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연한 출발 Oct 01. 2022

욕망의 바다에 부유하는 인간의 초상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리뷰 및 평론

 우리는 사랑할 때 최악이 되는 경험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했던 사람에게 최악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건 끔찍하다. 욕망은 한 인간에게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내고 사랑에 빠진 우리는 "내가 이런 사람인지 몰랐어", "내가 사랑 때문에 이런 행동까지 하다니 놀라워"하며 바뀐 자신을 놀라게 한다. 사랑하는 상대를 얻고자, 지키고자 혹은 잃지 않기 위한 욕망은 우리를 논리에 맞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망가짐을 사랑한다. 

 주인공의 사랑은 진실이어야 한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주인공의 행동은 멋지고 놀랍고 위트 있고 영웅적이어야 한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간극이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든다. 결말엔 사랑이란 이런 것이라는 깨우침까지 있다면 완벽하다. 완벽할 것 같은 주인공이 사랑 때문에 망가지고, 빈틈을 보이고, 약해지지만 그래서 사랑을 얻는 그런 영화를 바란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사랑 때문에 최악의 인간이 되는가, 최악의 인간이 사랑에 빠진 것인가. 율리에(레나테 레인스베)는 입학이 어려운 의대에 들어가 최고 학점을 유지하고 있었다. 인생의 목표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녀는 열정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심리학으로 전과한다. 심리학 교수와 잠자리를 가진 율리에는 자신이 시각적인 것에 민감하고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점에서 일을 하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만난 남자 모델과 잠자리를 갖는다. 남자 친구와 간 파티에서 악셀(앤더스 다니앨슨 리)을 만나고 그와 잠자리를 갖는다. 악셀과의 만남은 지금까지의 남자들과 달랐다. 그녀는 사랑에 빠졌다. 악셀은 그녀와 깊은 만남을 시작하기 전 그녀에게 경고한다.

"우리는 나이 차이 때문에 오래 만나지 못할 거야. 너는 인생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나이지만 나는 그럴 시기는 지났어. 그것 때문에 헤어질 거야" 

 하지만 그의 이런 말에 율리에는 사랑에 빠진다. 결국 율리에가 악셀을 떠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도 악셀이 예고했던 위와 같은 이유임은 역설적이다.

 

 율리에와 악셀은 인생의 다른 단계에 있었다. 율리에가 악셀을 떠나려고 결심하는 순간은 악셀의 사회적 성공 때문이다. 악셀이 만든 애니메이션 밥캣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고 악셀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있을 때 율리에는 혼자였고 그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을 맞는다. 그 결과 율리에는 초대받지 않은 파티에 들어가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를 만나 바람을 피우지 않는 선을 지키며 일탈한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율리에는 에이빈드를 잊지 못하고 결국 악셀에게 이별을 고한다. 

율리에: "네가 노력해서 바뀔 문제는 아니야. 인생의 다른 단계에서 서로 만났고, 서로 원하는 게 다를 뿐이야…" 

악셀: "네가 지금 뭘 망치고 있는지 알아?"
율리에: "알아. 오랫동안 고민했어. 이게 맞는 것 같아" 

율리에: "난 당신을 사랑해. 근데 사랑하지 않아. 내 인생인데 주연 역할을 하지 않는 것 같아" 

율리에: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인지 말하고 있는데 자긴 이걸 정의하려고 하고 있잖아. 느끼는 걸 전부 설명해야 해. 느끼는 상태로 놔두고 싶은데."

 에이빈드에게 간 율리에는 그와도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너와 함께 있으면 진짜 나 자신이 될 수 있어. 날 참아줘서 고마워"

 하지만 그녀의 인생에 다시 악셀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악셀이 췌장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율리에를 흔들고 에이빈드에게 막말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너는 평생 커피나 팔고 싶겠지만 나는 더 많은 걸 바란다고!" 그리고 그녀는 에이빈드의 아이를 갖게 되고 악셀을 찾아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린다. 


