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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BP Sep 09. 2020

왜 사랑 '받으려고' 하나요..?

나는 요즘 의문이 든다. 연애라는 것이 과연 사랑을 '하고' 또는 '나누는' 과정이 맞는지. 그저 사랑을 '받는' 데에 더 집착하는 과정은 아닌지 말이다. 연애 초반의 그 뜨거움이 식어가는 순간들을 떠올려보라. 사랑을 '받고' 이해를 '받고' 싶어 종종대는 그 몸짓과 언사들로 장식되는 시간들을. 이것을 그냥 인간의 본성일 뿐이라 하고 넘길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랑을 받지 않고서는 혼자 설 수 없는 어른이들로 성장한 것은 아닌가 세상에 묻고 싶다.



돌아보면 20대의 가장 큰 숙제로 왜 '연애'를 받아들었는지 모르겠다. '학생이 무슨 연애를!'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신분을 지나 이제 어린 날 영화 속에서 보던 로맨스를 현실로 끌이는 것에 대해 사회적으로 용인받을 수 있는 시기가 도래했기 때문이었을까. 호기심이 극도로 팽창하며 욕망의 정체와 목적을 탐구할 의지는 채 피어오르지도 못했다. 맹목적으로 연애랄지 사랑이랄지 하는 것에 나를 내던졌다. 그저 당연히 겪어야 하는 일 중 하나라 생각했다. 대개 그렇게 생각한 듯이 캠퍼스 안팎으로 서로에게들 추파를 던지느라 분주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새 커플이 탄생하고 또 누군가가 이별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내 주위의 친구들 역시 끝없이 대시를 받아 거르고 있던 차였으나 어쩐지 나는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다. 내게는 좀처럼 쉽지 않은 숙제였고, 그런 사정이 분할 지경이었다. 물 흐르듯 일어나는 과정일 줄 알았던 것이 손 끝에 닿을 기미도 보이지 않자 어긋난 간절함이 자라났고, 때로는 그까짓 거 안하겠다고 어깃장을 놓기도 했다. 사랑받지 못하는 자의 절규였다. 왜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양가를 통틀어 막둥이로 자란 내게 '사랑을 받는' 일이란 이토록 어려운 적이 없어서 남들보다 몸부림쳤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그런 내게 이따금 들려온 조언은 '네가 널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널 사랑하겠냐'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내게 이 말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나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이란 말이냐. 내 스스로 기특해 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험담을 했고, 내 선천적인 외모나 성질을 두고 뒷담화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삐뚤어진 마음이 한 걸음 물러나 천천히 고민해보는 일조차 거부했다. 그리고 '사랑받기 위해' 하염없이 내 자신을 채찍질하는 방법을 택했다. 내가 반성하고 고쳐야 하는 것이겠거니, 내가 남들을 배려하지 못한 것이겠거니, 내가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이겠거니, 다 내 잘못이겠거니. 부정적인 평판을 마음에 담고 그것들을 지워내려 온힘을 기울였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한 움큼씩 쓸려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그러다 연애를 하긴 했다. 간절함이 빛을 발한 건지, 여린 내 구석을 엿본 이의 동정 어린 선택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연애의 성공이 반드시 사랑의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정확히 말하면 그 만남의 끝에 이르렀을 때야 나는 깨달았다. 그저 사랑받기 위해 발버둥치는 내 자신이 처량해 3년여의 연애를 접었다.


