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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뉘 Aug 16. 2024

마음을 반짝이게 하는 것

무해한 나의 사람들

6월의 햇살이 한 여름 햇살만큼 너무 뜨거운 아침.

후덥지근한 바람이 몸을 휘감고, 길가에 푸른 나무 그늘이 마치 사막에 신기루처럼. 반갑게 느껴지는 아침이다.

날씨 예보를 보니 무척 더울 거라는 소식에 여름이 제멋대로 성큼 다가온 것 같다. 올해 여름도 무척 덥고 장마가 길 거라는 기상예보가 연일 나오고 있다. 신발장 문을 열고 오늘은 어떤 신발을 신고 갈까 고민하는데 살짝 굽이 높은 슬리퍼가 눈에 들어온다. 올해 처음 신는 슬리퍼. 몸이 무거우니 신발이라도 가벼운 걸 신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슬리퍼를 신고 신나게 걸어가는 나.

저기 멀리 남편의 자동차가 보인다.

매일 보는 자동차가 뭐가 그리 반가운지 허겁지겁 걷다가 그만 아차 하는 순간 발을 삐끗해 살짝궁 넘어지고 말았다.

사고는 정말 한순간에 일어난다는 말이 맞나 보다.

넘어지는 순간 아픈 것도 잠시. 누가 볼까 창피함에 슈퍼우먼처럼 벌떡 일어나 먼지를 툭툭 털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람처럼 얼른 자동차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제야 여기저기 아픔이 몰려온다. 놀란 남편은 왜 그러냐? 다친 데는 없냐? 나보다 더 호들갑은 떤다. 아프다고 말을 하고 싶어도 남편이 걱정스러워하는 마음에 괜찮다면 출근을 서둘렀다. 남편의 하루 시작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시작하게 하고 싶지 않은 작은 배려다.

사무실에 도착해 미팅 후 공원에 앉아 커피 한잔 마시면서 무릎을 보니 까진 자리에 피가 송골송골 맺혀 있다.

상처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이고 이놈에 망신살! 뭐가 그리 급하다고 바삐 걸었는지 다른 사람이 보았더라면 얼마나 웃었을까? 덩치가 곰만 한 아줌마가 높은 신발로 뒤뚱뒤뚱 걷다가 쿵!

아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다. 하필이면 오늘 왜 높은 슬리퍼를 신었을까? 하필이면 왜 매일 신던 신발이 아닌 다른 신발을 신고 싶었을까? 일어날 일은 정말 꼭 일어나고 마는 걸까? 모였다가 흩어지는 모래알처럼 정해진 운명이란 굴레가 정말 있는 걸까? 넘어진 일상을 가지고 갖가지 생각을 하는 아침!

그 순간 문득 5년 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공원에서 아이들이 비눗방울 놀이하고 있고 잿빛 하늘은 금방이라도 첫눈을 쏟아낼 기세의 어느 초겨울 아침. 공원에 푸르던 나뭇잎은 어느새 풋풋함을 벗고 자취를 감춘 채 하늘은 온통 먹구름이다. 잿빛 하늘에 비친 비눗방울은 꼭 무지개의 빛깔 같다. 형형색색 일곱 가지 색깔이 손에 잡힐 듯 말 듯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고, 아이들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비눗방울이 터지거나 사라져도 연신 불어대고 까르르 웃는 천진난만한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뭐가 그리 좋다고, 뭐가 그리 신난다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순간.

나 또한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누군가에는 한없이 사랑스러웠던 딸의 모습이.

엄마 아빠 사랑이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그 시절이 너무 아득하게만 느껴져 울컥해진다.

그 순간 손등에 눈물이 뚝 떨어진다. 얼른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눈물을 감춘다. 하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쉽사리 그칠지 모른다. 빗물처럼 뚝뚝 떨어진다. 미친년처럼 오열하듯 엉엉 운다. 그러다 어이없게도 또 웃음이 나온다. 울음과 웃음을 토해낸 그 순간 공원에 있는 사람들 전부 나에게 시선을 돌린다. 변화무쌍하고 불안정한 시간.

무엇이 서러운 걸까.? 무엇이 속상한 걸까? 서럽다는 감정은 맞는 것일까?

창피함도 없다. 이제 이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병원에서 암을 진단받고 다리에 힘이 풀려 공원에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이 처량하기만 했다.

“선생님 혹시 오진일 확률은 없을까요?”

“흠 이 병원에서 수술할지 다른 병원에서 수술할지 결정만 하시면 될듯싶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입원하셔서 조직 검사 및 전이 검사를 해야 하는데 보호자는 오셨나요?”

“아니요…. 제가 암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당장 오늘 입원하라는 의사 선생님 말씀을 뒤로 나는 며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나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계속 맴도는 선생님 말씀

“암입니다. 암입니다. 암입니다. 암입니다”

‘내가 왜? 내가 왜?’

