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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BP Nov 29. 2020

덕질을 하며 깨달은 마음건강

기본적으로 아이돌에 열광적인 타입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배우들을 더 좋아하는 편이고, 잘생기면 더 좋지만 일단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에 눈이 번쩍이는 타입이다. 그래서 15년차 공유 팬이다(???). 로맨틱 코미디물을 오랜 시간 좋아해온 탓에 그안에서 연기 잘하는 사람들이 마음속 1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변이지만 괴변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내게 팬질이란 내가 애정하는 배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야 하는 것도, 그를 직접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만나면 좋지만 그 기회를 쟁취하고 싶을 만큼의 머스트는 아니다. 그저 시간이 나고, 궁금할 때마다 소식을 쫓고, 그가 출연한 작품들이나 프로그램을 다 섭렵하는 정도가 내게는 정도(程度)다. 현실감이 강했던 시절의 나는 그게 나에게도 스타에게도 가장 적정한 팬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최근 덕통사고를 당했다. 공유에게 마음의 20% 지분을 꾸준히 내어주고 눈 돌리며 나머지를 여기저기 투자했다 회수하기를 반복했는데, 80%를 내어주고도 공유의 20%마저 가져다 주고 싶을 만큼 홀려버린 사람이 생겼다. 그리고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하다 못해 쫓아가 당장 알아봐야겠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게 뭔지 이번에야 제대로 느끼고 있다. 나는 이를 두고 팬심을 넘어선 찐심이라고 말하는데, 도통 연예인을 두고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이라서 운명론마저 들이대고 있는 판이었다. 언젠가 만나게 될 운명이 분명하다고(ㅋㅋㅋ). 비슷한 취향도 많고 웃는 상인 것도 흡사하다고 교집합까지 수집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앉아서 기다린다고 벌어질 일은 아니니 만날 계획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루트를 탐색했다. 공연이나 사인회를 찾아다니는 건 눈에 띄기엔 로또 맞을 확률만큼이나 어려우리라 판단했으므로 다른 루트를 탐색하는 데 머리를 잔뜩 굴렸다.

"기획자인지, 편집자인지, 에디터인지 애매한 일을 하고 있으니 기자 쪽으로 길을 돌려볼까? 이제와서 기자를 할 수가 있나? 아니면 광고기획에 다시 눈독 들여야 하나? 근데 내 기질이 기획에 잘 맞았던가? 나는 다른 좋은 기회가 오면 기획에서 도망가고 싶어 하던 사람이 아니었나? 아니 그럼 어떻게 내 최애를 만나지? 최애를 만나기 위해 무언가가 되는 것도 나름의 보람이 있을까? 만약에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만나지 못하면? 만났는데 1분의 즐거움으로 끝나면? 아니, 나는 그걸로는 만족이 안될 만큼 사랑하는데?"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꼬리를 물다 보니 어느새 나는 '불가능'하다는 답에 치닫았다. 부정적 어휘가 고개를 든 것이다. 일단 만남 자체가 너무 어렵다. 같은 업계에 있어도 만날 수 있을까 말까한 상황인데,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내가 대체 어떻게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만날 수 있게 되어도 내가 한 명의 팬이 아닌 여자로 보이기엔 부족한 점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 멋대로의 세상에서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겠지만, 공인에게 내놓는 나는 세상의 기준으로 바라봐야 할 것만 같았다. 특히 내 이상형이 살아가는 세상에 빗대면 나는 외모도 기준 이하, 능력도 기준 이하(돈도 없고, 인정받은 재능도 없고), 젊음은 그저 그런 정도. 그래, 이게 시작이었다. 나는 점점 나를 깎아내려 가고 있었다. 그간 나만의 근사한 목표를 설정해두고 대담하게 나아가던 나라는 사람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위축되고 말았다. 내가 보잘 것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 한 사람을 좋아하는 과정이란 이렇게 나약해지는 것이었지...' 나는 새삼 깨달았다.

