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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BP Aug 08. 2021

쓸모 있는 질문, 필요한 대답

비건지향을 지속하기 위해 꼭 정립해둬야 할 가치관


굳이 안정적인 일상을 바꾸면서까지,
비건지향을 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뭐야?


나는 이 질문을 받고 내심 당황했다. 대개는 '비건을 어떤 이유로 하시는 거예요?' '환경 보호를 위해서요.' '아 그렇군요.' 선에서 대화가 마무리되는데, 위와 같은 질문은 던진 친구는 좀 더 근본적인 사유를 알고 싶었던 모양이다. 비건이라는 게 실천도 어렵지만,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일이기 때문에 그에 주저 없이 뛰어들 수 있는 마음이 어디서 출발했으며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인지, 어느 지점에 깊이 동조한 것인지 묻는 것이었다. 이런 질문을 지금까지 받아본 적이 없어서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무엇 때문에 순식간에 비거니즘에 깊숙이 빠져든 걸까? 근본적으로 어떤 가치가 가슴을 두드린 걸까? 모처럼 고민해보게 됐고, 비건지향을 해나가려면 그 무엇보다 제대로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통감했다.

나는 물론 환경 보호를 첫번째 목적에 두고 있지만 모두 잘 알다시피 동물권 보호, 건강 개선, 종교적 신념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른 개념들보다도 더 행위의 반향을 감각하기 어려운 것이 '환경 보호'인데 왜 내가 이 부분에 가장 열렬하냐고 묻는다면, '연쇄작용'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가령 고기를 빈번하게 먹으면, 나와 같은 사람들의 수가 모여 상상할 수 없는 수요를 창출하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 또는 이 수요를 이용해 더 큰 돈을 만지려는 이들에 의해 공장식 축산이 자행된다. 공장식 축산은 녹지를 파괴하고 그 위에 공장을 세우거나 가축들에게 먹일 옥수수와 밀을 생산할 밭으로 탈바꿈하며 이뤄진다. 공기를 정화할 수 있는 나무는 밀려나가고 있는 반면, 차량보다도 탄소 배출량이 높은 소의 수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 가축도 아닌 단지 소 한 종을 축산하는 데에만 사용되는 물이 한국인 일인당 물 사용량의 70배에 가깝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가축들을 살찌울 곡물은 무한대로 생산되고 있지만 정작 기아들에게 전달되는 양은 턱없이 부족하고, 이들을 포함한 약자에게 돌아가는 건 폐기된 가축의 사체와 배설물이 그들의 터전 인근에서 처리되며 야기하는 각종 오염과 질병이다. 다른 연쇄작용도 수없이 많지만 중략하고, 고기를 먹는 것만으로 이렇게 무지막지한 파급력이 생긴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고, 이는 다시 말하면 고기 섭취를 중단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고기를 먹는 인구가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져 있는 상황에서 나 하나의 영향력이 얼마나 되겠나 싶겠지만, 투표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내 한 표가 정치를 한순간에 뒤바꿔놓을 거라고 기대하진 않지만, 이러한 표들이 모여 목소리를 형성하고 중요한 순간에 이르렀을 때는 큰 힘을 발휘하리라고 희망을 품는 것처럼, 우리가 조금씩 비건을 실천하면 뒤엉킨 악순환의 고리가 차츰 풀려갈 것을 나는 믿게 되었다. 아직 실체를 직면하지 못한 사람들 역시 이러한 순환을 알고 나면 마찬가지로 적잖이 충격받고 상당히 공감할 것으로 본다. 다만 여전히 자신이 영위하고 있는 세계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로 느껴져서 선뜻 행동에 나서기 어려울 수 있다. 참혹한 내막과 평온해 보이는 일상의 극심한 온도차를 보고 있자면 형체를 뚜렷이 알아차리기도 어려울 만큼 멀리 있는 누군가가 외친 메아리를 들은 것만 같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처음부터 완전 비건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한 걸음이야 가벼운 마음으로 성큼 내딛지만 대뜸 결승선으로 내달리지는 않는단 얘기다. 나 역시도 처음엔 고기 덩어리를 멀리 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리고 단백질이 궁극적으로 식물에서 추출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운동 전후로 식물성 단백질을 좀 더 충실히 챙겨먹었다. 오랜 시간 운동을 하다 그만두기를 반복했는데, 매번 그만두는 지경에 이른 것은 근육이 잘 붙지 않는다는 느낌에서 흥미가 급속도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번엔 운동을 등록하면서부터 근육이 잘 붙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강사에게 물었던 터였다. 딱히 닭가슴살만 챙겨먹는 극단적인 식단을 원하진 않았고, 마침 식물성 단백질의 위력을 알게 됐으니 시도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효과는 실로 굉장했다. 체력이 늘고 허벅지 근육이 착착 달라붙는 것이 일주일이 다르게 느껴졌다. 심지어 기대하지도 않았던 군살이 빠지고 있었다. 애주가라 술을 끊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생각해보면 과거에는 음식을 마음 편히 즐긴 적이 많지 않다. 언제나 다이어트에 시달려 절제와 폭식을 오갔고 먹을 때마다 끼니마다 살이 찔 것을 염려했다. 게다가 소화불량과 만성변비가 손을 맞잡고 나를 괴롭히니 식사에 한층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채식을 시작한 이래로 나는 더이상 다이어트적인 시각으로 식단을 고민하지 않는다. 마음껏 먹어도 1kg 내외에서 오갈 따름이라 언제나 양껏 먹는다. (이건 내가 고작 덩어리 고기만 멀리 했을 때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섬유질이 많은 식단과 풍성한 식사량, 거기에 규칙적인 운동이 맞물리니 소화와 배변생활도 자연히 원활해졌다. 