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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우 Feb 16. 2023

여백


어두운 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강한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린다.


오랜만의 장마는 평소와는 다른 하루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나는 그런 날이면 지하철보다 버스를 타려고 한다.


신발과 다리가 조금 젖더라도 빗소리를 들으려 한다.


비가 거세게 오는 날일수록 버스는 인기가 없다.


그래서 어쩌면 평소보다 더 좋다.





평소와 다른 날씨는 내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놓는다.


어두운 하늘과 거센 빗줄기가 사람들의 얼굴을 다 가려놓았다.


사람들은 비를 피해 그늘 아래로, 우산 아래로 모두 숨는다.


낯빛이 줄어든 거리에 세상이 더 어두워진다.


우산과 그늘과 어두운 하늘, 그리고 빗줄기.


평소에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말소리를 빗소리가 대신 채운다.


어두운 온도를 느낀다.


창밖의 풍경은 세상이 품고 있는 어떤 어두운 여백을 내게 들킨다.


비가 오면, 오늘같이 무거운 비가 내리는 날이면 더욱.





좋아하는 말이 있다.


예술의 여백.


"예술 작품엔 반드시 여백이 있어야 한다."


"여백이 없는 작품은 예술이 될 수 없다."


"작품은 여백을 통해 비로소 예술이 된다."


예술 작품은 여백을 통해 작가와 세상을 연결시킨다.


어떠한 형태의 예술이든 그것은 여백을 가지고 있다.


굳이 설명하자면, 작품에 있는 여백이란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다.


작가가 어떤 의도로 작품을 만들었는지를 작품을 바라보는 제3자가 상상하는 것.


작품은 청중의 상상이 정답인지 오답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세상의 생각이 더해져 비로소 작품은 완성된다.


모든 사람, 세상의 생각과 상상이 더해질 수 있는 빈 공간이 여백이다.


작가는 여백을 남겨둠으로써 자신의 작품을 예술로 완성한다.


그림도, 건축도, 글도, 사진도, 옷과 미용도 모두 하나의 작품이 된다.





여느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날이면 나는 여백을 잊는다.


우울과 행복을 모두 품은 채로 반복되는 삶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유난히 어두운 날이면 나는 세상의 여백을 느낀다.


빗방울은 바람을 타고 날아와 내 볼에 닿는다.


나는 여백을 상상한다.


내가 내리는 생각, 상상이 세상의 여백을 채운다.


세상은 잠시 동안 작품이 된다.





반대로, 그 반대로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 그것의 여백을 찾으면 작품이 된다.


내가 여백을 채우면 그것은 내게 작품이 되어 다가온다.


나는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곤 한다.


기업은 자사의 제품에 여백을 만들고 이야기를 담아 세상에 내놓는다.


정치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여백을 사람들에게 선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세상의 여백을 채우는 이야기를 각자 써 내려간다.


내가 기록하는 나의 삶, 내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이야기.


우리는 모두 한 명의 글쟁이가 되어 세상을 작품으로, 작품을 세상으로 만들려고 한다.


언젠가 세상에 나올 나의 이야기에 어떤 여백이 담길지 조금 설레도 되지 않을까.





분명 장마라고 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사그라들더니 햇빛이 거리를 비췄다.


빠르게 흘러가는 먹구름 뒤로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보였다.


사람들은 우산을 접고 그늘에서 나왔다.


어두운 여백이 덮어 놓은 세상은 거짓말처럼 한순간 빛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곧,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바라보는 어두운 여백은 어두운 척하는 중이었던 것 같다.


먹구름이 하늘을 다 가리고 있다 해도, 그 너머엔 반드시 해가 떠 있을 테니.


저 장마 날 먹구름처럼 비어 있는 하늘을 가득 채우기보다


비어있는 모습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어쩌면 좋을 것 같다.


때론 맑은 하늘과 따스한 햇빛이 그것만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니.


이걸 여백의 미라고 불렀던가.





어두움도 여백이고, 맑은 하늘도 여백이다.


어두움도 아름답고 맑음도 아름답다.


채워도 아름답고 비워도 아름답다.


나의 여백, 채워도 좋고 비워둬도 좋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이 여기에서 쉬어갔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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