눈을 감으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각인된 장면들이 있다. 의사 선생님과 대화는 꼭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수십 번을 되돌려도 같은 장면만 반복되는 영상들.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기억으로 소환되는 말들은 토막 내어버린 생선의 눈처럼 나의 마음을 텅 비게 한다.

살면서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을까? 하라는 운동은 하지 않고 간편식만 먹어 대서 그런가? 나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이 있어서 나를 저주한 걸까? 가족 마음을 아프게 해서 벌을 받나?

먹고살기 바빠 돈만 좇느라 물욕이 강한 나에게 하늘이 벌을 내리는 건가?

자책하고 원망하고, 내가 그렇게 밉고 싫었던 순간. 자기혐오에 감정들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가족들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나 죽을지도 몰라 암 이래? 이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세포 하나하나에 가시가 꽂힌 것처럼 날카로워진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들어갔다 감정들이 널뛰기 중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위아래로 공중회전을 한다.

이 세상에 나란 존재가 하염없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져 누구한테든 화풀이해야 할 것만 같았다.

세상 신이란 신을 전부 부여잡고 살게 해달라고, 제발 시간을 더 달라고 살고 싶다고 애원하고 싶었다. 살려만 주신다면 다르게 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제발 시간을 더 달라고 아이들 가정을 꾸려 사는 모습까지만 보게 해달라고 아니 엄마 가시는 순간까지만 보게 해달라고 애원하였다.

내 생에 행운이라 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당겨 쓰더라도 괜찮으니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믿지 않은 신에게 빌었다.

아무것도 들을 수 없는 신에게.

한 가지 생각으로 백 가지 만 가지 감정을 느끼고 자책하며 생각에 꼬리를 물고 아팠던 시간. 죽음이란 단어는 더 오랜 뒤 나이 들어 어쩔 수 없이 주어지는 숙명 같은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렇게 어느 날 아무 예고 없이 닥치는 날벼락같은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란 존재의 부재로 가족들이 겪을 상실이나 슬픔을 생각하니 무서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삼켜버렸다.

나의 병의 무게조차 너무 힘들어 나밖에 안 보였던 그 시간. 세상 유일하게 나만 생각했던 그 시간 안에 가족들의 아픔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갑자기 닥친 아픔에 무게가 너무 커 나의 비명 소리만 들었지 가족들 친구들의 아픔은 헤아릴 수 없었던 나의 미숙한 시간들.

인생의 시계는 어느덧 시간과 공간을 건너 5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아무것도 듣지 않을 것 같은 그 어떤 신이 나의 처절함을 들었을까?

나는 전이 없이 수술을 잘 마쳤고 지금 사랑하는 가족들 이웃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살아가고 있다.

5년 전 그날의 벤치에 앉아 아이들 웃는 소리에 함께 미소가 절로 지워지며, 따가운 햇살조차 감사함을 느낀다. 푸른 나뭇잎의 냄새를 맡으며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다. 이 계절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들은 밖에서 걸을 수 있는 에너지만 있어도 감사하고, 호흡기를 찬 환자들은 편안하게 숨만 쉬어도 감사함을 느낀다.

한 번도 내가 먼저 가족 품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수술하고 난 후 나의 일상은 전과 같지는 않았다. 몸이 회복하는 과정에서도 아픔과 상실은 뒤따라오고 일상은 여전히 흘러갔다. 가족, 친구, 이웃이란 이름만으로 그들은 나의 아픔을 고스란히 함께 짊어지고 감내하며 슬픔 속에 허우적거리는 나를 위해 함께 울어 주었다. 그제야 나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도 못 먹고 나의 식사부터 걱정하는 가족들, 다정한 안부를 물어주던 나의 이웃들. 문 앞에 내가 좋아하는 제철 음식을 전달해 주던 나의 사람들.

결국 나를 살린 것은 나 자신의 운명과 의지가 아니라 무해한 나의 사람들이었다.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느 날 불쑥 내 삶에 뛰어드는 모든 문제 앞에서 나는 나의 운명이 아니라 나의 사람들을 믿기로 했다. 이들과 함께 매일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나는 어느 때보다 가장 살아 있다는 느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얼음이 차갑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단단해지듯 나는 확실히 5년 전 그날의 나보다 훨씬 더 단단해졌다.

삶을 겁쟁이처럼 돌돌 말고 살기보다는 엉뚱하게 넘어져도 웃을 수 있는 나에게 다정함을 주고, 작은 균열이 내 생을 온통 집어삼켜도 나의 사람들이 곁에 함께 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5년이라는 시간은 나에게 버티는 시간만은 아니었다. 오늘 주어진 생의 시간을 잘 살아내고자 배움을 주었고 사람들과의 나눔을 주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나의 사람들과 나의 길을 묵묵히 갈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 같다. 거창한 성공도 아닌, 꼭 무엇이 되지 않아도 평범한 오늘 하루를 나의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만으로도 이 한 세상 잘살고 있다고 말할 줄 아는 힘까지 얻었다. 나는 매일 손톱만큼 나아지고 있으며, 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나의 삶은 여전히 ING 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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