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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연한 출발 Nov 22. 2022

역사적 사건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다큐멘터리 <수프와 이데올로기>2022 리뷰

 일본의 어느 한 가정집. 딸을 위해 수프를 끓이고 있는 한 노모. 그 수프는 다름 아닌 삼계탕이다. 알이 굵고 단단한 아오모리 마늘을 생닭의 몸통에 한 주먹 이상 넣고 대추와 다양한 건강 식재료를 넣고 4시간 동안 보글보글 삶는다. 뚜껑을 완전히 닫으면 국물이 넘칠 수 있으니 젓가락을 냄비 위에 올려두고 그 위에 뚜껑을 덮는 것은 삶의 지혜이자 과학이다. 그렇게 완성된 수프를 노모와 딸은 맛있게 먹는다.

 노모의 집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아들들은 모두 북에 보냈고 외동딸(양영희 본인)과 일본에서 살고 있다. 남편은 돌아가셨다. 북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일본에서 일을 하고 돈을 부쳐준지 수 십 년, 이젠 노모의 건강과 재정을 걱정해야 한다고 딸은 말하지만 자식을 위한 부모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 

 어느 날 딸 영희는 어머니에게 인사드릴 사위를 데리고 온다. 사위는 도쿄에서 나고 자란 일본인이다. 부모님은 항상 결혼은 한국인이 아니면 안 된다고 누누이 말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어머니는 딸의 일본인 사위를 환영한다. 사위에게도 수프를 끓여 주려고 한다. 사위가 오는 날은 닭을 한 마리 잡아 고와 주는 것이 오랜 전통이다. 사위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재료들을 구해 직접 요리할 만큼 수프를 좋아했다.


 이데올로기는 영희 가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데올로기란 일반적으로 사상이나 관념 형태의 내용을 순수하게 내면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이데아적 견해라 한다. 이에 대하여 관념 형태를 본인의 사회적 기반과 관련시켜 그 이해를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이데올로기적 견해라 한다고 [네이버, 두산백과 두피디아] 설명한다. 어원상 이데아(idea)와 로직(logik)이라는 두 개의 의미소가 결합된 형태이다. 세상에 대한 다양한 인식의 방법과 형태로 세계관, 종교관, 가치관, 사상, 사고방식 등 다양한 신념 혹은 체계 혹은 인식 체계를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데올로기 - 긍정적 기능, 부정적 기능]. 사고와 관념의 체계이므로, 현재의 사회 모습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이데올로기는 현 사회의 조직 구성이나 목표 설정 등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 개개인의 삶의 전체적 삶의 방향이나 바람직한 삶에 대한 모습을 설정할 수 있게 만든다.


다큐멘터리 <수프와 이데올로기>2022 포스터 2,3,4

영희 씨의 어머니는 가슴속 깊은 곳에 숨겨뒀던 비밀을 밝힌다. 바로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영희 씨의 어머니는 제주 4.3 사건(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당시 두 동생들을 등에 업고 일본으로 도망친다. 외삼촌이 죽고, 그 당시 약혼자 또한 산에 올라 경찰들에게 잡혀 죽는다. 그녀가 어린 여동생을 등에 업고 남동생의 손을 잡고 걷는 동안 길에는 죽은 시체들이 가득했다고 기억한다. 아마 영희 씨의 어머니가 제주도를 떠났던 시점은 제주도에 토벌 명령이 내려졌던 시기쯤으로 보인다. 

 어린 영희 씨는 어머니가 남한 정부를 증오하고 북한 정부를 위해 삶을 헌신한 이유를 몰랐으며 원망까지 했지만 어머니가 제주 4.3 사건을 겪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문제인 정부의 도움으로 비자를 얻어 제주도에 방문할 수 있게 돼 숨겨졌던 사실들을 직시하자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 전하며 눈물을 흘린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소련과 미군의 지배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두 이데올로기가 한반도를 점령하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던 각 세력들이 제주도를 그 활동 무대로 삼으면서 이 같은 비극이 발생했다. 이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 정부를 원망하고, 등지고, 애써 외면하려 했던 재일 조선인이 많았다고 전한다. 그중 영희 씨의 어머니도 한 사람이었다. 어린 소녀가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휩쓸려 찬란했던 시절을 희생당했으며, 그 반작용으로 북한 정부를 의지하며 노동당에 가입한다. 이렇게 영희 씨 가족의 역사가 소개된다. 

