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모티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가 Feb 07. 2020

행동

그리스인 조르바


새로이 채우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비워낼 줄 알아야 한다. 요새 계속 드는 생각인데 정말 ‘그냥’, ‘가벼운’ 행동이 답인 것 같다. 외부 방향으로 에너지를 돌리는 것. 머릿속에서 백날 시뮬레이션 돌려봐야 애초에 모든 것을 제어하는 건 불가능하다. 모든 건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다. 문제를 해결로 인도하는 것은 생각의 알고리즘이 아닌 가벼운 행동이다.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행동하고, 새로이 시작할 줄 알아야 한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행동으로 옮기는 게 참 쉽지 않지만.. 그런 걸 보면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은 모든 방면에서 적용되는 것 같다. 행하지 않는 자에게 손해는 없지만 이익 또한 0인 것은 자명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다. 20세기 소설임을 감안한다 해도 거의 최악에 가까운 여성관에다가, 줄거리가 너무 길고 지루하게 느껴져 여러 가지로 페이지 넘기기 힘든 장벽이 존재했다.. 그치만 조르바라는 캐릭터와 그가 주는 메시지에서 앞선 요새 생각과 맞닿는 큰 울림을 느꼈다.


주인공 '나'는 크레타로 가는 배에서 노동꾼 ‘조르바’를 만난다. 조르바와의 대화를 통해 화자는 진짜 삶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온종일 읽고 쓰며 오직 영혼과만 고군분투하던 주인공은 자유로운 행동가이자 경험주의자인 조르바의 모습에 감명받는다. 화자의 말마따나 그는 모태인 대지에서 아직 탯줄이 채 떨어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실낙원에서 온 순수, 열정, 사랑, 예술의 본연의 의미가 조르바의 입에서 가장 단순한 언어로 전달되었다. 그에겐 뭐든 직접 부딪혀보고 행동하는 것이 우선이다. 오롯이 순수한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하고 싶으면 행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다. 또한 타인이 부여한 기존의 가치들에 그저 무조건적으로 복종하지도, 무작정 거부하지도 않는다. 인간을 옭아매는 이념, 돈, 국가, 종교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그는 자유를 향한 의지의 표상 그 자체이다.  

 

아프리카인들이 뱀을 섬기는 이유도 이와 같다. 온몸을 땅에 붙이고 사는 뱀들이 대지의 비밀을 더 잘 알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며 배로, 꼬리로,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알아낸다. 조르바도 이와 같다.
내 감각들과 몸을 제대로 훈련시켜 인생을 즐기고 이해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뜀박질을 배우고 씨름을 배우고 수영을 배우고 승마와 노 젓기와 자동차 운전, 사격을 배워야 한다. 내 정신을 육체로 채우고, 내 육체를 정신으로 채워야 한다. 내 내부에 웅크린 두 개의 영원한 적을 화해시켜야 한다.


주인공은 영혼을, 조르바는 육체를 상징한다. 그저 관념과 활자 속의 이론 속에만 빠져 있는 딜레마에 처해있었던 주인공은 살아 있는 세계로부터 기쁨을 얻기를 바랬다.


보다 고상한 정열에 휩쓸리는 것. 그것 역시 또 다른 노예 상태는 아닐까? (...) 우리가 따르는 것이 고상할수록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다는 뜻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재미를 보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지 못한 채 죽는 건 아닐까?


관념주의자가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함정은 자기 생각 속에만 갇히는 것이다. 행동 없는 방관자적인 자세로만으로는 현상을 진정으로 파악할 수 없다. 거리를 유지하며 관망함으로써 안전을 유지할 수는 있지만 결국 바뀌는 건 없다. 결국 사람을 가장 활력 있게 하고 빛나게 하는 것은 세계와의 연결을 통해서 얻어낼 수 있다.


조르바는 관념주의자의 함정을 꿰뚫는 캐릭터다. 자유로운 행동가인 조르바는 삶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레 맞이한다. 자리에만 앉아 생각하고 토론하기보다는 밖으로 나가 행동하고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삶 그 자체를 즐긴다. 그는 오로지 현재의 순간에만 충실한다. 어제 일어난 일을 생각하지도,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는다. 그저 일할 땐 일만 하고 먹을 땐 먹는 일에만 집중할 뿐이다. 이는 불교의 교리와도 닮았다. 불교 신자인 화자가 붓다의 가르침을 행동 그대로 실현하는 조르바에게 이끌리게 된 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머리로만 지각하는 사람과, 그것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다른 세상을 산다. 생각에서 나아가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느끼는 체험의 과정은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고 몰입을 이끈다. 감각의 느낌은 그대로 나에게 새겨진다. 그것을 경험하는 과정 자체에서 나는 확신을 얻는다. 그것을 진정으로 느꼈기 때문에 전보다 훨씬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느낌은 무엇과도 뒤바꿀 수 없는 나만의 자산이 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치통을 과소평가하는 지식인의 말이다.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야 말로 모든 생물을 포괄하는, 훨씬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이다. 나의 자아는 사유에 의해서는 당신의 자아와 본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사람은 많으나 생각은 적다. 우리 모두는 서로 전달하고 차용하고 서로 상대의 생각을 훔치기도 하면서 거의 동일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나의 발을 밟는다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다. 자아의 토대는 사유가 아니라 고통, 즉 감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감정인 것이다.
/ 밀란 쿤데라 『불멸』
매거진의 이전글 북촌방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