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 3. ‘책 읽어주기’라는 일상
아이들은 누구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한다. 특히나 어른들이 들려주는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지어낸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데, 어른이 된 나는 이상하게도 옛이야기를 하는 재주는 없다. 그래도 읽어줄 수 있는 책이 있어 다행이다.
“둘째야, 우리 무슨 책 읽을까?”
의미심장한 말이다. 오롯이 한 아이에게만 집중해서 책을 읽어주겠노라 다짐했다. ‘책을 읽으라’ 하지 않고 ‘읽어주마’ 하는 나 자신이 기특하다며, 시작도 전에 마음속으로 나를 칭찬했다.
“엄마 옆으로 와.”
“오예.”
초등 아들은 사실 책을 읽기 싫었다. 그런데 오늘은 눈으로 보며 듣기만 하면 되니까 신나는 기색이다.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골라 편안한 소파 자리에 앉았다. 아이는 내 곁에 착 달라붙었다. 아이의 감촉이 부드럽고 포근하다. 이제 책을 읽어주기만 하면 된다. 오늘은 이 책을 좋아할까. 늘 하는 생각이다.
“우리, 오늘은 집중하자.”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엿보인다. 바쁜 하루 중 일정 시간을 독서에 할애하는 것이다. 독서를 하면서 지식이나 지혜도 쌓게 해 주고픈 마음에 시간을 알차게 쓰고 싶다.
“그런데 엄마, 오늘 우리 반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이 …”
책 내용 중 어떤 부분이 일상을 떠오르게 했나 보다. 목청을 가다듬고 열심히 책을 읽어주는데 책장을 넘기자마자 갑자기 딴소리다. 이 이야기는 꼭 읽어줘야 할 것 같은데, 오늘은 집중해서 30분 책 읽기로 했는데 왜 그러지.
“조용히 해 봐, 이거 읽고 얘기하자.”
“하, 알겠어. “
아이와의 달콤한 소통을 잃었다. 독서에 대한 즐거운 추억이 사라졌다.
내가 아이에게 책을 읽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책을 읽은 후 얻는 지식 때문이었나. 또는 엄마가 아이를 위해 시간을 내어 책을 읽어주었다는 뿌듯함 때문인가.
나는 책 속에서 지식이나 지혜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가 온전히 책에 집중하길 바랐다. 사실 뭐든 본인이 즐거워야 책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고, 책을 읽다 보니 지혜와 지식이 어느새 다가오는데 말이다.
엄마인 내가 아이에게 어떤 목적을 가지고 대한다고 해서 아이를 내 맘대로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 지금은 엄마의 말을 들어주지만, 나중엔 그러지 않으리라. 그리고 모름지기 지혜란 부모의 행동을 보며 배우기도 하는데, 나는 지금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
내가 어릴 때 주말에는 엄마, 아빠와 함께 가까운 곳으로 당일 여행을 자주 다녔었다. 주말에 딱히 할 일이 없으면 동네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제일 큰 대형 서점으로 나가 책 쇼핑한 게 생각난다. 서점에 도착하면 나와 동생을 자유롭게 풀어주셨고, 우리는 마음 가는 책을 마음껏 읽었다. 어떤 책을 읽는지는 관여하지 않으셨다.
그 자유로운 한두 시간이 참 좋았다. 엄마, 아빠가 이제 집에 가자고 말씀하실 땐 서운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원하는 책을 한 권씩은 사주셨으니 좋았다. 그 당시 서점에서의 분위기만 생각해도 참 행복하다. 내가 서점을 좋아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일 것이다.
비록 중고등 시절에는 부모님이 나에게 읽으라고 사주신 한국문학, 세계문학 전집이 어렵고 재미없다는 핑계로 독서를 하지 않았지만, 가족과 함께 한 유년 시절 추억이 있기에 어른이 되어서 책을 찾고, 곁에 두며, 독서를 하는 것 같다.
책을 읽어주다가 아이가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즐거운 독서에 한발 다가선 것이다.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책 한 권을 읽는 것보다 더 귀한 시간이다. 아이가 자기 말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책 읽는 것보다 한 단계 위다. 말을 잘하면 글도 잘 쓴다. 그러니까 책 한 장 못 읽고 넘어갔다고 째려보거나 혼내면 안 된다. 쫑알쫑알 엄마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귀여운가.
나는 아직도 내 이야기 잘 들어주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독서에 대한 즐거운 추억은 부모와의 즐거운 독서 경험, 놀이, 대화를 통해서 만들 수 있다. 아이들은 대단한 것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그저 작은 일상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고 즐거운 것을 나누길 원한다. 책을 매개로 한 대화나 놀이로도 얼마든지 따뜻한 추억을 만들 수 있다. 당장 펼친 책과 관련이 없어도 좋다.
책 읽다 집중 못 했다고 엄마가 화낸 기억을 떠올린다면 너무 슬프지 않을까. 순간순간 깔깔대며 웃으며 유쾌했던 추억, ‘아, 그때 진짜 재미있었지.’ 하면서 마음 꽉 찬 느낌, 충족감. 이런 것들을 통해 인생을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평생을 단단하게 살아가게 하는 가치관을 결정짓는 데는 지식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와의 즐거운 경험도 굉장히 중요하다. 아이와의 달콤한 대화는 언제나 환영하자.
옛 시절을 추억할 때는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를 기억한다. 훗날 아이들이 책 읽는 것이 즐거웠다고 말하며 어른이 되어서도 책을 가까이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