그때 나는 지리멸렬했던 회사생활과도 이별했기 때문에, 집안에 누워 몇 달을 심적으로 끙끙 앓았다. 삶이 어쩌다 이렇게 힘겨워졌는지 이해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아팠다.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간절했을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이 나약함을 제대로 진단할 줄만 알았어도 조금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었을까, 지금의 나는 궁금하다. 그래도 다른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다시 일을 구하기만 하면, 둘 중 무엇 하나라도 시작한다면 금방 일어설 수 있을 줄 알았다. 잠깐의 휴식이면 충분할 거라고. 하지만 '잠깐'이란 유효기간은 내 바람일 뿐이었고, 인생이란 내 뜻대로 흘러갈리 만무했다. 자신있었던 이직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러자 작은 불씨처럼 남아있던 회복에 대한 의지는 순식간에 꺼지고 말았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스텝이 이다지도 어렵다는 사실이 나를 처참히 무너뜨렸다. 삶에서 고대하던 것들로부터 철저히 배신당한 기분이 들었다. 더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저 세상을 원망하며 모든 것들과 단절하고 지냈다. 머릿속은 어느새 '살아서 무엇 하나'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세상에 대한 기대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잃은 상태에 직면한 것이다. 그렇지만 쪼그라든 마음은 죽음을 끌어당겨올 힘마저도 부족했고, 굴뚝 같은 생각만으로 내가 가닿은 것은 죽기 전에 꼭 해봐야 할 것, '버킷리스트'였다. 솔직히 항목들을 일일이 열거해놓은 노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서너 가지 정도 마음 깊숙이 간직해둔 것이 있었는데,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1순위가 어학연수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낭떠러지에 서있는 듯 아슬아슬해 보이는 내게 그들은 '하고 싶은 것이 그 무엇이든 일단 해보라'고 적극 권했다.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나는, 나를 아끼고 믿어주는 이들을 지지대 삼아 2019년 3월, 캐나다로 떠났다. 오랜 시간 영어는 내게 애증이고 갈증이고 선망이었다. 또는 과거의 영광에 불과한 것이었고, 유일한 자존심일 수도 있겠다. 영어로 영재 소리도 들어봤고, 수능 공부를 거쳐 토익 공부까지도 썩 잘 해낸 편이었는데, 그 다음 단계로 올라서려고 할 때면 턱턱 막혔다. 얇은 유리막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방탄 유리가 가로막고 서있던 모양이다. 같은 단계에서 계속 고꾸라지니 울분은 터지는데 달리 해결할 방도를 몰랐다. 그때부터 해외에 가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핑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한계점이 '스피킹'이라 더 그랬다.


7개월의 어학연수를 마칠 때까지 나는 처음 맛보는 자유에 정신 없이 행복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리숙한 내 가치관과 싸우느라 힘겹기도 했다. 모나고 미숙한 마음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호의를 베풀던 친구들에게조차 민폐를 끼쳤던 것을 떠올리면 콧구멍이 벌렁거리고 귀가 화끈화끈하다. 그럼에도 거기서 만난 친구들은 나를 한결같이 대했다. 실수했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치고 어학원에 갔던 어느 날도, 친구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어제처럼 내게 인사하고 말을 건넸다. "예나는 그냥 그런 사람인 거니까. 그러한 점들을 알게 됐을 뿐이야." 한 친구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오랜 시간 나를 옥죄던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사랑받고 싶다. 그러려면 실수해선 안된다." 마음 어느 한 군데가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 사랑에 대한 어떤 오해가 있었다. 사랑이란 온전해야 한다고 믿었던 모양이다. 단 하나의 결점도 없어야만 사랑이라는 것이 오는 줄 알았다. 어디서 그런 오해가 출발한지 모르겠지만, 가족들의 품안에서 무조건적으로 받아온 사랑이 하나의 원인일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던 것들에 차질이 생겼을 때 사람이란 본능적으로 자꾸 문제점을 찾아보게 되니까. 다시 말해 나에게 '사랑'과 '인정'은 어느새 끊임없이 점검해야지만 쟁취할 수 있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나치게 헌신적이라는 의미도 되고, 타인에게 나를 노출하는 정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사람이란 으레 실수하는 존재라 실수를 만회할 또는 다시 저지르지 않기 위한 헌신과 열정을 보여야 했으며, 타인의 평가를 통해서만 사랑이나 인정을 확인받을 수 있었으므로. 사랑을 받기 위해 타인의 시선 감옥에 제발로 걸어들어간 셈이다. 하지만 어린날엔 이러한 진실을 깨닫기에는 너무나 서툴었고 조금 더 자라서는 어떻게 해야 이 감옥을 탈출할 수 있는지 알 턱이 없었다. 때문에 캐나다로 떠난 것은 누군가의 눈에는 도피로 비쳐졌을 수 있다. 그리고 일견 인정하는 바다. 당시엔 그 감옥을 탈출하는 방법이 도피 뿐이라고 생각하긴 했으니까. 캐나다로 떠나며 인스타그램 계정을 삭제했으니까. 캐나다를 퍼즐의 조각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자 한풀이를 하러 가는 곳으로 여긴 동시에 불필요하게 나를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공간으로 삼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소정의 성과를 얻었다니, 아니 조금 과장하자면 이후로 인생의 대변혁을 맞았으니, 그 변화를 이끈 키를 얻어왔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보람찬 여행이었나 싶다.