그야말로 내 몸에도, 다른 생명체에도 죄책감과 스트레스가 없는 행복한 식사생활을 비로소 찾은 셈이다. 충격보다 더 중요한 건 장점의 발견이었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비건에 '반했다'. 나 자신에게도 이토록 이로운 활동이 전 지구를 도울 수 있다고? 확장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내가 비건에 완전히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된 건 책과 강연으로 나눈 수많은 대화들 덕택이었다. 나는 최근 몇 개월 사이에 심리학이나 철학(또는 자기계발), 사회문제 등에 관심이 많아져서 그와 관련한 서적과 강연 영상들을 자주 찾아보고 있었다. 2019년까지 꽤 고단한 시간을 보내온 터라 삶을 개선하고 싶은 의지가 강했고, 운이 좋게도 2020년부터는 상황이 좋아지기 시작해서 이러한 변화의 계기와 연유를 명확히 설명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이렇듯 단지 내 궁금증을 위해 읽고 보던 책과 영상들 속에서 비건의 핵심과 유사한 메시지를 읽어낸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 같이 '연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Connection, Network, 적이 아닌 친구 등 표현하는 단어는 달랐지만 한 사람이 타인과 세상에 주는 영향력이 굉장하므로 나의 마음가짐과 행동의 힘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단지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개개인의 존재 가치를 주지하고, 자신이 하는 행위가 정직하고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세상은 분명 그 힘을 받아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홀로 살아간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고, '우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네 인생이 모두 엮어 있음을 감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일단 각 분야에서 공고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하나의 방향을 향해 외치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내가 사회의 논의에 무관심했다는 말 같아서 다소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의 쓸모를 깨달을 수 있었다. 급진적인 성장과 성공에 주목하는 경쟁사회 속에서 20대 말에 이르기까지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나는 한때 깊은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졌다. 간신히 그늘진 마음에서 헤어나오긴 했지만 여전히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심신이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마지못해 살고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웠다. 마치 YOLO처럼 살고 있었다. 그때 '연대감'은 내가 잘못 설정해놓은 관점을 일깨우고, 그것을 수정함으로써 달라질 수 있는 삶의 방향과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일러줬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둘러싼 존재들을 경쟁상대로 취급했기 때문에 인간관계도, 사회생활도 힘들었을 것이라는 건데 이러한 관점만 바꿔도, 그러니까 이들을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과 같이 배려하고 존중하면 윤활유가 되어 삐걱거리던 상황이 순조로이 흘러갈 것이라는 얘기였다. 가만히 돌아보니 맞는 말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흠잡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 생각해 항상 날을 바짝 세우고 공격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러니 마음도, 관계도, 인생도 자꾸 척박해진 것이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말을 흔하게 하면서도 실은 혼자 살아나가야만 한다고 몰아세웠던 모양이다. 이에 타인을 믿고 이해하려 애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황은 정말이지 조금씩 달라졌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난다 것은 내게 내재된 힘을 실감하게 했다. '가능한 것이었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구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나의 쓸모를 느낄 때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건 남들도 똑같다.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모두 동일하게 공유하는 감정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존재를 하등하게 취급함으로써 삶의 의지를 꺾고 활력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그건 자신 또한 그럴 만한 상황이 되면 언제든 그런 취급을 받겠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나는 진정으로 사람들과,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과 잘 어울려 살고 싶어서 비건을 지속하기로 마음먹었다. 비건의 가장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가치관이 공동체 감각이기 때문에, 다같이 잘 살아보자는 마음이기 때문에 함께하기로 했다.