 강정희 씨는 치매를 앓게 되어 기억을 점점 잃고 있다. 딸이 누구인지, 죽은 남편은 어디 갔는지, 또한 나는 누구인지 점점 잊고 있다. 기억의 끈을 붙잡고 늦기 전에 고향인 제주도에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천운 일지 모른다. 70년 동안 같은 국민들에게도 꺼내지 못할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강정희 씨의 삶은 제주 4.3 사건에 의해 바뀌었다. 만약 이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당시 약혼자와 결혼해 또 다른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4.19 혁명, 광주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 등 역사적 아픔을 지닌 현대사, 비단 현대사뿐만 아니라 사회적 참사 등 피해자와 희생자가 존재하는 모든 사건들이 그렇다. 1949년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사건이 2022년 일본 어느 마을에 사는 영희 씨의 어머니이자 강정희라는 이름의 한 노모의 기억 속에 남아 존재하고 있을지 누가 알았을까. 시간이 지나면 과거가 되어 잊힐 것 같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 경험으로 존재하며, 그 기억의 흔적을 다큐멘터리가 담아 세상 모두에게 그 끈을 연결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희망을 낳는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그날. 대한독립을 외치는 순간 소련은 북쪽에 들어왔다. 일본에 주둔해 있던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온다. 꿈꾸던 즉각 독립이 아니라 북쪽에는 소련, 남쪽에는 미군이 주둔하는 미, 소 군정 상태에 마주한다. 민족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자 회담 결렬된다. 미국 편에 섰던 미국 유학 출신 이승만 박사가 정읍에서 발언한다.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이승만의 정읍 발언/1946년 6월 3일). 민족주의적 시각에 서서 이건 안될 일. 좌익, 우익, 중도 모두 반대에 나선다. 미국이 UN에 물어보자고 소련에 제안하자 소련은 반대한다. 미국은 UN에 밀어붙이고 UN은 즉각 독립시키라고 말한다. 남북한 총선거 결의가 시작된다. 소련은 UN의 방문을 거절하고, UN은 실시 가능한 지역에서, 38선 이남에서만 유엔 감시하에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라고 말한다. 국회의원을 선출하면 남한만의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헌법을 만들고 대통령을 선출하라는 의미다. 단독 선거, 단독정부 수립 반대에 나선 김구 선생. 김구와 민족지도자는 북으로 넘어가 토론하고자 한다. 평양에서 민족지도자들이 모여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우리 민족은 하나다. 미소는 한반도에서 물러가라"는 결정. 하지만 남쪽에서는 이미 남한만의 국회의원 선거가 준비 중이었다. 남한 단독 선거 5.10 선거가 진행 중. 5.10 선거 불참, 거부 나선 김구 선생. 당시 선거관리 위원회는 이를 무시한 채 진행한다. 1948년 5월 1일 남한 200개 선거구 투표. 제주도 2개 선서구 토표율 미달로 선거 불발. 제주도에 있던 3개 중 두 개가 무효가 되자 제주도는 사회주의자의 섬, 빨간 섬으로 낙인찍힌다. 


 제주도의 역사적 특성을 살펴보면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지정학적으로 일본과 가까워 징용, 징병의 인적 수탈이 있었고, 제주를 군사 기지화했다. 일제가 제주 곳곳에 구축한 동굴 진지. 그런 제주를 미국이 공격했고 제주도민은 고통받는다. 일제 강점기가 지나고 광복의 그날, 미군은 한 달 늦게 제주도로 들어온다. 광복은 됐지만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광복 이후에도 일본군의 횡포와 수탈은 날로 심해져만 갔다.

 이념을 초월한 제주도 인민위원회 창립(45년 9월)됐다. 미군이 제주도로 들어왔고 친일 청산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냉전의 시대였다. 미국과 정부는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친일파 경찰을 등용했다. 1946년 말 군정 출신 간부 82%가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미군정이 46년 8월 1일 제주도(경상도, 전라도)로 승격시킨다. 도제 실시 이후 제주 상황은 더욱 악화됐는데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높아진 실업률, 전염병 창궐, 흉작,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연이어 경찰 기구가 확대됐다. 일제강점기에 제주 경찰은 101명이었는데 1947년 2월 330명으로 증원된다. 결국 미군정에 대한 불신과 불만은 증가했다. 2년의 시간이 흐르고 1947년 3월 1일 3.1 발포 사건 발생한다. 