찐심 이상의 짝사랑 같은 것을 나는 하고 있었다. 꽤 오랜만에 남자사람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이유 때문이었고, 배우를 애정할 때 역할에 몰입하고 있는 건지, 사람에 몰입하고 있는 건지 꽤 구분을 잘한다고 믿어온 탓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이가 남다르게 다가올 법했다. 하지만 이 마음이 세상의 기준과 다른 내 모습을 자꾸 들춰 채찍질 한다면 과연 이것은 내 삶에 좋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절할 정도로 애정하는 동시에 꽤 괴롭다는 것인데, 괴로움이 앞질러 차라리 외면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편안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건 내가 어느 책에서 읽고 난 뒤부터 마음이 힘들어 하는 순간마다 되새기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는 역시 모두 외면하고 돌아서는 것만이 방법인 걸까? 어쩐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이 마음의 무게든, 상황의 무게든 견뎌내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포기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포기하고 살아온 탓에 많은 것들을 놓친 기분이 요즘 부쩍 들어서 '포기'하는 것에 촉각이 곤두서있던 차였다. 특히 '내가 가당치도 않을 거라'는 짐작으로 일찌감치 포기한 적이 많아서, 욕심을 부리다 제풀에 꺾일 지언정 지레 겁먹고 도망가는 일이 더 이상은 없길 바랐다.

가당치도 않을 거라는 짐작 자체가 내가 상처받을 것을 예견해 설치한 에어백이었다. 기껏 오래 아껴온 마음을 내어놨는데, 애닳던 시간과 노력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외면 당한다면 무참히 무너질 것만 같았다. 그것이 두려워 매번 에어백을 터뜨리며 도망 다녔다. 곱고 귀해보이는 것일수록 격을 나누고 나를 깎아내리며 단념했다. 다치지 않기 위해 설치한 에어백이 도리어 나를 더 겁쟁이로 만들고, 자신감을 갉아먹고 있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두려움이 내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지는 데에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이 감정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불현듯 깨달았다.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좀처럼 피어오르지 않는 이유. 기대와 애정만큼 상처가 예고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 상처가 예고된 일에 나를 내던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 관계들에서 받은 상처가 채 아물지 못했다는 것을 재확인한 셈이기도 했다. 사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애정과 상처가 한 데 뒤섞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되는데, 아직도 받아들이기 너무 어려운 모양이다. 그런 걸 보면 '덕질'이란 상실을 예고한 애정이다. 언젠가는 최애를 한 사람의 품안으로 보내주는 데서 '상실감'을 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고된 상실감마저 끌어안으며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은 실로 대단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찐덕후들이 사뭇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그러한 상실이 두려워서 이렇게나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도전하지 않는 삶을 더 이상은 살지 말아야겠다고 올해 초부터 결심해온 터였다. 꿈꾸는 자의 간절함은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오래 간직해온 바람들이 마침내 저들만의 속도로 내 삶에 나타난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기'라는 단어에 나는 민감해지고 말았다. 적어도 이렇게 이르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재 이 감정의 소용돌이와는 어떻게 마주해야 좋을까. 일상이 망가지지 않으면서 허황된 꿈이라도 계속 꿀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한 책에서 그런 말을 했다. 귀인이란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순간에 마침 내가 읽은 책 또는 들은 강연 등에 내가 공감하고 변화가 일어난다면, 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이(필자, 강연자 등등) 역시 귀인이 되는 거라고. 알맞은 타이밍에 나타나 내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었으니 말이다. 이때 내가 우연히 만난 글에서 '체념'과 '포기'의 차이를 일러줬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직면해야 하는 것이 '포기'가 아니라 '체념'일 수 있음을 일러주는 글이었다.