비건을 혼자만 하면 되지 왜 남들과 같이 하려고 설득해?
그러면 종교 전도랑 다른 게 뭐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혼자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혼자서 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시험을 치고, 여행을 떠나는 행위들처럼 자신의 의지가 팔할이고, 자신의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혼자 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비건이 내포한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뒤틀리고 과잉된 욕구로 상실되고 있는 대자연을 원상복귀시키는 데 있다. 그릇된 시스템을 개선해 더욱 조화롭고 건강한 생활환경을 조성하려는 데 있다. 지금은 수치적으로 너무나 분명하게 조화를 넘어 정복에 이르렀기 때문에, 기울어진 시소에 균형을 맞춰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생명들을 돌보려는 것이다.(실로 이 생명에는 우리 자신도 포함된다. 위생은 현저히 개선된 환경에 살아갈지 모르나, 편리를 핑계로 각종 화학물이 일상 전반에 스며들었고, 자본의 극대화를 위해 질병의 근본적 치료보다는 단기적으로 대처하는 수준의 의료 처방만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질병이 축적되며 나날이 곪고 삐걱거리는 몸뚱이를 힘들여 오래오래 써야만 하는 지경에 놓였다.) 그리고 이 거대한 지구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나 혼자서는 바꿀 수가 없다. 이 지구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각을 모으고 힘을 모아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거너들은 동참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범위 내의 환경운동에는 호의적인 반면 비거니즘에는 난색을 표한다. 플라스틱 사용 줄이기는 조금이라도 동참해보려 의식적으로 행동하지만 채식은 이야기만 나와도 소스라치며 평소 식사시에 고려치도 않았던 영양성분에 대한 걱정을 쏟아낸다. 비건을 환경운동의 일환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터다. 물론 기존에 비건을 해온 분들 중 다수가 동물권 보호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러한 인식이 지배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에 쉽게 공감하기 어렵기 때문에 반감이 앞선다는 것도 이해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맞닥뜨렸을 때 본능적으로 배척하고 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 게다가 앞서 비건문화를 받아들인 해외에서조차 드라마와 영화에서 비거너들을 피곤한 존재인양 표현하곤 했으니 어긋난 인식이 형성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조차 여러 번 돌려본 영화 '노팅힐'에서 소개팅녀로 등장한 비거너가 외관상은 물론 언행으로도 굉장히 마이너한 캐릭터로 그려져 눈살을 찌푸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감히 요청드리건데 비거니즘도 '환경운동'이라는 점을 알아주시길 바란다.

신념을 바탕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비거니즘이 종교와 닮아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때로 비건을 권유하는 것이 종교의 전도와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사실 목적이 다르다는 점에서 앞선 단락이 어느 정도는 질문에 이미 답이 됐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딘지 불편한 구석을 해소하지 못한 누군가를 위해 한마디 덧붙인다면, 비거니즘은 실질적(Practical)이다. 구전되는 것 이외에 뚜렷한 실체를 증명하기 어려운 종교와 달리 비거니즘은 명백한 과학적 수치들을 기반으로 한다. 나날이 늘어가는 인구수, 그에 따라 급증한 자원 소비량과 쓰레기 양, 도로 위 자동차 수,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등. 그리고 이에 대한 원인을 수년간, 수십 개의 전문 기관들이 규명한 연구자료가 비거니즘의 성경이라면 성경일 터다. 다시 말해 비거니즘은 현재 우리가 두발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생태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지금 들이쉬는 공기, 끼니마다 먹는 음식, 우리가 서고 또 걸을 수 있는 땅, 매일의 날씨를 관장하는 하늘, 어떤 생명체에게는 생활터전인 바다에 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당장의 생존을 위협하지 않는 종교와 같은 선상에서 비교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볼 때 비건의 권유는 '전도'가 아니라 사회문제를 인지한 무리가 해결을 위한 '행동을 촉구하는 목소리'다.





한때 대량생산은 우리에게 편리와 풍요를 가져다준 선물이었지만 이제 대량생산은 더 많은 착취에 이르는 길이 되었다. 대량생산이 등장하던 시절에는 필수품들을 걱정 없이 구매할 수 있게 되어 생활이 도리어 안정을 찾았지만 이제 필수품들은 넘쳐나 어떤 물건보다도 싸게 판매되고 있고 때로는 너무 쉽게 소비되고 버려져 쓰레기의 주범이 되기도 한다. 대량생산이 단지 각자의 기호를 충족하는 데에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개성과 차별화로 돈을 만들어 내는 세상이라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생활이 영위될 정도만 소비하고 있는가, 라고 반문해보면 '과하다'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칠 것이다. 실로 우리는 이만큼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다이어트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도 결국은 지나치게 풍요롭기 때문이지 우리가 게을러 살이 쪘기 때문이 아니다.

많은 사회, 과학, 의학 전문가들은 말한다. 무언가를 '더하며' 반창고를 붙이는 시늉을 할 것이 아니라 '줄여야' 하는 것이라고. 지금의 상황에서 줄이기를 한 단어로 얘기하면 '비건'이다. (비건은 채식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건지향인들을 대뜸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볼 것이 아니라, 이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기울여 볼 일이다. 반대로 비건지향인들도 한번쯤은 깊이 고민해보길 바란다, 비거니즘이 갑자기 왜 당신의 인생을 뒤흔든 것인지, 평생의 숙업이 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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