 관덕정에서 평화 가두시위를 했다. 정부는 응원경찰 100명을 충원했다. 경찰이 말을 타고 가던 중 코너를 돌 때 6살쯤 되는 아이가 튀어나와 기마경찰 말발굽에 어린이가 치이는 사고가 발생한다. 경찰은 아이를 치고 무시한다. 도민들이 쫓아가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경찰들이 폭동으로 오인해 총을 겨누고 군중을 향해 발포한다. 6명의 사망자 발생했다. 희생자 명단 중 그냥 구경하던 어린이와 여성들까지도 피해를 입었다. 15살 어린이와 젖먹이와 21살 엄마도 포함됐다. 제주도민들은 정부에게 도민들에게 발포한 경찰 진상규명과 책임 규명,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자 경찰은 제주도민을 향해 기관총을 거치해 발포 태세를 갖춘다. 외지 경찰에 의해 제주도민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이 대치는 제주신보 기자들의 중재로 마무리됐다. 9일 뒤 3월 10일 제주도는 총파업에 들어간다. 166개 군 95%의 자영업자와 공무원이 파업에 동참한다. 중문지서 경찰관의 담화도 퍼진다. 당시 서울의 중앙 경무부까지 알려지게 되고 경부 부장 조병옥은 제주도로 와 제주 공무원들을 불러 모와 말한다. "사상이 불온하고 건국에 저해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조병옥 도청 연설 중). 수많은 응원경찰이 제주도로 몰려온다. 이때 서북청년회도 입도한다. 서북청년회는 해방 이후 평남, 함북, 함남, 황해청년회 등 이북 출신 청년단체가 통합해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결성된 대표적인 반공우익 집단이다. 서북 출신 건달들이 완장을 차고 제주도로 온다. 좌익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하게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기 시작한다. 1948년 4월 3일 제주 4.3 사건 발생한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의 주도 아래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의 슬로건을 걸고 무장봉기를 일으킨 사건이다. 350명 무장대가 습격했고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했다. 4월 3일 당일 경찰과 우익인사 12명 사망했다. 좌익 무장대가 우익 세력을 공격할 당시 그들의 가족까지 희생당한다. 이때 정부에선 군대를 투입하고자 했다. 김익열 연대장은 "제주도 내에 있는 경찰과 주민들 사이 마찰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므로 군대가 동원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평화적으로 해결하자" 좌익 무장대 총책임자 김달삼이 김익렬과 만나 협상한다. 무장대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응원경찰 철수, 무장대 신변보장"요구한다. 72시간 내에 전투 완전 중지, 점차적인 무장대 무장 해제, 주모자 신병 보장 등 요구했다. 하지만 평화 협상은 결렬된다. 5월 1일 우익 청년 단원들에 의한 '제주읍 오라리 방화 사건' 발생한다. 그런데 이때 하늘에서 미국 군용기가 하늘에서 항공 촬영을 하고 있었다. 미군 대토벌 작전의 계기가 된 방화사건이었다. 조병옥은 제주도민이 사회주의자라며 모두 죽이라고 말하고 김익렬 연대장은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주장한다. 미국의 장군은 조병옥의 손을 들어주고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한다. 새로 부임한 박진경 연대장은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라고 말한다. 부하들이 너무 심하게 탄압하자 부하가 총을 쏜다. 1948년 6월 18일 박진경 연대장 피살 사건이 발생한다.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다. 

 대한민국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 명령이 내려진다. 중앙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서 제주도를 토벌하라고 명한다. 여수 14 연대에게 토벌을 명한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제14연대 병사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 수립 반대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여수, 순천 등을 점령한다(여수, 순천 사건). 경찰, 서북청년단, 9 연대 군인까지 하나가 된 토벌대가 제주 도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한다. 삼진 작전을 펼쳤다. 제주도 좌익세력을 태워 죽이고, 굶겨 죽이고, 죽여 없앤다.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 무호가 통행금지 들어간 자는 이유 불문하고 폭도로 간주, 총살을 명한다. 당시 좌익은 힘이 없자 총을 들고 산으로 들어간다. 제주도 중산간 소개령(중산간 주민들이 무장대의 가담할 우려를 차단하기 위한 집단 이주 명령, 무장대 보급 차단을 위해 마을을 불태움)을 내린다. 소식을 못 듣거나 그 자리에 남은 중산간 지역 사람들은 초토화 작전 동안 4.3 희생자 7~80%가 학살당한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 계엄령 선포. 당시 13살이었던 안인행 씨는 어머니와 함께 붙잡혀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그는 어머니 덕분에 목숨을 구한다. 60대 노부부인 안만규, 김인하는 손녀, 손자와 냇가로 피신하는데 굴을 찾아 몸을 숨겼지만 아기 울음소리가 새 나가고 말한다. 진압군은 굴 속으로 수류탄을 던졌고 이들 가족은 운명을 같이 했다(표선면 가시리 학살사건, 1948년 11월 15일). 주민 28명이 굴 안에서 숨어 지내다 토벌대에게 들키게 되고 그중 토벌대는 3살 어린이의 두 다리를 잡고 바위에 패대기쳐 학살시키는 등 남녀노소 15명이 희생됐다(빌레못굴 학살, 1949년 1월 16일). 1948년 4월 3일부터 시작된 비극의 역사가 7년 동안 자행됐다. 제주도민 30만 명 중 1/10인 3만여 명이 학살을 당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4.19 혁명으로 하야한다. 제2공화국이 들어서고 진상조사, 책임자 처벌, 사과를 기대했지만 5.16 군사 쿠데타가 들어서고 반공과 친미를 외친 군부정권이 들어선다.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암울산 시기가 시작된다. 제주 4.3 사건이 최초로 전국에 알려진 시점은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1978년'이었다. 작가는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까지 지나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노무현 대통령에 들어서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채택(2003년)된다. 


 현대사의 아픔. 4.19 혁명, 광주 5.18, 6월 민주 항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눈물이 있다. 가장 가슴 아픈 역사가 제주 4.3이 아닐까. 70년이 지나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가슴 아픈 역사였다.


[Youtube, KBS 교양_설민석의 역사특강_ 당신이 몰랐던 제주 이야기 #제주 4. 3 사건 요약]


개봉: 2022년 10월 20일
장르: 다큐멘터리, 일본/ 대한민국/ 118분
감독: 양영희
주연: 강정의(어머니, 본인 역), 양영희(딸, 본인 역), 아라이 카오루(사위, 본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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