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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유 Aug 12. 2022

퇴사가 부럽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묻지마 퇴사자의 고백

출근 시간, 습관처럼 아날로그 벽시계를 봤는데 시침과 분침이 엉뚱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초침이 움직이는 걸 보아하니 밤새 시계가 느려진 모양이었다. 다른 날 같으면 아침부터 일진이 안 좋은 거 아니냐며 괜히 찝찝했을 텐데 이날은 되려 신기했다. 그날이 바로 퇴사날 아침이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벽시계가 느려진 날, 나의 회사 생활도 쉬어가게 되었다.


퇴사 날 멈춰버린 벽시계, 그리고 나의 시간



3년 넘게 다닌 회사였다. 퇴사 면담에서 임원은 '이삼 년 다니면 퇴사하는 게 중소기업의 현실'이라 이제는 본인도 퇴사자들에 '내성'이 생겼다고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나를 제외하고도 몇몇 직원들의 퇴사물결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이었다. 재미도 없고 기분도 나쁜 농담이었지만 '내성... 그러시군요... 하하하'라며 웃으며 화답했다. 오히려 감사하기까지 했다. 인생 첫 퇴사는 아니었지만 가장 긴 시간을 다닌 회사였기에 괜스레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려는 찰나였다. 그 마음을 짜게 식어버리게 해줘서 감사했다. 이까짓 회사를 3년이나 다녔다니, 나의 퇴사 결심에 다시 한번 확신이 드는 순간이었다.


이렇게나 글러먹은 회사를 드디어 퇴사하겠다고 하니 친구들은 대체로 응원해줬다. 특히 '부럽다, 용감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런 과한 칭찬(?)이 들려오는 이유가 뭘까. 아무래도 내가 이직처를 구하지도 않고 퇴사를 저질렀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게다가 혼자 한 달간 해외여행을 간다고 하니, 멋지다는 반응까지 나온다.


퇴사 후 여행을 꿈꾸며, 회사 책상 앞에 붙여놓은 사진들.


친구들의 응원해주는 마음 씀씀이가 고맙기도 하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정말 부러울 만한지, 용감한지, 멋진 일을 한 것인지. 사실 내가 부러운 건 너희들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일 따위 미련없이 떠나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련을 가질만한 일이나 사람이 없어서 떠나는 거라고. 너희가 쉽게 떠나지 못하는 건 그만큼 그곳이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나도 그런 걸 만들고 싶다고.


이때껏 9년 간의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처럼 대책없이 퇴사를 한 것은 나 역시 처음이다. 그동안 내게 퇴사는 곧 이직이었다. 바로 이직을 하지 않더라도 쉬는 동안 늘 최대한 빠르게 취업을 하려고 노력했다. 가장 오래 쉰 기간이 2달밖에 안 되면서도 나는 늘 쫓겼다. 경제적인 이유 반, 커리어 욕심이 반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돌아보니 그때 왜 좀 더 이기적으로 굴지 못했나 후회가 됐다. 진짜 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찾는 데에는 소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야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생겨서 내게도 이기적일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것뿐이다. 쉬는 기간 동안 내가 얼마나 성장하고,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마저도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한쪽 문이 닫히면 한쪽 문은 열릴 것이기 때문에.


며칠 후 고장난 벽시계는 완전히 멈췄다. 나는 바로 건전지를 갈아끼우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조금 더 뒀다. 이제 괜찮다고. 조금 쉬어가도 괜찮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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