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 한통, 과일믹스 한팩, 감자과자 한 봉지, 콩 과자 한 캔, 환타 1.5L 페트병 하나, 그리고 고급 프로세코 와인 한 병을숙소 근처 마트에서 샀다. 이탈리아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해서 아내와 나는 작은 파티를 열었다. 정말 재미있고 '즐거웠다.'
'즐거웠다'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제대로 된 식당에서 찍은 사진이 없다. 베네치아 사진 폴더를 한참 동안 뒤적이다가 '그 파티'는 식비를 줄이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울컥했다.베네치아에서도 이런 짓을 했구나.(신혼여행이면 좀 쓰지 이놈아.)
나도 참 지독했다. 언제 다시 갈지 모르는 베네치아인데 그걸 아끼다니. 다행히 아내는 이런 짠내 나는투어를 이해해주었다. 새삼 고맙고 미안하다.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마도 살인적인 베네치아 물가에 어떻게든 비싼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늘 그랬다. '최적 소비'가 언제나 '취향 소비'보다 우선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여유 없이 자랐다. 그런데 아내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조금은 그녀를 배려했어야 한다.그때는 용납되지 않은 가성비 떨어지는식사가 후회가 되는 것을 보니 이제는 주머니에 조금 여유가 생긴 것 같기도 하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햇볕이 쨍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아름다웠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이탈리아에서 가장 낭만적인 하루였다. 영화제나 그림으로 보던 풍경 속에'우리'가 있었다.
리알토 다리
두칼레 궁전
리알토 다리 위에서 한참 동안 운하를 감상했다. 멀리 보이는 바다색은 옥빛같이고왔다. 운하는 잔잔했다. 운하를 가르며 조정보트에서 노를 열심히 젓는 사람들, 그와는 달리 곤돌라에서 여유롭게 노를 젓는 사람, 나처럼 정신없이 구경하는 사람들,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인다. 운하 너머로 보이는 베네치아 랜드마크 두칼레 궁전의 돔이 인상적이다. 모든 피사체가 선명하게 보일 수 있는 이유는 역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강렬한 태양광선 덕분이다.이곳사람들에겐 일상이겠지만 여행객에게더없이 특별한 날이었다.
구겐하임 컬렉션
페기 여사의 구겐하임 컬렉션은 포근하고 아늑한 저택에 전시되어 있다. 여느 미술관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는데, 건물의 위치다. 바다한가운데에 있는 미술관이 여기 말고 또 있을까?물론 피카소, 칼더, 막스 에른스트, 칸딘스키, 르네 마그리트, 뒤샹, 앤디 워홀, 잭슨 폴락 등20세기 거장들의 작품들도 대단했다.
그런데 창문이재미있었다.중간중간 난 창밖으로 넘실대는 푸른빛 운하가보인다. 전시 작품들 사이사이에 위치한 창들은 독특한 무늬의 창살에 햇볕을 투과시킨다. 드문드문 전시된 작품에 그 무늬를 비치기도 하고 창 하나가 오롯이 작품 같기도 하다. 곤돌라가 지나가며 시시각각 풍경이 바뀌는데, 칼더의 키네틱 아트와 다를 게 있을까? 한참을 들여다보니 건물과운하가 너무 가까워서바닷속으로 가라앉는 착각이 들 지경이다.
빛의 제국(르네 마그리트), 신부의 의상(막스 에른스트)
남쪽 프라우드 P의 초상화(파울 클레)
컬렉션 중에서도 빛의 제국, 신부의 의상, 남쪽 프라우드 P의 초상화, 이 세 가지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특히 막스에른스트의 작품은 보자마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색정적이면서도 기괴한 느낌.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홀리듯이 그의 다른 작품들도 감상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림을 감상하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나쁘고 찝찝한 느낌이 증폭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문란했던 사생활로 유명했던 작가는 변태적인 성욕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의 무의식을 초현실적으로 표현하는데 집중했음을 알게 되었다.(모피코트에 변태성욕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림을 잘 모르는 나같은 사람도 보자마자 묘한 기분이 들게 할 정도면 대단한 작가임이 틀림없다.
남쪽 프라우드 P의 초상화는 다른 의미로 인상이 깊었다. 아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한 작품인데, 시골에서 막 상경한 사람 같이 왠지 모르게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어서 좋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아내를 닮은 것 같아서 오랫동안 감상했다.
산 마르코 광장
산마르코 광장의 야외카페 재즈밴드와 크루즈선
베네치아 골목길을 걷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처음 보는음료를 한잔씩 테이블에 올려두고 여유롭게 앉아 있다.얼음을 가득 채우고 거기에 불그스름한 주황색 빛깔이 감도는 정체불명의 액체가 가득담겨있다. 도대체 이 정체불명의 음료의 이름은 무엇인지, 맛은 어떤지,산마르코 광장에 도착할 때까지호기심은 커져갔다.
산마르코 광장에 도착하니 야외카페의 밴드 선율이 야외 카페에 앉으라고 유혹한다. 한참을 서성이며 버티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서버에게저기 보이는 것과 같은 음료를 달라고 했다.주머니 사정에 비해서이례적인 결정이었다. 그만큼 산마르코 광장의 분위기가 좋았다. 그루브 있는 재즈음악, 이국적인 건물과 동상이 늘어선 거대한 광장, 바다 위로 미끄러지는 거대한 크루즈선 그리고 정체모를 음료까지. 그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상큼하면서도 씁쓸한 맛은 하루 종일 걷느라 쌓였던 피로를 깨끗하게 날려주는 것 같았다. 아내도 같이 주문한 젤라토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 음료의 정체는 '스프리츠'였다. 베네치아 지역의 식전 주로 유명한 칵테일인데, 이탈리아 탄산 와인 '프로세코'와 오렌지와 허브로 만든 술 '캄파롤'을 섞어서 만든다. 약간의 각성효과도 있다고 하는데, 어쩐지 피로가 가시는 것은 기분탓이 아니었다.
남은 유로화 동전을 탈탈 털어서 산마르코 광장 야외 카페밴드의 CD를 구입했다. 국외 반출이 불가능한 동전도 처리하고 이 순간을 기념할 겸 거금 30유로 아니 28유로를 주고 말이다. CD를 꼭 사고 싶었는데 동전까지 다해도 조금 모자랐다. 깎아줄 수 있냐고 테이블 담당 서버에게 살짝물어봤다. 말을 잘 전달해줬는지 밴드 뮤지션이 손까지 흔들며 흔쾌히 그 가격에 판매해줬다. 나중에 CD를 열어보니 프린터로 출력된 조악한 커버에 음악도 현장에서 들은 것과 달랐다. 그래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요즘도 가끔 꺼내서 틀어본다. 낯익은 선율이 흐르면 광장에 앉아마셨던 붉은 빛깔의 '스프리츠'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