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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유 Aug 21. 2022

유튜브 디톡스 1주일 후기

자제력의 기쁨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는 어느날 갑자기 '어제와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삶'을 살게 된 남자의 이야기다. 몇 년 전 이 영화를 볼 때만 해도 '내가 영화와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어떨까? 나도 주인공처럼 허무함을 느끼고 어떻게든 반복되는 삶에서 벗어나려고 아등바등하겠지...'라며 주인공을 측은하게 여겼었다. 그런데 몇 년 뒤, 내 모습은 영락없는 <사랑의 블랙홀> 속 주인공이었다.


지난 몇 년간 나의 하루를 살펴보면 대략 이렇다.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카톡을 확인하고 유튜브를 켠다. 평일에는 유튜브를 켠 채로 화장실에 간다. 씻을 때도 계속 영상을 틀어놓는다. 머리를 말리거나 화장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지하철 시간에 맞춰 뛰어 나가기 직전에도 열심히 채널 선정을 한다. 그러다가 지하철 시간을 놓친 적도 꽤 있다. 출퇴근 시간도 유튜브와 함께 한다. 며칠 전 정말 놀라웠던 건 내가 횡단보도를 지나면서도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 그리고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침 시간을 뒤로감기처럼 반복한다.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다가, 불면증을 치유해준다는 ASMR이나 자는 동안 영어가 무의식에 침투해주기를 기대하며 영어 채널을 틀어놓고 잠에 든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유튜브의 노예가 되어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이러니 내가 <사랑의 블랙홀> 속 주인공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어제와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영화 <사랑의 블랙홀>


회사를 다닐 땐 근무 시간만큼은 유튜브 휴식 시간이었다. 퇴사를 하고 나니 그마저도 사라진 것이다. 이제 원한다면 하루 종일 유튜브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금쪽같은 백수 기간을 유튜브가 집어삼키도록 놔둘 수 없었다. 퇴사하고 뭐했냐는 질문에 머뭇거리며 "누워서 유튜브만 뺀질나게 봤어요"하고 멋쩍게, 멋없게 대답할 순 없지 않은가.



나는 1주일간 유튜브와의 절연을 선언했다.


우선 유튜브 디톡스를 시작하기 전, 직전 1주일의 기록을 확인해봤다.



하루 평균 핸드폰 사용 시간은 8시간이고, 이중에서 유튜브가 총 19시간 10분으로 한주 동안 가장 많이 사용한 앱이었다. 2위는 카톡, 3위는 크롬. (유튜브 앱 대신 크롬 브라우저로 유튜브에 접속해서 본 기간이 디졸브되어 있다.)


*카톡 사용 시간이 8시간 57분인 것도 충격적인데, 혹시 백그라운드 상태도 포함되는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숫자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평소 유튜브의 노예라는 것을 인정을 해왔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다. 하루 평균 16시간은 깨어있다고 가정하면 약 1/4에 해당하는 시간동안 유튜브를 보는 셈이었다. (유튜브와 크롬 사용 시간을 합쳤다.) 나의 베스트프렌드, 유튜브와 절연을 고해야 한다는 것을 운명적으로 느꼈다.


유튜브와의 절연, 이것을 나는 유튜브 디톡스로 명명하기로 했다. 이미 몇 년전부터 디지털 기기와 인연을 끊는 디지털 디톡스가 유행이었다. 하지만 현재 내 상황으로 극단적인 디지털 디톡스는 어려웠다. 출국 전 약속도 밀려있을 뿐 아니라 여행 준비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튜브 디톡스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유튜브 앱은 켜지 않고, 웹으로 접속해서 보는 것도 금지하는 것이다. 나도 궁금했다. 1주일간 유튜브를 보지 않으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 아니, 보지 않고 지낼 수 있을까?






1일차

일요일 아침 7시 49분 눈이 떠졌다. 눈 뜨자마자 유튜브를 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농약 같은 유튜브. 하지만 첫날 아침부터 나와의 약속을 깨는 건 너무한 것 아닌가? 자연스럽게 눈이 다시 감겼다. 뭘 하지? 책을 읽어야 하나? 책을... 나는 다시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리고 1시간 후 일어나서 유튜브를 안 켜고 하루를 시작하는 데 성공했다!


저녁에는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외출했다. 30분 가량 지하철을 타야 했다. 뉴스 기사를 검색해서 보다가 왓챠에서 영화를 틀었다. 그동안 보고 싶었지만 줄곧 미뤄온 <레터스 투 줄리엣>이었다. 유튜브 디톡스 하루만에 몇 년간 미뤘던 영화를 보게 됐다.


약속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는 따릉이를 빌렸다. 예전에는 따릉이를 탈 때도 보통 유튜브 영상을 켜서 팟캐스트처럼 듣고는 했는데, 이제 대체재가 필요했다. 최근 읽은 김민철 작가의 <모든 요일의 기록>에서 작가의 최애곡이라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떠올랐다. 평소 가요를 주로 듣는 편이라, 클래식을 들으니 장점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클래식은 가요에 비해 길고 반복되는 구간을 찾기 어려워서 쉽게 질리지 않았다. 유튜브를 안 보니 클래식을 듣게 됐다. 클래식을 BGM 삼아 따릉이를 타고 동네를 정처없이 돌면서 에세이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집에 와서 구상한 아이디어를 끄적였다. 유튜브를 틀지 않고 조용히 잠에 들었다.


