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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완열 Feb 13. 2023

공기업 10년차 페르소나

어떡하지?

얼마 전 신입사원 직무교육을 했다.

22년 사번이라니! 비현실적인 숫자다. 새까맣고 불편해 보이는 정장을 착용한 아이들은 총기 넘치는 눈빛을 발사하며, 호기심 어린 질문들을 쏟아냈다. 내가 벌써 신입직원 강사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더불어 이곳에 합격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땐 정말 좋았는데... 세상을 다 가진 것만큼이나.


잠시 그들이 부럽다가 이내 안타까웠다. 꽉 막힌 이 조직은 총기 넘치던 인재를 둔재로 바꾸리라. 그들은 이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머지않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조직은 그들을 천천히 그리고 또 은밀하게 정신을 타락시킬 것이다. 안타깝다.


나와 무려 십 년이나 차이나는 신입직원들을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그래, 재밌는 사례 얘기를 해야겠다'. 힙한 간부로 보이고 싶었다. 사무실에 기름을 뿌리고 불 지르겠다고 한 민원인 얘기를 해줬다.


나는 중간에 낀 관리자다. 간부직급이라고 하기엔 어리고, 직원이라고 하기엔 선임이 돼버린 나이. 삼십 대 중반. 그런 나이다. 본사에만 있었기에 늘 현장이 궁금했다. 일선에서는 어떤 일들을 하는지 겪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업무강도가 현장이 더 편하다고 해서 좀 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막상 지역본부에 부임해서 6개월을 지내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본질적으로 사내정치는 기본이다. 넘버원에게 어필하기 위한 보고서 생산을 한다. 대단한 기획이나 분석이 필요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다. 읽기조차 힘겨운 줄임말로 도배가 된 한 장짜리 한글보고서를 생산한다. 내가 작성해 놓으면 선배라는 작자들이 서로 들고 가서 윗사람들에게 보고 하겠다고 하는 꼴들이 가관이다. 이런 보고서를 생산하는 것도 자괴감 드는데 뺏기기까지 하면 현타가 온다. (그럼 본인들이 작성하던가.)


단신부임한 넘버투의 저녁식사도 때때로 챙겨야 한다. 법인카드 사용을 못하는 상황이 되면, 사비를 털어서라도 모셔야 한단다. 직원들을 기사로 부리기도 한다. 그들에게도 일정이 있는데,  그런 것 따윈 안중에도 없다. 인사권자에게 선물을 상납하는 것도 암암리에 있다. 빳빳한 종이가방을 한 아름 들고 바쁘게 쫓아다니는 팀장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지역본부에서 승진하기 위해서는 영혼을 팔아야 한단다. 그 모든 것들을 해서 윗사람들에게 잘 보여한단다.


나에겐 3가지 길이 있다. 지금 이 길을 가던가. 본사로 돌아가서 노예생활을 하던가. 아니면, 회사 승진을 포기하고 재테크에 올인하던가.


첫 번째 길은 아니다.로 결론을 냈다.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경험해 보니 도저히 그럴 자신도 비위도 없다. 두 번째 길도 이미 포기하고 나왔던 길이 아니던가. 본사는 정신적 물리적 노동강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족과 떨어져 있는 것은 지난 6년으로 충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돌아보게 되는 것은 아직도 이 추레한 조직에 높은 간부가 되는 것에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세 번째 길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10년 동안 잘 버텼으니, 10년만 아무 생각 없이 더 버티자. 그동안 경제적 자유를 이뤄서 , 시간부자로 노동에서 해방되자. 20년 근속을 채우고 명예퇴직을 하자.그런데 세 번째 길도 문제가 있다. 남은 10년을 그런 마음가짐으로 회사를 다닌다면 그 안에서 나는 얼마나 초라해질 것인가.


청운의 꿈을 품고 입사해서 5-6년 차까지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열심히도 했다. 이것저것 열심히 배우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일이 재밌었다. 상사와 동료들이 좋았다. 즐거웠다. 시험공부도 숨 막히게 매달려서 남들보다 빨리 승진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 재미가 없다. 회사일이 다 비슷비슷하다. 업무도 재미없고 사람들도 재미없고 이상한 승진문화도 싫다. 열정도 소진된 지 오래다. 짧게 휴직도 내봤지만 소진된 열정은 충전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다. 자식이 둘이나 생겼고, 재산이라고는 은행빚이 잔뜩 낀 아파트 한 채와 감가상각이 완료된 중형차 한 대가 달랑이다. 마이너스 통장에서 빼서 투자한 주식은 연일 하락이다. 늘 마음이 불안하고 미래가 두려우며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다. 아이들을 볼 때면 잠시 행복했다가 동시에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출근해서 사무실에 들어오면 무의미한 보고서 생산을 반복하고 있다. 무의미한 상사 의전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어제는 넘버원이 무슨 점심을 먹었다더라 오늘은 심기가 어떻다더라. 갈비를 좋아하시니깐 오늘저녁은 거기로 한번 모시자 등 등. 그들에겐 지상최대과제겠지만 나는 전혀 아니올시다.  점점 사무실에 있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매일 출근 할 때마다. 바보 가면을 쓴다. 나의 이런 고통과 불만이 밖으로 삐져나오지 않게, 그들과 다른걸 숨길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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