그러니까, 캐나다에서 만난 그 친구의 말을 말미암아 '있는 그대로의 나' 즉 실수하는 존재로서의 나로도 괜찮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체감했다. 실수 하나라도 하면 내게서 등 돌리고, 나를 험담할 것만 같던 두려움과 불안함으로부터 마침내 해방된 것이다. 이 깨달음은 진실로 나를 단단하게 해주는 기회가 됐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더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해명하고 변명하기 위해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필요로 하던 말들을 스스로에게 하기 시작했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나를 얼마나 응원하는지에 귀 기울였다. 결국 매순간을 감각하고 어찌 대응할지 판단해 행동하는 주체가 나라는 점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이 삶의 동력이 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그러자 자신감도 자존감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잘 해낼 수 있다는 것, 재미있는 일상을 꾸릴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일까. 이러한 변화에 탄력이 붙었다. 여가시간을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한 노력들로 채우며 동분서주했다. "자기 자신을 아끼는 만큼 자기계발에 힘을 쏟기 마련이다"라는 한 정신과 교수가 했던 말처럼.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알게 된 것이다. 이제 혼자 있는 시간은 외롭다기보다 가장 유익한 시간이 되었고, 타인의 사랑에 기대고 더많은 사랑이 되돌아 오기를 기다릴 때보다 더욱 마음이 풍요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 즉 자신감(自信感)과 스스로에 대한 존중, 즉 자존감(自尊感)이 차오른 것만으로 이토록 사랑이 충만해질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가장 놀라운 사실이었다. 내게는 세상을 바라보고, 사회적인 문제에도 책임을 지고 싶을 만큼의 여유가 생겼고, 좀 더  폭넓게 타인의 이야기를 이해해볼 수 있을 만큼의 관대함이 생겼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무너지고 파도에 휩쓸리는 순간이 온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결단코 그런 시간은 우리의 인생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처럼 따라붙는다. 그때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것은 무엇일까. '나'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가족들, 오랜 친구들, 그리고 연인도 될 수 있지만 그 전에 내가 있다. 내가 나를 믿어주면, 실패했다고 내 자신을 저주하지 않고 다시 할 수 있다고 힘을 북돋아주면 일단 두 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 두 다리에 힘을 바짝 주는 힘은 내 자신에게서 발현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야 벽에 기대든, 손잡이를 붙잡든 하여 걸어보려는 노력을 한다. 주위 사람들은 그렇게 부차적인 역할은 해줄 순 있지만 내 움직임을 통솔할 수는 없다. 그건 우리가 태어나 걸음마를 배울 때부터 정해진 원리였을 테다.


그래서 나는 연애를 해도 공허하다거나 연애를 하며 지나치게 결속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자기 자신을 돌보는 능력에 대해 먼저 고민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당신이 혹시 '사랑 받기 위해서만'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들이 다 하는 것이니까 당연히 갖춰야 하는 인생의 조건으로 연애를 치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질문하고 싶다. 당신은 타인의 사랑이라는 그늘 없이도 반짝일 수 있는 사람이다. 또한 타인은 결코 내가 바라는 만큼의 전폭적인 애정을 줄 수 없다. 그 역시 하나의 인간으로서 자신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나를 가장 열렬히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이야기한다.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은 사실 그냥 나일지도 모른다고' 그만큼 나는 내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하나의 객체로서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나 자신을 사랑하는 자세와 아무리 가까운 사람에게도 휘둘리지 않을 만큼 단단한 자아를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물론 저는 이제 비연애/비혼주의자입니다, 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동등한 인격체로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상대의 사랑만을 바라는 해바라기 같은 연애를 지속하며 아파하지 않기를. 내가 나를 소중히 여기면 상대도 나를 소중히 여기게 되어 있으며 사랑을 넘어 인생 전체에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관계로 거듭난다. 나도 나를 다룰 줄 모르면서 타인이 나를 이해하고 알아서 척척 맞춰 해주기를, 또는 내가 타인을 다 안다는 오만으로 일련의 판단을 함부로 조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두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객체로서의 나를 바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서 출발해야 하며, 받기 전에 주는 존재로서 내가 행복한지, 받지 않고도 행복할 정도로만 주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받는 사람이 그만큼의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도 생각지 않고, 당연히 좋아하겠지라는 오판이라든가 당신 자신의 넘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한껏 쏟아놓고 왜 마찬가지로 그만큼 주지를 않는 거냐고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 건지도 말이다. 그리고서는 외롭다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닌지도. 그 넘치는 사랑을 내 자신에게 먼저 주길 바란다. 그럼 나는 진정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이 될 것이며,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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