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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가 Nov 10. 2020

자유와 외로움 사이의 줄타기

은희경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자유와 외로움 사이의 줄타기

건조한 성격으로 살아왔지만 사실 나는 다혈질인지도 모른다. 집착 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집착으로써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짐짓 한 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 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12살의 어린아이였던 『새의 선물』 강진희의 이야기는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로 이어진다. 주인공 강진희는 사랑에 대한 냉소를 유지하기 위해 항상 세명의 애인을 유지한다. 상대는 바뀔지언정 지속적으로 3이라는 숫자를 유지하고자 한다. 이렇듯 그녀가 지속적으로 3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것이 운명적 사랑 혹은 맹목이라는 무거운 굴레에서 벗어나게끔 해주며, 냉소적 태도와 거리를 유지하게 해주는 데 있다. 그녀는 사랑을 하찮고 사소하게 만들고자 한다.  "사람은 떠나보내더라도 사랑은 간직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사랑을 할 수가 있다. 사랑에 환멸을 느껴버린다면 큰일이다. 삶이라는 상처를 덮어갈 소독된 거즈를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꼴이다." 


진희에게는 아무 보증 없이 오직 희망에만 자신을 맡기는 것이 그 무엇보다 두렵다. 희망을 갖는 것은 그것을 믿는 것이다. 무언가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이러한 믿음은, 사람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절대성이며 하나뿐인 사랑은 그에 대한 집착과 맹목을 부르는 동시에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반대로 희망에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를 위해서는 솔직함을 저당잡혀야 한다. 진희는 현석과의 순간을 행복하게 느끼면서도, 본연의 솔직한 감정과 마음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신만의 독립과 일정한 바운더리를 유지하는 선택을 한다. 가볍게 살고 싶다는 그녀의 말은 스스로에게 거는 자기 암시와도 같이 보이기도 하다.


나는 사랑의 소모를 두려워했다. 마치 광합성으로 스스로 제 먹이를 만드는 녹색 식물처럼, 햇빛을 받아들이고 물을 길어 올려 자기 안에서 스스로 먹이를 만드는 사랑을 원했다. 내 몸속에서 혼자 사랑이라는 먹이를 만들고 그것을 먹으며 생존해가기를 말이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황량한 겨울 들판을 헤매며 타인을 찾아 울부짖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타인 의존적이 아닌, 온전히 독립적인 자기발전적인 사랑을 꿈꾼다. 상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치고, 조바심을 내며 온 에너지를 소모하며, 그렇게 노력해 꿈꾸던 사랑을 얻는다 해도 이를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며 스스로를 갉아먹는 ‘무거운’ 방식을 거부한다. 그녀는 상대방이 아닌,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한다. 끊임없이 사랑을 이어나가는 그녀는 사실 자기감정의 폐쇄회로에 갇혀있는 것과 다름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 누구보다 냉소적인 주인공이야말로 가장 열심히 사랑하는 데 아이러니가 있다. 애초에 관념 자체를 믿지 않음을 택함으로써, 상처 받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더 잘해줄 수도 있다. 그저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때가 있다. 진희는 부풀려진 사랑과 관계라는 관념에 대해 보다 현실적인 기대를 깔고 가기를 택한다. 애초에 영원한 춤은 없다. 그저 지금 현재 내 눈앞의 상대와의 춤에 집중하며 즐기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다. 언제나 이것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추는 진희의 사랑은 현존 그 자체의 상태에 있다.



혼자 있을 때마다 관계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독립적 개체이다. 그렇기에 발생하는 본연의 공허함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 간의 관계에 매달리는 것이야말로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우연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타인에게 나를 온전히 내맡길 수는 없다. 물론 연인은 이만큼, 가족은 이만큼, 친구는 이만큼 모든 관계는 이러한 감정을 잠깐잠깐 잊게 해 주지만, 결국엔 스스로 해결해야 할 평생의 과제가 아닐까 한다. 그냥 모든 본연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면서도 요샌 행복 뒤의 부서짐이 두려워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이 진정 자유로운 상태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고통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 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데에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사랑으로부터 얻는 기쁨의 양은 이를 잃었을 때의 고통의 무게와도 비례한다. 그렇기에 상처 받지 않고 자신을 지키며 평화 속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이면 속 배신을 가정하고 있어야 한다. 상대의 손을 잡는 현재에도 최악의 결말을 상정하며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렇듯 진희의 위악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고통을 미리 겪어버리는 것에 있다. 오히려 이 때문에 에너지를 더욱 소진시키며 본인을 힘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치 그것만이 전부인양 절대적 사랑의 환상에 빠져있는 사람과, 기대를 비우고 관찰자의 입장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 둘 중 어느 쪽이 더 행복에 가까울까. 사실 "가볍게 살고 싶다. 아무렇게라는 건 아니다."라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암시하는 듯 보이는 강진희야말로 사랑이라는 관념의 가치를 너무 높게 둔, 무거움의 진영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12살의 어린 시절을 그린 전작 『새의 선물』에서 일찍이 좌절을 체험한 진희는 절대적인 사랑의 허위성을 파악하고, 무거운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녀는 이러한 방식이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이라 말한다. 이것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어수단인 진희에게 누가 마냥 돌만 던질 수 있을까. 그러나 끊임없이 다짐하는 진희 또한 기대를 아예 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술에 취해 탄 택시가 어디로 가는 건지 알 수 없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처럼 어느 쪽이 답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듯하다.


물론 당신들이 의심을 찬양하더라도, 절망적인 것을 의심하는 것은 찬양하지 말아라!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의심할 수 있는 능력이 무슨 소용이 되겠느냐. 너무 빈약한 근거에 만족하는 사람은 잘못 행동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많은 근거를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위험 속에 머물게 마련이다.
오늘 읽은 시이다. 제목은 '의심을 찬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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