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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New Cinema DAY

고백의 역사 | 정상성에 도전하는 짝사랑 로맨스

넷플릭스 <고백의 역사> 리뷰

by KinoDAY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98년, 학교 최고의 인기남 '김현'(차우민)을짝사랑하는 고3 소녀 '박세리'(신은수)는 철두철미한 고백 계획을 세운다. 첫째, 평생의 콤플렉스인 악성 곱슬머리를 펼 것. 둘째, 수백 개의 학알을 접을 것. 셋째, 고백을 하면 무조건 커플이 되기로 유명한, 전교 100등 안에 들어야만 쓸 수 있는 학교 자습실 자리를 구할 것. 하지만 세리의 계획은 1단계부터 삐걱거린다. 어떤 방법을 써도 좀처럼 곱슬머리가 안 펴지기 때문.


어느 날, 학교에 전학생 '한윤석'(공명)이 나타난다. 나이도 1살 많고, 수능도 응시하지 않는 이상한 고3이지만 세리는 개의치 않는다. 윤석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미용실에서는 악성 곱슬도 펼 수 있는 '서울 매직 펌' 시술이 가능하기 때문. 세리는 윤석이와 친해진 뒤 친분을 이용해 1단계 계획을 이루고자 한다. 하지만 윤석이와 일상을 공유하면서 세리는 새로운 고민에 빠진다. 이제 김현보다 윤석이가 더 좋아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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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슬머리 효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고백의 역사>는 무난한 대만 청춘 로맨스물 같다. 짝사랑에 빠진 소녀의 고백을 전학생 소년이 도와주다가 정작 둘이 서로 사랑에 빠진다는 클리셰에 충실하다. 삐삐를 비롯해 90년대 후반의 일상을 다룬 묘사는 향수를 더한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와 같은 영화를 다시 보는 것 같은 인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딱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 바로 곱슬머리다. 너무나도 강한 아버지의 유전자 때문에 세리는 일반 펌으로 못 펴는 곱슬머리를 가졌다. 곱슬머리는 세리의 짝사랑을 방해한다. 짝사랑 상대인 김현의 이상형은 흑백의 긴 생머리 여성이기 때문. 그래서 세리는 곱슬머리를 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다리 다친 전학생 한윤석도 적극적으로 돕는다. 그의 환심을 사서 서울 매직 펌을 할인받을 요량으로.


그런데 어느 지점부터 곱슬머리는 세리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는다. 세리가 자기 마음이 김현이 아닌 윤석이를 향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윤석이도 자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부터다. 이때부터 세리는 굳이 곱슬머리를 피고 다니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 변화는 윤석이의 취향과는 무관하다. 그보다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윤석이에게 세리의 곱슬머리는 정상성이라는 감옥으로부터의 탈출구를 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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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

소나기를 피해 세리 아버지의 작업실 겸 창고에 들린 윤석과 세리. 세리는 창고에 모아둔 만화책을 윤석에게 소개하고, 언제든 자유롭게 와서도 읽어도 좋다고 허락한다. 며칠 후, 밤에 불 켜진 작업실을 찾 세리는 의아한 광경을 목격한다. 세리의 아버지 '홍일'(류승수)과 윤석이 같이 있고, 윤석이가 라면 끓일 물을 받아오는 광경을.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세리와 홍일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공부를 잘하는 이란성쌍둥이, '혜리'(이다은)를 언급하면서 투정을 부리는 세리에게 홍일은 애초에 성적을 기대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세리가 째려보자, 그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기대를 안 하는 게 아니라, 성적만 기대하지 않는다고. 공부가 아닌 다른 잘하는 길을 찾아낼 거라고 믿는다고. 윤석이는 옆에서 조용히 세리 부녀의 대화를 지켜본다.


이때 윤석이의 눈빛은 신기함 반, 부러움 반으로 가득하다. 자기 아버지와는 한 번도 비슷한 대화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의대 교수인 윤석이의 아버지는 아들이 모의고사에서 서울대에 갈 성적을 기록해도 학대에 가깝게 훈육했다. 아들이 수능 응시를 거부할 정도로 공황에 빠지고,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도망치듯이 이사해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니 윤석이가 보기에 세리 부녀의 모습은 이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이 장면을 분기점으로 윤석이는 세리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 그전까지 윤석이는 세리를 귀찮은 같은 반 친구 정도로 대한다. 다리 깁스를 한 그를 세리가 도와줘도 대단히 고마워하거나 반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는 세리에게 품은 호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체육 시간 짝 피구 경기에서는 상대 팀으로 마주한 김현과 신경전을 벌이고, 김현을 향한 세리의 고백 계획에서도 미묘하게 발을 빼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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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슬머리의 함의

윤석이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세리의 곱슬머리에 담긴 함의로부터 엿볼 수 있다. 사실 대한민국의 중고등학교에서 곱슬머리는 그 자체로 일탈의 상징이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염색과 펌이 금지인 두발 규정을 둔 학교가 수두룩했으니까. 이런 환경에서 곱슬머리는 이른바 '정상적'인 학교 시스템에 순응하는 대신 개성과 다양성을 표출하는 기표나 다름없었다.