2일차

눈을 떴는데 유튜브를 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디톡스 하루 만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다니...? 이거생각보다 너무 순조로운데...?'


오전에는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오후에는 친구들과의 호캉스 계획으로 집을 나섰다. 가는 길에는 버스에서 김미라 작가의 <오늘의 오프닝>을 읽었다. 오후부터 밤까지 내내 친구들과 있어서 2일차는 생각보다 쉽게 지나갔다.


3일차

오전에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연남동에서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헤어졌다. 3일만에 위기가 찾아왔다. 유튜브 영상을 확인해야 하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내가 원해서 보는 게 아니기 때문에 괜찮아, 라고 합리화를 하며 3일만에 드디어 유튜브 앱에 접속했다. 짧은 영상을 하나 확인하고 그리고는 끄려는 찰나, 썸네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개발자가 될 것도 아니면서 왜 이런 영상이 눈에 들어오는 거지?


예전에 코딩 공부할 때 구독했던 채널의 영상이었다. '5분 34초면 괜찮네...' 하면서 영상을 클릭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썸네일의 유혹에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영상을 찾지 않고 거기서 바로 멈추는 자제력을 발휘했기 떄문이다!


[유튜브 디톡스 3일차, 자제력을 +1 획득하셨습니다.]


4일차

망했다. 도둑질도 한번 하는 게 어렵지, 두번 하는 건 쉽다는 말처럼 3일차에 유튜브를 켜버린 순간 나는 망해버린 것이다. 고삐가 풀려 뉴스를 확인하거나 평소에 즐겨보던 영어공부 유튜버 영상, 쓰잘데기 없는 아이돌 퍼포먼스 영상(...) 같은 것들을 보고야 말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한번 재생을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영상 파도타기를 했던 나를 자제할 수 있게 됐다. 거의 한 두개의 영상만 확인하고 끄는 식이다. 아침에 눈 뜨면 1시간을 유튜브로 보내던 내가 달라졌다. 와, 이게 유튜브 디톡스의 힘인가...?


낮에는 도서관에 갔다. 몇 년간 읽기를 미뤘던 책을 빌렸다. 김하나, 황선우 작가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였다. 읽다보니 훅 빠져 들어서 김하나 작가의 다른 책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 같은 서가에 꽂힌 김훈 작가의 <밥벌이의 지겨움>까지 대출해왔다.


벌써 절반 왔다! 이제 3일만 지나면 나는 해낸다.


5일차

'일주일이 생각보다 긴데...?' 유튜브 디톡스를 시작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5일차라니. 어제의 여파로 오늘도 유튜브를 잠깐씩 켜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총 사용시간 36분으로 마무리했다. 스스로 자제력을 느낀다는 것, 그 자체로 기분이 좋다.


6~7일차

이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유튜브를 켜는 습관은 확실히 사라졌다. 6일차에는 총 사용 시간 1시간 8분, 7일차에는 44분으로 마무리했다. 변명을 하자면, 마지막 날에는 새로 산 카메라 사용법을 익히느라 영상 시청이 필요했다.


드디어 일주일 간의 유튜브 디톡스 종료!






과연 디톡스 기간 동안 나의 핸드폰 사용시간 통계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루 평균 핸드폰 사용시간 약 1시간 감소, 일일 유튜브 사용시간은 약 4시간에서 44분으로 감소했다. 한주 동안 가장 많이 사용한 앱은 카카오톡, 네이버 블로그, 브런치 순으로 바뀌었다. 핸드폰 사용 시간은 미약하게 감소했지만, 유튜브 사용 시간은 약 80% 감소한 것이다. 비록 애초에 계획했던 유튜브 끊고 살기는 실패했지만 첫 시도 치고는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한다. 유튜브 디톡스가 내 안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튜브 디톡스를 하면서 느낀 긍정적인 변화는 다음과 같다.


1. 머리 속이 한결 정돈되고 차분해졌다.

2. 그동안 미룬 것들을 하게 됐다. (책, 영화, 음악)

3. 사색을 더 많이 하고, 글을 더 많이 쓰게 됐다.

4. 자제력이 상승해서 내가 필요할 때만 유튜브를 볼 수 있게 됐다.




이번 챌린지를 하면서 꺠달은 점은 사람의 삶 자체가 결국 <사랑의 블랙홀> 같다는 것이다. 유튜브의 노예로 사는 삶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해가 뜨면 눈을 떠야 하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해가 지면 자야 한다. 반복되는 삶에 싫증을 느끼고 인생을 막장으로 살던 주인공이 결국에는 하루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우리도 하루 안에서 뭔가를 발견할 수 있다. 내가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유튜브 디톡스'라는 사소한 도전을 한 것처럼, 내 의지를 조금이라도 발휘할 수 있는 구석을 찾아보는 거다. 앞으로도 나는 인생의 블랙홀을 벗어나기 위해 나만의 사소한 도전을 계속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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