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의 정유라 체포보도에 관한 보도윤리 논쟁에 대하여
논제 : 아래 기사를 읽고 이 논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그 이유를 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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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joins.com/article/21076017
▲ 출처 : JTBC 뉴스룸
기자는 사건을 보도만 할 뿐 개입하지 않는다. 이 보도윤리는 사건에 대한 이해관계에서 오는 편향성에서 벗어나 순수한 관찰자로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전달해야 한다는 기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한마디로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건에 개입하는 순간 기자의 보도는 이해와 감정이라는 주관의 방해를 받을 가능성을 내포하며 이를 지켜보는 대중의 신뢰를 잃게 된다. 이런 논리의 전개 위에서 해당 보도윤리는 현대 저널리즘 이론에서 객관 저널리즘이라는 큰 사조를 형성하며 보도의 기본 중의 기본으로 자리매김해왔다.
이 주제를 근거하는 객관저널리즘에 관한 해묵은 담론은 이미 몇 가지 중요한 합의에 도달해 있다. 첫째로 순수한 객관성은 도달 불가능하다는 것, 둘째로 진실은 순수한 객관성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객관성은 진실에 도달하는 하나의 축일 뿐 절대적 가치는 아니다. 객관저널리즘은 정파성이 강한 당시 기존 언론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사조이며 그 한계는 뚜렷했다. 메카시즘 광풍에 대해 기계적 중립을 취한 당시 미국 언론이 그 예시다. 이에 반해 합리적 의심에 근거한 에드워드 머로우의 보도는 메카시즘을 해부해냈고이는 객관성을 넘어 진실에 가닿으려는 시도로 평가받는다. 이 사례는 기자가 주관을 갖고 사건에 개입해내는 것이 역설적으로 더욱 객관적일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서 언론이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과 더불어 인간성이 상실되는 보도환경 속에서 해당 보도윤리는 절대성을 갖지 못한다. 상대적 중요성과 이를 져버린 이유가 남을 뿐이다. 결국 논의는 진실보도라는 전제 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객관성이 진실보도의 거대한 축임을 부정할 순 없으나 그 바탕 위에서 진실에 닿는 방법은 기계적 수식으로 증명될 수 없는 주관적 가치판단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살육, 기아와 혐오 등 인간성이 상실된 풍경을 보도하는 기자는 누구도 접해보지 못한 개입딜레마에 봉착한다. 누구도 그들의 판단에 관해 함부로 단언할 수 없고 앞으로도 그렇다. 그의 주관적 판단이 최선이었는지는 현장에 서있는 기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JTBC 이가혁 기자의 판단 역시 그렇다. 우리에겐 실제 현장이 아니라 현장의 정보만 주어진다. 이런 정보에 근거한 몇 가지 아쉬움은 남는다. 교민의 제보로 정유라의 은신처를 특정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신고주체가 반드시 기자여야 했는가. 한 차례의 취재시도가 도주의 우려를 낳을 것에 대한 사전 대비는 없었는가. 신고와 체포의 과정을 보도한 취재가 관찰자로서의 기자역할과 시민의 양심 그리고 언론사의 이해가 충돌한다는 점에 대한 경계는 충분했는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넘어설 만큼 진실보도를 위한 신고가 필요했는가 하는 점들은 취재진의 개입에 숙고할 지점이 다분했음을 드러낸다. 모든 게 끝나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어젖힌 포문으로 쓰레기가 들어오는 건 시간문제라는 점에는 동의할 수 없다. 현장의 딜레마를 마주한 기자들의 고뇌와 판단 속에서 진실에 닿으려는 저널리즘이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이익을 위한 의도적인 사건의 개입에 대한 경계는 분명 필요하다. 객관성에 대한 존중도 잃을 수 없다. 그러나 이를 경계하기 위해 원칙만을 앞세우는 것은 위험하다. 그보다 차라리 판단의 근거들을 모아 논의를 확대시키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 이 논쟁은 박상현(메디아티 이사)의 'A minority report'라는 페이스북 글로 촉발되었습니다.
※ 해당 논제는 한터의 <김창석 기자의 언론사 입사준비 아카데미> 수업 중 과제에서 빌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