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없는 자유
#'낯선 곳'에서 드는 생각
어떤 기대나 예상을 할 수 없는 남들과 같이 있으면 경계심부터 든다. 나는 생각보다 옷이나 얼굴 그리고 많은 것들로 그 사람을 나도 모르게 판단 해버렸던 것 같다. 브랜드나 스타일, 얼굴의 생김새, 그 사람이 있는 장소나 하는 행동들만으로도 많은 정보를 유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로 맨투맨에 청바지를 입고 단색 스니커즈를 신은 사람이 카페에서 ppt를 만들고 있으면 영락없는 대학생이다. 해외에서는 그런 정보들이 의미하는 것들이 전부 다르다. 이 사람들에게서는 겉모습만 보고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가 없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 사람들로 가득한 공항에서는 짐을 지켜야하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경계하며, 작은 친절에 감사하게 된다.
사실 이건 외로움이지만 동시에 자유이기도 하다. 자유로워진 나는 더 많은 것들에 분노하며 감사할 줄 알고 아름답거나 추한 것에 눈뜨게 된다. 그래서 낯선 것들은 어떻게 보면 익숙한 것들 보다 더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해외에서 더 많이 설레고 더 예쁘다고 느끼는 건 아마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방법은 둘이다. 낯선 곳에 가거나, 스스로가 낯설어지거나. 까뮈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영원히 이방인일 수 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지각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무엇인지 착각하고 살아간다. 다들 믿고 싶은 대로 믿기 마련이고 그건 정신건강에는 퍽 나쁘지 않으니까.
때론 어떤 믿음에서 이탈하더라도 금방 믿음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도있다. 힘들어 하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다.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확신이 있다. 그 믿음은 도대체 어떻게 얻는걸까. 세계는 변하는 게 없는데 말이다. 스윙스는 믿음 좀 달라고 말한다. 나도 나도. 믿음 좀 주세요.
한국시간 11:26(12.9) 덴마크 시간 03:26(12.8)
파리에서 코펜하겐에는 금방 도착했다. 공항노숙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재밌을 것 같았는데.. 비행기에서 한숨도 못자고 내려서 공항노숙을 하려니 미칠 것 같다. 황금노숙을 선사한다는 보라색의자가 있는 출국장은 문을 닫았다. 그래서 2터미널의 노르웨이안항공사 옆에 간신히 누울 곳을 찾아 가방을 배고 자는데 한시간 마다 깼다. 그래도 다시 잠에 들 무렵, 덴마크 중딩들이 날 깨웠다. 안대를 하고 있었는데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깨서는 어이가 없어서 멀뚱멀뚱 앉아있었다. 나보고 중국인이냐고 묻는다. 아 욕할 수도 없고. 상황에 멍 때리고 있다가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덴마크 애기들인데 가족이랑 아프리카를 간다고 한다. 엄빠가 저쪽 어디 있는 것 같은데 따질려다가 말았다. 대신 나 화장실 갖다올테니 짐 좀 보고 있으라고 했다.
한 시간만 더 있으면 24시간째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려면 아직 9시간이나 남았다. 뭔가를 하려고 해도 아침이나 되어야 할 것 아닌가. 새벽 세시다. 잠도 다 깼다.
07:34
와 시간 정말 안 간다. 샌드위치도 사먹고 커피도 사먹었다. 수하물만 부치면 되는데 에어아이슬란드는 따로 체크인 카운터가 없다. 시간이 되면 열린단다. 그래서 나는 출국장으로 못 들어가고 계속 여기 남아있다. 그래도 와이파이가 공짜였다. 몇 시간은 그것도 모르고 심심했다. LTE의 존재감이 사뭇 느껴지는 날이다.
이곳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잠도 엄청 불편해 보이는데 잘 잔다. 코도 곤다. 여전히 동양인은 거의 없고, 한국 사람은 아예 없다. 출국한지 27시간째인데 다시 5시간을 기다려서 8시간을 더 가야한다. 그럼 총 40시간이다. 그린란드 정말 멀긴 멀 구나 싶다. 사실 가서도 할 건 없다. 경치구경. 동네구경. 끝이다. 일주일간 탱자탱자 놀 예정이다. 왜 가는지 모르겠다. 다행히도 아시안 마켓이 있다고 한다! (너무 심심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좀 비쌀 것 같지만 뭐. 굶을 수는 없으니까.
그 누크에 있다는 한국분에게 쪽지를 보내봤다. 에어비앤비 호스트들이랑 영어로 문자 다 잘 주고받아놓고 막상 만나서는 영어 못할 것 같다. 과자를 사먹거나 담배 피러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짐을 다 끌고 다녀야한다. 아 이제 슬슬 기모바지로 갈아입어야 겠다.
19:45(현지시각 덴마크 11:50)
아침 8시쯤 수하물을 맡길 수 있었다. 21.8kg가 나왔는데 카운터 누나가 봐줬다. 씻고 싶은 데 씻을 데가 없어 양치질만 하고 바지를 좀 따듯한 걸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이제 출국장. 딱히 살 건 없다. 론리플래닛 그린란드 편이 혹시 있나 찾아봤는데 론리플래닛을 파는 3군데 중에 한군데도 그린란드는 없었다.
벌써부터 빵 쪼가리만 먹는 게 싫다. 따듯한 국물과 쌀밥을 먹고 싶다. 노숙을 해선가. 사실 빵 한 조각이 국밥가격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여기는 샌드위치가 싼 건 오천원에서 비싼 건 만원에 육박한다. 든 건 별로 없다. 3천원정도 되는 빵 두 개를 사서 스타벅스에 앉았다.
스타벅스 친구가 내 이름을 적겠다며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다. 어디서 왔냐고도 물어주고 웃어줬다. 겨우 그것뿐인데 스타벅스가 너무 좋아졌다. 타지에서 온 여행자에게 친절을 배푸는 일은 이렇게 대단한 일이다.
페이스북을 보다가 우연히 coliving에 대한 글을 봤다. 외롭고 싸기 때문에. 그 소제목이 맘 에 들었다. 좋은 글은 필자를 찾기 마련인데 필자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브런치도 하는 분이라 이것저것 찾아 읽는데 진짜 자기를 찾고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글들이 많았다. 이건 요즘 내 이슈니까. 그리고 역시. 예전 대학 때, ‘집밥’이라는 소셜다이닝 플랫폼을 취재한 적이 있는데 그 사장누나였다. 꼭 소셜다이닝 플랫폼 했던 분이 아니라 그냥 생각하는 게 나랑 너무 비슷해서 좋았다. ‘자아’이슈라고 해두자.
덕분에 나도 브런치에 이 여행기를 올려보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오랫동안 공개발행에 대한 두려움이 컸는데 지금은 많이 사라진 듯하다. 드디어 이 여행에서 스스로 해야 할 것을 하나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