 소설, 드라마 리뷰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을 넷플릭스에서 드라마화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메가폰을 잡은 것은 이경미 감독. 주연은 정유미라. 그야말로 '거를 타선이 없는' 작품이다. 


간호사로 근무하다가 목련고등학교 보건교사로 취임한 안은영. 그에게는 죽은 영혼이나 사념의 덩어리가 젤리의 형태로 보인다. 이 젤리들은 15분짜리 플라스틱 광선검과 22~28발짜리 비비탄 총으로 제거해야 한다. 그냥 두면 사람을 미치게 하기 때문이다.  


내용만 보면 <세일러문>이나 <카드캡터 체리> 같은 소녀만화를 연상케 한다. 몽글몽글한 젤리들과 귀여운 플라스틱 칼. 산뜻한 머리를 한 정유미까지. 하지만 전작에서 한 없이 맑은 얼굴로, 천진해왔던 정유미 배우가 한없이 무심하게 툭 욕을 뱉는 순간. 어색함과 함께 동질감을 느꼈다. 


안은영. 너는 나구나. 우리구나. 


안은영은 정의감이나 자부심으로 일하지 않는다.  "피할 수 없으니 그냥 당하는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선생님은 뭐든지 다 이해해" 라며 친구를 안심시키려는 학생에게 "그건 네 생각이야"라고 단호하게 거부하는. 


그래서 안은영이 내뱉는 "하... ssibal, zo t됐다"라는 덤덤한 말투는 어제 친구와 저녁 먹다가 나왔던 그 대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서도 의료용 더미를 굳이 얻어내 전교를 누비고 다니는 적극적인 모습 역시도, 입을 싫다고 말하면서도 몸은 꾸준히 출근을 하는 이 시대의 여성들을 떠올리게 한다. 


너 정말 우리구나. 정말 사실적인 캐릭터구나. 





그래서  안은영이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차별성이 나를 흥분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가 듣든지 말든지 욕을 하고, 주어진 사명을 (일단 겉으로는) 귀찮아하는 모습. 사실 남자 캐릭터들 중에서는 꽤 자주 볼 수 있는 패턴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학교 안에서 한없이 다정하기를 기대하는 보건 교사(구 양호 선생님)가 해결하기 귀찮으니 졸업이나 해버렸으면 좋겠다고 하는 장면은 이색적이다. 한 편으로는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한다. 

그래 졸업이나 해버려.


그래서 정유미 배우의 노련함이 무엇보다 빛을 발했다. 6개의 에피소드 내내 그는 절대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뻔한 '여성'처럼 하이 C의 고음성 비명을 지르거나 몸을 사리지 않는다. 징그러운 젤리를 볼 때도 인상 한 번 팍 쓰고, 욕 한 번 뱉는다. 기합을 넣고 물리칠 뿐이다. 우리 주변에 있는 아주 평범하고 일반적인 여성처럼. 

더불어 정유미 배우가 몸을 얼마나 잘 쓰는지. 의료용 더미를 들고 낑낑 거리는 모습과, 플라스틱 칼을 들고 악을 처단하는 그 몸짓이 같은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놀랍다. 





그래서 안은영의 힐러 역할을 하는 홍인표라는 남성 캐릭터도 흥미롭다. 

사실 얼굴부터가 핵인싸인 청춘스타 남주혁이 친구가 하나도 없는, 인기 없는 한문 선생님 캐릭터라니. 새마을 운동 시절 마을 이장이나 입을 법한 컬러의 양복바지를 입히는 것으로는 커버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주연 배우 간의 캐미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K-시청자로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덩치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주혁 배우는 은영에 비해 한 없이 약한 인표라는 캐릭터를 매력 없지만 매력적이게 잘 표현했다. 