반대로 말해 곱슬머리를 피는 것은 학교라는 질서에 순응한다는 의미였다. 세리와 달리 생머리를 지닌 쌍둥이 자매 혜리를 다른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는 모범생으로 괜히 설정한 게 아닌 것. 김현을 향한 세리의 짝사랑도 마찬가지다. 김현은 전교 100등 언저리 성적을 내고, 운동도 잘하고, 키도 크고, 말썽도 안 부리고, 교우관계도 원만한 모범생 그 자체다. 일반적인 인문계 고등학교라는 질서에 완벽히 들어맞는 인물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세리의 고백 계획은 단순한 사랑 고백이 아니다. 이 계획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곱슬머리를 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습실에서 고백하는 것. 이는 다른 학생들처럼 평범해지고, 대부분의 고3이 그렇듯이 성적을 올릴 것을 전제로 한다. 결국 세리의 고백 계획은 이른바 '정상적'인 학교 질서에 편입하기 위한 노력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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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사랑이 특별한 이유

윤석이는 정반대다. 그는 한때 정상적인 질서의 정점에 올랐다. 전학 오자마자 대충 본 모의고사에서 바로 전교 1등을 차지할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고, 아버지가 의대 교수인 만큼 집안 배경도 좋았다. 하지만 그는 이 시스템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줄 세우기를 통해 1등 만을 걸러내고, 그 과정에서 밀려나거나 지친 학생은 실패자나 낙오자로 낙인찍는 폐해를 온몸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그런 윤석이에게 세리와 세리 아버지의 관계는 신세계다. 세리 부녀의 대화 내용은 온 가족이 수능을 앞두고 신경이 곤두서는 고3 가정의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즉, 그들의 존재는 아버지가 강제적으로 주입한, 공부를 통해 성공하는 세계 외에 다른 우주도 존재한다는 방증이다. 윤석이에게 세리, 세리의 가족, 세리 아버지의 아지트는 어찌 보면 힐링의 대상이자, 장소이자,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윤석이가 세리와 사랑에 빠지는 궁극적인 이유라 할 수 있다. 결여된 것을 채워주고, 자기가 겪은 고통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람이니까.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몰랐다"(I didn't know what I wanted until I met you)라는 깜지 내용대로다. 삶의 의지를 잃은 나머지 바다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윤석이를 세리가 구해내는 그들의 첫 만남에 이미 암시된 바이기도 하다.


결국 세리의 곱슬머리는 대한민국의 학교, 곧 사회적으로 규정한 정상성만을 요구하는 시스템을 거부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한 데 집합한 오브제나 다름없다. 억지로 곱슬머리를 펴지 않은 채 자기 장점인 수영과 스포츠를 진로로 택한 세리. 아버지의 강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은 윤석이. 그들이 재회하는 결말이 의미심장한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라는 환상 속에서라도 그 저항과 도전을 현실화시키려는 의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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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과 소녀 사이에서

흥미롭게도 <고백의 역사>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메시지를 보여주는 캐릭터와 화자를 분리한 뒤, 화자의 관점에서만 이야기를 전개한다. 실제로 영화는 김현에게 어떻게 고백할지, 윤석이에게 어떻게 마음을 전할지 걱정하는 세리의 고민으로 가득하다. 그 덕분에 청춘 로맨스물로서의 쾌감은 강화된다. 짝사랑의 풋풋함과 발랄함, 학창 시절의 엉뚱함과 에너지가 주목받기 때문이다.


반면에 윤석이의 서사에 담긴 주제는 넌지시,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선에서 그친다. 그와 세리를 대비하는 구조도, 곱슬머리에 담긴 의미도 날이 서 있지는 않다. 화자가 세리인 이상 윤석이의 사연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고백의 역사>의 메시지는 무뎌지고, 개성도 부족해진다. 분명 재밌지만, 여러 넷플릭스 영화처럼 무난하고 심심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그렇지만 <고백의 역사>는 무난해서 아이러니하게도 인상적이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처럼 결말에 이르러서 현실적인 분위기로 급선회하는 근래 한국 청춘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의 선례를 안 따르기 때문. 이처럼 장르적 본분에 충실한 덕분에 기저에 깔린 주제 의식이 만족감을 뚫고 나올 기회를 잡기도 한다. 작품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완벽히 균형을 잡지는 못했어도, 남궁선 감독의 첫 장편 상업영화에 박수가 아깝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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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eptable 그럭저럭

다소 무디지만, 본분에 충실한 청춘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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