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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송어 Aug 31. 2020

우울증이 공격할 약자는, 자기 자신일 것이라고 했다.

자해를 말하는 당신에게 

아빠가 우울증 치료에 관심을 가졌다. 


아빠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조절이 안 돼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엄마에게 화를 냈다고,

그래서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한지 몇 달이 지난 두 번째 일이었다. 


엄마의 경과가 좋아 아빠의 기분이 좋은 틈을 타 

나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정신과 선생님이

아빠가 힘들 것 같다고, 아빠를 걱정한다는 말을 한 이후였다. 


아빠가 정신병원에 갈 생각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나를 고양시키는 일이었다. 

나의 온갖 불행이 이것으로 끝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아빠도 조금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진료 예약을 해주겠다는 내게 아빠는


"나는 괜찮아, 견딜만해" 


라고 했다. 

그런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이게 지금은 괜찮지만 참다가 참다가 결국 가장 약한 사람을 건드린대" 


나는 엄마를 가리켰다. 

이제는 내가 아니다. 병상에 누워있는 엄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냈다. 


나는 아빠에게 바치는 희생제물로 나를 바쳤었다.  

하지만 그 상처가 엄마에게 간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아빠는 반색하며 말했다. 


"아빠가 공격할 사람이 가장 약한 사람이라면,

그건 아빠 자신이고 아빠는 자해를 하게 되겠네" 



머리가 핑 돌았다. 


자해.


당신은 우리 가족 중 당신이 가장 약하게 생각하는 것이 당신 자신이라고 얘기했다. 


아. 숭고했다. 

우리 가족은 그 숭고함에, 그 절절함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나는,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나에게 준 상처를 아무것도 가슴에 담아두지 않고 있구나. 

아니, 머리에도 담아두지 않고 있구나. 

당신이 생각보다 약한 자를 잘 찾아낸다는 사실을 당신은 모르고 있구나. 


아무도 모르고 있구나. 









아빠는 갱년기를 심하게 앓았고,

나에게 수많은 상처를 준 이후에야 

결국 우울증 약을 1년 정도 복용했다. 


갱년기와 우울증 그 어디에선가,

아니 그 모든 순간에 아빠는 나에게 심했다. 


나 때문에 죽어버리고 싶다고 했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못된 애라고 했다. 

하루 종일 밖에 일하다 온 나를 불러 하루 종일 당신이 어질러 놓은 상을 가리키며 집안일이 제대로 된 않은 것을 혼냈다. 


그야말로 '발작적'으로 화를 내서 

아빠를 피해 다니면 피해 다닌다고

눈에 띄면 눈에 띈다고 화를 냈었다. 


그러고 보면 그전부터 심했다. 

젊은 시절 습관적으로 즐기던 반주의 끝에는

습관처럼 내게 '교훈'을 전달하고 싶어 했고 결국엔 내가 울어야 끝나는 '훈육'시간이 있었으니까. 


벽에 박힌 못처럼, 못은 빠질지언정 그 파임은 메꿔지지 않는다. 


아빠는 아내도 아니고, 아들도 아닌,

집 안에서 가장 만만한 나를 불러 '혼내듯' 화풀이를 했었다. 








그래서 나는 못 자국이 성성한 성인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나를 가장 닮은 나의 아빠가 먼저 내게 정신병원을 갈 것을 권했고 

나는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라는 말만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애인과 싸우던, 아니 내가 일방적으로 애인에게 화를 내던 어느 날이었다. 

애인이 말했다. 


"그래. 그냥 나한테 풀어" 


나는 애인에게, 애인의 잘못이 아닌 것으로, 혹은 평소에는 지나갈 수 있었던 일로 

짜증을 냈던 것이다. 그것도 습관적으로. 


그래서 나는 정신병원을 갔다. 

내가 아빠와 똑같은 짓을 내 애인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였다. 



우울증은 내 주변에

나를 가장 사랑하는,

그래서 나에게 가장 잘해주는 사람을,

나에게 가장 약한 사람을 향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그렇게 약한 사람을 해한다는 나의 말에 

아빠는 자해를 얘기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약한 사람은 자기 자신일 것이라고, 그러면 아빠의 끝에는 자해가 있겠다고 했다. 

엄마를 해하느니 자기를 해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었다. 


아니, 

아니야 아빠. 


칼보다 날카로운 말로 아빠의 팔목이 아닌 

나의 행복을 그을 거야. 그리고 그 자리는 우울이 들어차겠지. 

지금처럼. 어제처럼. 십 년 전처럼. 아니 초등학생 때처럼. 


아빠가 지금껏 아빠의 팔을 한 번도 긋지 않은 이유는

그만큼 나를 그어대서일지도 몰라. 

아빠의 팔이 깨끗한 대신에 

내가 못 자국이 성성한 어른이 되었잖아. 


그래서인가? 

아빠. 

나는 차라리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어른이 되었어. 



"나는 괜찮아, 견딜 만 해."

사랑해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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