 영화는 프롤로그, 12개의 장,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형식은 율리에의 삶에 중요한 순간들을 꼬집어 관객들에게 소개한다. 마치 책이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설정으로 관객들이 해당 씬의 내용을 미리 짐작하게 한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영화 외부의 화자를 여성 내레이션으로 사용하면서 영화 초반 인물의 전사를 간결하게 요약한다. 이해의 도움을 주는 한편 인물들이 하는 대사와 내레이션을 일치시키면서 독특한 연출 효과를 사용한다. 이는 감독/ 작가의 시선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영화는 사랑의 양가적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부엌에서 스위치를 켜면 온 세상이 멈추고 율리에가 에이빈드에게 달려가는 장면, 율리에가 마약을 한 뒤 자신의 자아도취적인 내면으로 빨려 들어가는 장면이다. 첫 번째 장면은 에이빈드에게 마음이 옮겨가는 스토리와 로맨틱한 특수 효과가 역설적으로 사용되면서 더 큰 효과를 낸다. 악셀과 만나고 있지만 에이빈드에게 마음이 옮겨가는 장면을 세상이 멈추고 오직 두 사람이 세상의 주인공인 듯 연출하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아이러니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사랑에 빠지는 율리에는 자유롭고, 해방적이고, 충만한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지만, 이야기 바깥의 관객들은 악셀이 남겨진 상황에 율리에의 행동이 난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위치를 켜고 끄는 찰나의 순간 감독은 영화 속 시간을 길게 늘어뜨린다. 현실에선 1초보다 더 짧은 순간이지만 율리에의 내면은 그 짧은 순간에 에이빈드에게 달려가 키스하는 순간으로 연출된다. 이는 율리에가 악셀과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표현한 연출법과 대비되는데 율리에가 악셀과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내레이션으로 표현됐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마약을 한 뒤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그동안 만나왔던 남자들, 아버지, 악셀, 그가 그리는 밥캣이 영상화된다. 영화 속에서 나오는 대사들은 사회 이슈를 다루기도 하는데 페미니즘이나, 검열, 마약, 기후 문제, 소셜 미디어 등 다양하다. 



 관객은 율리에가 하는 선택들을 지켜보며 그녀 인생의 부분 부분을 따라간다. 영화 속 그녀의 삶은 우리 삶의 축소판이다. 지인들의 성공에 나 혼자 뒤처지는 것 같고, 내 인생이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은 한정되어 있고 그것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 선택을 한다. 변화를 원치 않고, 선택에 망설이고 재고 따지다 늦거나 놓친다. 그리고는 후회하지만 인생에 번복은 없다. 우리는 선택했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이미 떠나간 버스가 정답이었든 오답이었든 우린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는다. 

 하지만 율리에는 선택한다. 우리는 행동하는 그녀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그녀는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이 주는 기쁨과 좌절 우울과 행복을 온전히 느낀다. 비록 자신의 인생에 조연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녀는 그녀 인생에 주연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욕망의 시작과 끝에서 인간 내면에 일어나는 소용돌이를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인지 말하고 있는데 자긴 이걸 정의하려고 하고 있잖아. 느끼는 걸 전부 설명해야 해. 느끼는 상태로 놔두고 싶은데." - 율리에의 이 대사가 어쩌면 이 영화 전체를 설명해 주는 핵심 대사가 아닐까? 최악이라는 단어로 영화를 시작하지만, 그렇게 단정하고 볼 것은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술을 소비하는 이유다. 누군가에겐 율리에의 선택들이 공감으로, 누군가에겐 비난의 대상이 된다. 누군가는 악셀에게, 누군가는 에이빈드에게 이입한다. 하지만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개봉: 2022.08.25
장르: 멜로/ 로맨스/ 노르웨이/ 128분
감독: 요아킴 트리에
주연: 레나테 레인스베(율리에 역), 앤더스 다니엘슨 리(악셀 역), 할버트 노르드룸(에이빈드 역)
 율리에 역을 맡은 레나테 레인스베는 이 영화로 2021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복잡한 내면의 인물을 소화해야 했던 레나테 레인스베는 역할을 멋지게 해내며 연기력을 증명한다. 악셀 역을 맡은 앤더스 다니앨슨 리는 영화 <베르히만 아일랜드>에 이어 이번 영화의 주연을 맡으며 대세 배우임을 보여줬다. 
[창작노트]
타인(관객, 독자)의 시선에서 인물의 선택과 행동이 비합리적이고,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라도 그 인물은 그것이 진실이고, 현실이고, 정의여야 한다. 이는 스웨덴 영화 <노크 KNOCKING>와도 연결되는데 정신병을 앓고 있는 주인공이 영화 속에서 듣는 것으로 연출되는 노크 소리는 그 자신에게는 진실이어야만 한다. 그것이 사실은 아니더라도 그에겐 현실이어야 하며 내 귀에 들리는 감각이어야 한다(뇌의 장난 일지라도). 그것에 대한 의심을 갖는 건 스토리의 주인공이 가질 수 없는 태도이다. 율리에의 선택들이 그녀의 어떤 사고 구조, 어떤 가치관, 어떤 이상에 따라 결정되는지는 모르더라도 그녀는 선택을 내리는 당사자로서 그것이 잘못됐다고 판단해선 안된다. 작가로서 부딪히는 자의식에 맞서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스토리를 만든다는 것은 이런 점에 영향을 미친다. 감독이 도덕적으로 연인 사이에도 바람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완고하다면 그런 가치관을 지닌 주인공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할 것이다. 이는 편협하고 인간에 대한 탐구를 방해한다. 


작가의 이전글 적응할 가치가 있는 세상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