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와 귀납적 추론 사이 어딘가에
내가 좋아하던 선배 ㄱ은 얼마 전에 황당한 연락을 받았다.
오래전 첫사랑과 연락이 닿았고, 간질간질 한 연락을 연일 이어가는 중이었다.
선배는 이성 관계에는 결벽증적으로 깔끔한 성격 때문에
썸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보이자마자 '여자 친구가 있느냐'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남자는 '없다'라고 대답했다.
남자의 바쁜 스케줄 덕분에 간질간질 감질맛 나는 연락이 이어졌고,
드디어 만나기로 하기 며칠 전이었다.
[오빠 여자 친구인데 이런 식으로 연락하시는 거 좀 불쾌하네요.
굳이 만나셔야겠다면, 저랑 같이 셋이서 만나요. ]
나와 선배 ㄱ은, 실존하는 여성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진짜, 이렇게 대응하는 여자가 있다고?
자기 남자 친구가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상대에게 책임을 무는 사람이 있다고?
*
해외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동창 ㄴ과 연락이 닿았고, ㄴ에게 좋은 기억이 있던 남자 동창 ㄷ이 같이 만나자는 이야기를 했다.
곧 세 명의 단체 채팅방이 만들어졌고, 서로의 추억을 맞춰보며 즐거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날짜도, 장소도 모두 잘 맞았다.
[나 지금 데이트하러 가는데, 밤에 이 방으로 다시 초대해주라.
여자 친구가 질투가 많아서 이런 거 싫어해ㅎㅎ]
ㄴ은 ㄷ의 여자 친구가 유난이라고 했다.
[그냥 동창인데 뭐. 한국은 너무 유난이야.]
[그러게. 그냥 동창인데, 우리가 저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속이면서 쟤를 만날 이유가 있을까?]
한국 사람인 나는,
그냥 한국 사람으로 남기로 했다.
*
사실 나의 어설픈, 첫 연애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나는 남자 친구가 여사친과 단 둘이 술을 마시는 것이 나의 '허락'을 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다 큰 성인이,
부모도 아니고 애인에게 허락을 받는다니?
그리고 그날 한 번의 술자리 이후로,
그때 그가 보여준 태도로 인해,
나는 남자 친구의 핸드폰 검사까지 하는 사람이 됐었다.
친구?!
또 친구 만나러 가?
어떤 친구인데.
가서 사진 보내.
친구랑 같이 셀카 찍어서 보내.
못 할 거면 가지 마.
내가 그를 차지 않은 것도 용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나를 차지 않은 것도 용한 일이었다.
(그 여사친에 대한 그의 대처가 미흡했었고, 충분한 사과를 했고,
래서 그 문제에 관련해서는 내가 하자는 대로 하고 있을 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은,
애인의 여사친- 나를 놀리듯 같이 찍은 사진을 보냈던, 밤에 '보고 싶다'며 전화하던 그 여자에게 -
"당신 지금 선 넘었다"라고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이가 정말 내 애인을 유혹했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물어본다고 '네 제가 유혹 중입니다' 할 일도 없겠거니와)
애인과 내가
'어떤 행동이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지'에 대해 같은 기준을 가지고 합의할 수 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런 것으로 화를 내는 것이 유난인가? 너무 질투가 심한가?
자기 검열이 없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그 고민을 애인의 여사친이 아니라,
내 애인과 오랜 시간 상의했고 많은 싸움 끝에 그 협의점을 찾아냈다.
*
내 선배 ㄱ에게 연락을 했던 여자는 나와는 정 반대의 선택을 했다.
[오빠는 오해라고 했지만, 저는 기분이 나빠서요]
삼류 작가가 여성 혐오적 시선을 가지고 엉성하게 만들어 놓은 듯한 캐릭터가 아닐까 싶어 지던 그 여자는,
애인과 충분한 합의를 하지 못했다.
불안한 마음은 증폭되었을 것이고, 그래서 뭐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누군지 모르지만 자기 남자와 썸을 타고 있는 이 여자가
자기 남자보다는 오히려 말이 통할 것이라고 무의식 중에 생각했으리라.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리고 말이 통하는 상대 여자에게 경고를 하는 형식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것이다.
단톡방을 나갔던 내 동창 ㄷ을 보자.
20년 만에 만난 ㄴ 앞에서
'질투가 많은 여자'라고 자기 여자 친구 흉을 보면서도
그의 눈을 속이며 다른 여자를 만나고자 한다.
단톡방 정리까지 해가며.
과연 ㄷ의 여자 친구는 처음부터 질투가 심했을까?
그게 정말 질투일까,
아니면 축적된 경험을 통한 합리적인 추론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