"체념과 포기는 다르다. 체념이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시간에 따른 판단 행위를 뜻한다면, 포기는 미래를 포함한 시간에 대한 판단과 결정이다. 그런 점에서 체념은 새로운 시작과 출발로 이어질 수 있다. 체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체념 이후의 판단과 행위가 중요하다. 체념이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체념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찾거나 발견하기도 한다. 체념이 없다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아 새로운 것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체념한다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나 과거와 단절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한 단절이야말로 새로운 상상,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한다. (중략) 살면서 더 필요한 일은 체념 속에서 희망을 엿보는 일이다.(매일신문, [춘추칼럼] 체념과 희망, 권경우 성북문화재단 문화사업부장)"

가속화되는 비교 속에 발화되는 비참함에 매몰되어 우울감이 나를 감쌌던 며칠. 그러한 과거이자 현재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는 '체념'이라는 걸 배웠다. 그리고 체념 이후 내가 하기로 한 판단과 행위는, 일단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정진하자는 것. 오래 전 고등학교 선생님 한 분이 해주신 말, "내가 나의 가치를 높이면, 그에 상응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 말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최소한 내가 상상하던 만큼의 멋진 사람이 우선 되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빛나는 나 역시 그에 비견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우선은 목표를 이루는 것에 매진하자고 생각했다. 이러한 단절이 실로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했는데, 올 한해 내내 글이 써지지 않아 답답해 하던 내가 드디어 글이 쓰고 싶어진 것. 꼬리를 무는 이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고, 목표를 이루자는 마음이 올곧게 서니 가능해진 일 같기도 하다. 이것이 유의미한 체념이자 그럼에도 짝사랑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다시 균형을 찾을 수 있게 했다.

또 하나 내게 힘이 되는 메시지를 주었던 김혼비 작가님. 이때 마침 '아무튼, 술'을 읽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와인이라는 주제에 공감이 되어 몰입하다가, 확대해서 해석해보니 나의 덕질에도 해당될 수 있는 이야기라 와닿았다.

"혹시 나처럼 현실적인 여건이 여의치 않고 통이 크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어떤 세계를 피워보지 못하고 축소해버리고 마는 것에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만큼은 꼭 말해주고 싶다. 살면서 그런 축소와 확장의 갈림길에 몇 번이고 놓이다 보니, 축소가 꼭 확장의 반대말만은 아닌 경우들을 종종 보게 되었다. 때로는 한 세계의 축소가 다른 세계의 확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축소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확장이 돌발적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축소해야 할 세계와 대비를 이뤄 확장해야 할 세계가 더 또렷이 보이기도 한다. 이를 테면 내게는 '모자란 한 잔'보다 '모자란 하루'가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든지, 그래서 모자란 한 잔을 얻기 위해 쓸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모자란 하루를 늘려가는 데 잘 쓰게 되었다든지, 같은 여러 가능성. 아니, 뭐 그렇게 안 이어지면 또 어떤가.(아무튼 술, 김혼비)"

그렇다, 이 단락을 통해 모자란 마음을 채우고, 모자란 덕력을 뽐내기보다 모자란 나의 하루를 채우는 것이 지금의 내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못 쫓은 그의 지난날을 쫓는 동안 내 삶을 발전시킬 시간들을 정작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애정을 품고 적당히 힐링받으며 나의 길을 만들어 갈 것. 그것은 김혼비 작가님이 적절한 순간에 내게 던져준 메시지였다. 혹시 원하는 만큼 확장되지 않더라도 어떠냐는 말까지.

덕분에 나는 못난 마음이 지나가던 순간을 슬기롭게 이겨냈다. 물론 덕질을 뭐 이렇게 심오하게 풀었나, 덕심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코웃음칠 수도 있겠다.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은 건 아니다. 나는 그저 나를 믿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을 믿어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낼 수 있는지 말하고 싶었다. 언젠가 이 글이 성지순례 글이 되면 더 좋을 것 같고(ㅋㅋㅋ),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무언가를 이렇게 열정적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이 나를 웃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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