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남들과 달리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전역 후 나이는 이십 대 후반, 또래 취업 준비생들보다는 많은 편이었다. 대기업에 입사하고 싶었다. 그것만이 내가 사회에서 성공하는 지름길이며 우월한 계급으로 올라서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장교로서 복무했던 경험은 나에게 리더십과 근성을 주었지만 동시에 엘리트 계층에 편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그때는 사고의 폭이 좁았고 무지했다. 회사원은 엘리트 계층이 아닐 뿐더러 사회에서 계급을 찾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었다. 몸은 전역했지만 마음은 전역하지 못한 애송이였다. 그저 대기업이 최고인 줄 알았다.
알량한 장교 출신이라는 꼬리표 덕에 첫 번째 대기업에 취직을 했지만 얼마 다니지 않고 그만두었다. 두 번째 대기업은 해외 근무지였다. 그 역시 얼마 다니지 못했다.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회사 문화, 급여, 조건 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만뒀다.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국내에 돌아왔을 때, 서울에 잠시 있을 곳이 필요했다. 마침 고향친구중에 명문사학 ‘중앙대학교’에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고향친구 중에 가장 ‘난 놈’이었다. 어렵게 친구에게 사정을 말하니, 흔쾌히 자취방에 같이 있어도 된다고 했다. 아직도 고맙고 감사하다.
그렇게 지금의 직장에 취직할 때까지 중앙대학교 앞 주택가에 있는 친구 자취방에서 몇 개월 동안 살았다. 가끔은 학식(학생식당 밥)도 먹고, 친구 학생증을 빌려 중앙대학교 도서관에 몰래 들어가 공부도 했다. 짧았지만 강렬했던 기간 동안 ‘중앙대학교병원’은 흑석동 한가운데 등대처럼 솟아 있었다. 이상하게 ‘중앙대학교’보다 그 병원이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중앙대생이 아닌 이방인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쉽게 들락날락할 수 있었던 학교와 달리 병원은 가본 적이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대략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우연히 건강검진차 중앙대학교병원에 가게 됐다. 아내회사의 복지혜택 덕분이다. 흑석역 3번 출구에서 걸어 내려오니 순대국밥집도, 다닥다닥 붙어있는 캠퍼스 앞 주택들도 여전하다. 친구는 많이 바뀌었다고 하던데, 내가 보기엔 하나도 안 바뀐 거 같다. 아마도 그 친구는 나보다 훨씬 흑석동에 오래 살았으니 이곳의 미묘한 변화도 다 감지했으리라.
사람일은 ‘모를 일’이 많다. 시간이 쌓일수록 새로운 경험이 줄어들고 시들해진다. 그런데 살다 보면 예전 기억을 우연히 마주 보게 되는 날이 있다. 과거의 나는 직장을 찾기 위해 방황했다. 그리고 지금도 회사 안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쯤 되면 미래의 나도 여전히 방황하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때가 되면 다시 한번 와봐야겠다. 방황했던 과거의 나를 마주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