여자 캐릭터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능력은 없고 정의감만 있는 민폐형 캔디 캐릭터를 밉지 않게 그려냈다. ( <킹덤>의 사슴 국과 영신이가 떠올랐지만, 영신에 비해 면죄부를 받을 만한 활약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성도 나의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금수저 한문 교사 홍인표. 초면에 해고를 말하는 그를 보며 케이 시청자인 나는 당연히 안은영이 홍인표에게 매달릴 것으로 생각했다. 은영을 박대하던 인표는 결국 은영의 진심을 보고 도와주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전개가 아닌가. 


하지만 이들은 수평적이다 못해 은영이 우위에 있는 수직적 관계다. 모두가 예스를 말할 때도 은영은 훌륭한 에너지 공급원이자 "보조 배터리"로서 인표를 대한다. 왜 이러시냐며 손을 뿌리치는 인표를 완력으로 이겨내며 '진짜 광기'를 보여준 은영의 얼굴은 극 초반, 잠시라도 로맨틱한 분위기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돋보였다. 









<... 안은영>을 추천하는 내게 만삭의 친구는 너무 무섭거나 징그럽지 않냐고 물었다. 


그래서 돌아보건대 이 드라마에서 가장 무서웠던 장면은 원어민 교사 매켄지와의 설전 신이었다. 


매켄지는 한창인 고등학생들과 축구를 하고, 언더*머 (해당 브랜드 제품은 어지간한 피지컬이 갖춰져있지 않으면 입어서는 안 된다는 밈이 돌고 있다.)  티를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원어민 교사다. 둥둥 떠다니는 젤리는 회식 후의 만취한 남자라는 위험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다.   

거기다가 영어 원어민. 영어를 못하는 것이 국가적 수치라고 생각하는 한국인으로서 맥킨지가 갑자기 영어를 사용할 때 L/C를 하는 학생의 마음이 된 것이 사실이다. 거기다가 "못 알아 들었지?"라고 묻는 맥킨지를 보며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은영은 그를 손가락으로 밀어버리며 당당히 "한국말로 하라"고 요구한다. 


그러게. 한국인데 한국말로 해! 



매켄지와의 설전 





6개의 에피소드를 아껴봐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새벽까지 몰아서 봐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바로 서점에 가서 <보건교사 안은영>을 구입했다. 


원작 작가인 정세랑이 직접 대본 작업에 참여한 것으로도 제작 단계에서 화제를 모았다. 원작의 맛을 살리려면 원작가가 나서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라고 생각해왔다. 


아니다. 기대 이상이다. 


정세랑 작가가 사실은 극작가 출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렇게 많은 아이디어와 발전시키고 싶은 부분이 있었으니 직접 손보겠다고 나선 것일지도 모르겠다. 


은영과 승표도 더 입체적으로, 더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아라, 승권, 인표, 래디, 혜민이가 원작에서는 동시대의 사람이 아닌데. 사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그들이 보여주는 끈끈한 우정과 캐미가 젤리 같이 몽글거리는 감성을 선사하기 때문에 오히려 각색을 한 편이 더 좋았다. 


학생들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한 캐릭터는 오경화다. 





사실 경화라는 캐릭터는 원작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거기다가 배우 오경화의 이름을 가져다 쓴 것인지 동명의 배우가 동명의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 이는 최근 방영한 드라마 <하이에나>에 정금자의 만능 비서로 나왔던 사람이다. 

(많은 시청자들이 이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보아 <하이에나> 때 사진을 첨부한다) 





원작에 없는 캐릭터다 보니 비중이 그렇게 크지도 않다. 앞서 말한 인표네 반 학생들은 각자 자기의 서사를 가지고 나온다. 시즌 1에서 비교적 짧게 언급된 래디의 경우에도 원작을 생각하면 시즌2의 첫 번째 에피소드로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경화는 다르다. 난 데 없이 등장하는 캐릭터다. 주요 캐릭터들과 그렇게 친하지도 않으면서 겉도는. 

