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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송어 Nov 09. 2021

인생이 순탄한 너를,
나는 이제 용서할 수가 없다.

"괜찮아지실 거야" 


아빠가 암에 걸렸을 때. 그 사실을 차마 입 밖으로 내기가 무서웠을 그때였다. 

물론 아빠가 좀 편찮으시다는 내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 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별일 없을 거야" 


모든 것이 별 일 뿐인 내게, 앞 뒤 상황도 모르고 늘어놓던 위로들이 무엇보다 나를 아프게 했다. 


뭘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건가요. 



*


결국 사람들은 모두 늙고 병든다. 

그리고 각자에게 그 시점이 찾아오자, 종종 연락이 오고는 한다. 


"우리 아빠가 아파 보니까 알겠어. 그때 내가 너무 쉽게 얘기했던 것 같아. 미안해. 하나도 위로되지 않고, 오히려 상처만 되더라." 


결국 자신이 슬픈 만큼 그만큼 남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 

또 슬픔의 유형이란 제 각각이라서 절대 남의 슬픔을 제대로,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나 역시도 조심하려고 하는 부분이고. 


그래서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얄팍한 질투심 같은 것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직도 몰라? 

아직도 네 인생에는 그만큼의 굴곡이 없니? 


*


내가 좋아하던 친구 '순탄'이 있다. 

그의 순수함과 열정을, 그리고 자기에게 확신이 있는 면을 나는 좋아했다. 


그래서 전문직-으로 분류되는 직업을 가지고 바로 특권 의식에 사로잡혔을 때도

원체 자신이 하는 일에 확신을 가지고 항상 최선을 다하던 그였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업계에서 순탄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들려왔을 때도

그래도 그 친구가 느끼던 개인적인 고민이나 고뇌를 기억하며,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라 그의 편을 들었다. 


항상 자신의 의지대로 살던 그가, 자신의 모든 선택에 확신이 있던 그가, 

그러지 못할 때에도 나는 그의 편을 들었다. 


시부모님의 강행으로 결혼을 하게 됐을 때. 

그 전이라면 분개했을 남편의 무책임한 태도에도. 

그가 이전의 그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에도,

그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해 늘어놓는 다양한 소식들이 변명 같더라도

나는 모르는 척 그의 결정을 지지해 그의 편이 되어 주었다. 


물론 그의 인생도 본인이 느끼기엔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결혼 준비하는 내내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시부모님이 해주시는 집에, 시부모님이 리모델링을 해주셔서 

리모델링 예산에 눈치를 봐야 했다는 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순탄하게 결혼하고, 

순탄하게 신혼 생활을 즐기다가

순탄하게 출산했다. 



*


'네 새끼 너한테나 예쁘지'

순탄은, 그 말이 정말로 필요한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모인 동창회에서 우리는 서로의 소식을 물어볼 틈이 없었다. 순탄의 아이의 첫 이갈이 때 순탄이 느꼈던 감격이나, 뭐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물밀듯이 밀려와서 우리는 순탄의 아이가 얼마나 예쁜지에 대해 호응해줬어야 했으므로. 정작 몇 년 만에 만난 서로에 대한 회포를 풀 시간이 없었다. 


아.

끝이구나. 


난 순탄으로 인해 이 모임이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순탄이 그토록 사랑하던 아이가 아팠다. 

사실 아기들에게는 흔하게 일어나는 병이고, 

그 옛날에도 그 병의 치료는 가볍고 별 것 아닌 것으로 분류됐다. 


그래도 나는 순탄의 순탄한 인생에서 처음 일어난 작은 굴곡에 

그가 많이 힘들어할 것을 마음속 깊이 걱정했다. 

병원에서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순탄은 힘들어했으며, 

그런 스스로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그렇게 힘들면 오히려 아기에게도 좋지 않으니 조금 진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곧,

슬하의 자식이 없는 내가 그의 슬픔의 깊이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 역시도 무례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바로 사과했다. 

순탄은 화가 날 뻔했다고 했다. 


나는 아기 때문에 힘든 데 나 때문에 기분 상하게 했음을 사과했다. 

그리고 순탄 역시 그만큼 성장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얼마 전 다른 친구가 부친 상을 당했다.

코로나와 타향살이로 빈소가 썰렁할 것을 걱정한 그는 가족들과 상의해 빈소를 차리지 않았고

두 세 사람에게만 소식을 발인 전에 알렸다. 


주변에 알리고 싶지 않은가 싶어서 나도 발인이 끝나고 나서야 주변에 알렸다. 


모든 일이 끝나고 친구가 주변에 알

그의 최측근으로서 그를 위해 조금 더 일찍, 기민하게 주변에 알리지 못함을 사과했고

조의금을 대신해 전달해주기도 했다. 


순탄은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친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고 했다. 

대중교통으로 가기도 어려운 곳에 차가 없는 그 친구를 배려하지 않은 장소 선정이었지만

순탄은 정이 많은 아이였고 아마 따스한 밥이라도 해 먹이려 했나 보다 생각했다. 


그래, 내가 좋아하던 순탄의 모습은 이런 부분이었지.


나는 순탄의 아이가 있는 순탄의 집에서, 

과연 순탄의 자식 말고 다른 주제의 대화가 가능할지 걱정했지만

일단 가장 먼저 친구를 불러 대접하려는 그의 마음이 너무 따듯하다고 생각했다. 


*


나는 순탄이 그를 초대한 후 며칠이 지난 후에야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친구는 풀이 죽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을 단체톡에 올리지 않았다고,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고 혼을 냈다고 했다. 


너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옆에 있어줄 친구들이 있다. 

우리의 우정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라. 

뭐 그런 말을 하고자 했겠지. 


하지만 순탄은 그의 인생이 너무 순탄한 나머지  

그 누구의 장례식도 가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

장례식장은 슬픔이 공기로 떠다닌다. 

가장 많이 들리는 소리는 울음소리보다도 눈물을 참아내는 소리인, 그런 곳이다. 

그곳에를 한 번이라도 갔다면 

과연 감히.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순탄을 나는 용서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그를 내 곁에 두지 않기로 했다. 


가족이 아플 때 주변의 가벼운 말이 자신에게 상처가 됨을 배웠음에도

다른 이가 가족을 잃었을 때

한 없이 가볍고, 또 경솔했다. 


"악의가 없이 상처 주는 사람이 더 나빠. 

의도를 가지고 상처를 주는 사람은 오히려 의도를 거두면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계속해서 상처를 주거든."



*


친구에게 말했다. 


언젠가, 순탄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이 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너에게 미안해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것은 나의 기원이었다. 

나는 바란다. 

순탄이 언젠가 어쩔 수 없이 맞이 하게 될 이별의 순간이 순탄히 지나가기를.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깨닫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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