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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우 Feb 14. 2023

커피 안주


"이거 커피 안주다."


어느 날, 마트 과자 코너를 지나다가 문득 뱉었던 말이다. 재밌는 말인 것 같아 메모장에 기록을 남겼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처음부터 금주의 삶을 살았던 건 아니다. 20대 초반에는 술을 마셨다.


시간이 꽤 흘렀으니 술과 더불어 '안주'라는 단어는 이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누군가에게 내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말하면 대부분은 그 이유를 묻는다. 그러면 나도 그들에게 묻는다.


"그럼 당신은 술을 왜 마시나요."


우리는 짧게나마 각자의 이유를 늘어놓는다.


보통은 술을 마시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이유가 반대되기 마련이겠지만 우리는 비슷한 이유로 술을 마시고 또 마시지 않기도 한다.





우리는 마음의 건강을 위해 술을 마시고,

우리는 몸의 건강을 위해 술을 끊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위해 술을 마시고,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위해 술을 끊는다.


우리는 휴일의 전날 밤을 즐기기 위해 술을 마시고,

우리는 휴일의 이른 아침을 즐기기 위해 술을 끊는다.


우리는 술잔을 부딪히며 기억을 만들고,

술잔을 내려놓으며 삶을 기약한다.





술을 마시지 않게 된 뒤로 나는 나름 의도적인 만남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따 밥 다 먹으면 술 대신, 커피 한 잔 하러 가도 될까요.“


우리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한 잔씩 마시며 술잔 대신 마음을 부딪혔다.


음주의 가장 큰 장점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술은 평소에 깊지 않은 대화조차 잘하지 못하는 우리의 생활 패턴을 깨고, 우리를 강제로 이야기의 장에 데려다 놓는다.


대화는 무조건 함께 해야 하기에 나는 귀나 입, 둘 중 하나는 열어야 한다.


대화라는 것 자체에 서툰 나를 강제로 훈련시켜 준다.





한 번씩은 술자리가 그립기도 했다.


당시의 나는 술 없이 대화하는 법을 잘 몰랐으니까.


그래도 요즘은 나름대로 나만의 이야기 자리를 잘 만들어낸다.


커피를 술 대신 앞에 두고 우리는 대화를 나눈다.


둘만 마주 않아 커피를 마신다.


때론 셋, 넷, 혹은 더 많은 사람들과도 함께 자리를 갖는다.





술이 아니기 때문에 저녁이 아닌 낮에도 이런 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건 정말 좋다.


아직 밖이 밝은데 이야기 꽃이 피어난다.


술자리에서 할 법한 저마다의 깊은 속사정을 나눈다.


카페를 나서면서 아직 밖이 이렇게나 밝은데 하루가 벌써 가득 찼음을 느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적었다.


누구든 카페에 가면 결국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니까.


그래도 나는 술자리에서나 할 수 있는 깊은 대화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있다는 걸 조금은 느낀 터였다.


아직 어려서 그랬을 수도 있다.


아직 술이 아니면 각자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을 수 있다.


아직 술이 있을 때만 가능한 그런 이야기를 품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이야기를 꼭 밖으로 꺼내는 것이 능사는 아니고 답인 건 더욱 아니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나눌 수 있는 대화라면 낮에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 시절의 생각이었다.


대신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눠야 하고, 나 역시 반드시 상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했다.


이런 나의 생각에 동의해주는 좋은 관계들이 내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또 서로 속마음을 터 놓고 나눌 수 있는 깊은 관계가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곧 내가 바랬던 대화를 카페에서 함께 나눌 수 있게 됐다.


성격도, 상황도, 마음도 맞아야 했을 텐데 참 감사하다.


(만약 당신이 이미 이런 관계를 갖고 있다면


이미 당신은 깊은 관계를 얻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깊은 관계가 되어주는 사람이란 뜻이기도 하다.)





나의 인연들과 카페에 가면 나는 장난 섞인 어투로 묻는다.


"안주 뭐 시키실래요?"


나의 이런 생각을 아는 사람이 한번은 재치 있게 대답했다.


"안주 없이 깡으로 마시죠."


커피도 좋고 안주도 좋다.


낮에도 좋고 밤에도 좋다.


술도 역시, 마셔도 좋고 안 마셔도 좋다.


다만 당신과 나의 관계가 좋다면 더욱이 좋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이 여기에서 쉬어갔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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