오경화 배우를 좋아하는지라 왜 이렇게 애매한 배역으로 나왔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노래방 장면을 보고 생각했다. 

아. 이거 이경미 감독의 전작에 대한 오마쥬가 아닐까. 


다소 유치할 수 있는 소재였지만, 정말로 포스터부터 둥둥 젤리들이 떠다니고 있었지만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이경미 감독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가장 고급스러운 비급 감성을 표현하는 사람. 내 안에 이경미 감독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비급으로 걸작을 만들어 내는 사람. 


경화는 <미스 홍당무>의 미숙을 닮았다. 시설에서 왔다고 괴롭힘을 당하는 혜민보다도 더 존재감이 없고, 아이들과 멀리 떨어져서 밥을 먹는 경화. 경화의 맞은편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다. 

혜민을 위해 마련된 노래방 회동에 굳이 따라간 경화는 거기서도 다른 아이들과는 그 결이 다르다.  <비밀은 없다>에서 연홍의 딸 미진의 뮤직비디오 장면처럼 아이들은 음악보다도 제 안에 에너지를 풀어 넣는 데에 힘쓴다. 심지어 옴 잡이인 혜민 마저도, 살풀이를 하듯 휴지를 뒤 흔들면서도 아이다운 천진한 웃음을 띄운다. 

하지만 경화는 다르다. 마치 접신한 듯한, 발작적인 몸짓을 보인다. 목에 건 탬버린에서 나는 소리는 굿 판의 방울 소리를 연상케 한다. 미진을 찾기 위해 굿판을 벌인 연홍처럼 필사적이다. 

그래서 시즌2가 기대된다. 거기에서 경화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하나 더. 시즌2를 기대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필자가 로맨스를 사랑하는 K-시청자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은영에게 충전이 필요 없는데도 손을 잡고 압지석을 찾으러 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희망을 보았고, 원작은 더 노골적으로 그들에게 해피앤딩을 선사한다. 

사랑하는 연인 간의 갈등을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원작에서 등장한 신지영보다 더 디테일한 설정을 가지고 있는 황가영이 어떤 텐션을 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인표가 얼마나 애절하게 은영에게 차근차근 추근거리는지 남기고 싶지만 조금 참기로 한다. 

왜냐면 시즌 2는 분명 나올 것이고, 그때 당신이 느낄 즐거움을 빼앗고 싶지 않기 때문에. 



<83년생 김지영>과 작가가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다. 후속작 정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여성의 이름이 타이틀롤인 경우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김지영이 '빙의'라는 소재를 통해 사회적인 통념을 맹렬히 비판했다면 

안은영은 '퇴마'라는 완벽한 판타지 요소를 통해 새로운, 하지만 하나도 새롭지 않은 여성 캐릭터를 보여준다. 



어린 시절부터 원하던 일을 하는 친구도 있고, 전혀 새로운 분야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친구들도 있다. 그런 그들에게 야 너 멋있다,라고 말하면 미간에 우주의 모든 짜증을 모아놓고 말한다. 


"아냐. 진짜 별거 아니야. 아... 출근하기 싫어" 





안은영도 그렇다. 


한 없이 귀찮아하면서 때려치우고 싶다고 사직서를 써서 가슴에 품고 다니고, 학교를 소개해준 언니에게 투덜거리는 모습이 마치 어제의 내 친구와 같다. 


하지만 자기 몸 보다 더 큰 의료용 더미를 구해 애들 잘 보이라고 강당 수업을 마다하고 낑낑 거리며 교실마다 수업을 하러 가는 성실함도 

옴 잡이 혜민이에게 너 알아서 하라고 하면서도 제산제를 몇 상자나 내어주고, 종국에는 배꼽을 만들어주는 그의 따스함 역시도 닮았다. 


잔업을 처리하러 나가는, 잘리기 직전의 인턴을 위해 선임을 찾아 나서는 

평범한 내 친구의, 요즘 여성의 따스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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