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는 우리 세대 아재들에게는 추억이 짙은 만화다. 90년대 농구 열풍의 단초를 제공한 이 만화는 수많은 30-40 아재들을 그들의 가슴 한켠에 숨어 있던 그때 그 시절로 초대한다. 1990년대는 만화를 보는 창구라고는 만화방과 서점이 유일했다. 당시 드래곤볼이라는 당대 최고의 만화를 연재하는 아이큐 점프가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후 등장한 소년챔프는 슬램덩크를 연재하며 아이큐 점프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이 두 만화 잡지는 오늘날 네이버 웹툰과 카카오 웹툰처럼 시장을 양분하며 만화 잡지 전성시대를 열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웹툰이 활성화된 이 시대에 만화 잡지를 펼쳐보며 열광하던 아재들의 노스텔지어를 한껏 자극한다.
1990년대는 농구의 시대였다. 슬램덩크가 문을 연 농구 열풍에 마지막 승부가 점화를 하였고 이는 대학농구와 실업농구가 함께하는 농구대잔치로 폭발했다. 당시 농구선수들은 슈퍼스타급 인기를 누렸다.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 현주엽, 전희철 등은 여학생들의 오빠이자 남학생들의 우상이었다. 저 멀리 미국에서는 전설적인 슈퍼스타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가 역사를 쓰고 있었다. 이런 농구 열풍은 농구 골대 아래로 학생들을 불러모았다. 공구 골대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학생들로 빽빡하게 들어찼고 나이키와 아디다스는 경쟁적으로 농구화를 출시했다. 당시 학생들의 최애 잇템은 에어조던 농구화였다.
나 또한 당시 농구를 너무 사랑했다. 눈이 오나 비가오나 시간이 나면 무조건 농구코트로 향했다. 학창시절 점심시간은 늘 농구를 하는 시간이었으며, 주말에는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 까지 농구 코트에서 살았다. 동네 친구들과 팀을 만들어 다른 동네 친구들과 주기적으로 시합을 하기도 했다. 내 방 벽에는 샤킬 오닐 실물 크기 브로마이드가 걸려있었다. 군대에서 남들이 다 축구를 해도 나는 언제나 농구 골대 아래에 있었다. 당시 소대 농구 경기에서 MVP로 뽑혀 포상휴가를 나오기도 했다. MVP라니 참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대학원을 가고 취직을 하고 먹고 사는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농구를 잊고 살았다. 다시 농구공을 잡아보고 싶지만, 어느덧 훌쩍 들어버린 나이에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친구들은 이제 이런 격렬한 운동보다 천천히 돌아다니며 즐길 수 있는 골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아재들의 가슴속 어느 한켠에 자리하고 있던 가장 화려했던 그 순간의 감정을 자극한다. 첫 장면 북산고 선수들이 인쇄 만화 시대를 재현하듯 연필의 터치들로 시작해 영상화되는 그 순간은 과거 만화책을 펼치던 그때의 기억을 자극했다. 과거 만화책속의 인물들이 극장의 스크린에서 하나하나 살아 걸어오는 모습을 마주하던 그 순간 눈물샘이 터질것 같았다. 나는 이 만큼 나이가 들었는데 우리가 열광하던 북산고 농구부원들은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 다시 나타난 슬램덩크가 흥행하는 이유일 것이다.
북산고 농구부원들의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지나간 시간 만큼 애니메이션의 질감과 움직임은 크게 좋아졌다. CG 기술을 활용한 움직임은 과거 TV판 슬램덩크와는 차이가 컸다. 그간 CG 애니메이션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당장 모바일 스포츠 게임만 보더라도 압도적인 그래픽으로 실제 경기의 움직임을 재현하는 시대이지 않은가? 작가 다케이코 이노우에는 슬램덩크의 영상화에 부정적이었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초안 영상을 보고 이 정도면 만화속의 농구경기를 제대로 재현할 수 있다고 판단이 되어 본격적인 제작을 결심했다고 한다. 아직 한번도 영상화 된 적 없는 슬램덩크 최고의 경기 산왕전은 이러한 기술력을 만나 생동감 넘치고 박진감 있게 표현되었다. "포기하면 그 순간 시합은 종료", "포기를 모르는 남자 정대만", "No.1 가드 송태섭", "왼손은 거들 뿐" 같은 엄청난 대사들이 멋진 움직임들과 함께 재현되던 그 모든 순간은 가슴이 터질것 같은 순간들이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산왕전 이야기에 송태섭의 서사를 추가했다. 다케히코 이노우에는 슬램덩크에서 가장 서사가 부족했던 송태섭에 대한 부채의식을 늘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슬램덩크가 종료된 이후 '피어스'라는 외전을 통해 송태섭의 서사를 그렸는데, 그 스토리를 뼈대로 이번 작품에서 송태섭의 서사를 완성했다. 피어스에서는 일찍 죽은 형과의 서사와 그가 짝사랑하는 농구부 매니저 이한나와의 서사가 짧게 소개되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송태섭의 형과의 서사는 강화되고 이한나와의 서사는 그려지지 않았다. 다케히코 이노우에는 멜로보다는 가족의 서사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었던것 같다.
이로서 그의 부채의식은 덜었는지 모르겠지만, 교차 편집 형식으로 등장하는 송태섭의 서사와 산왕전의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잘 어우러 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경기에서 막 템포를 올리다가 갑자기 서정적인 서사가 흐르는 순간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송태섭의 서사와 산왕전의 경기 스토리가 잘 맞물렸다면 시너지가 났을텐데 그러지 못해 삐걱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슬램덩크는 미완성이었기에 더욱 오랫동안 회자되는 작품이다. 만화속에서 산왕전은 북산고가 화려하게 날아오르던 순간이다. 북산고는 이 경기에 모든 것을 쏟아붙고 이후 대회에서 내리 패배하며 대회를 마무리했다는 말과 함께 슬램덩크는 끝이나 버렸다. 이 경기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것은 북산고가 아니라 다케이코 이노우에 바로 자신이 아니었을까? 이 경기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쓸 자신이 없었기에 그는 과감히 펜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산왕전에서 강백호는 자신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말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통해 다케이코 이노우에는 자신의 가장 영광스러웠던 순간을 들고 와 당신들의 영광스러운 순간은 언제였냐고 묻는것 같다. 나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은 언제였을까? 바로 지금일까, 아니면 그때 그 시절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