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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BP May 22. 2021

세상에 하나뿐인 김치

푸드 에세이 공모전 제출작, but failed to win

엄마가 어릴 때 뭘 먹였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에서 가장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은 나다. 이건 너무 짜다, 저건 물비린내가 난다, 얘는 또 소화가 잘 안 된다 등 이유도 갖가지다. 그렇다고 편식을 하는 편은 아니다. 못 먹는 식재료가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나는 음식을 두루 즐긴다. 다만 간과 향, 신선도에 민감하다. 엄마와 아빠는 이런 나를 두고 소위 ‘상전’이라 하고 ‘입맛만 고오급이 됐다’며 혀를 끌끌 찬다. 그래도 그 덕에 지인들 사이에서는 ‘예나투어’로 불린다. 박예나만 따라가면 맛은 기본으로 보장된다는 거다.(물론 투어라는 개념에 음식만 포함되는 게 아니듯 이 예민한 성미는 맛을 넘어선 감각들까지 만족시킬 장소로 인도하는 데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덕분에 ‘맛집러’에 국한되지 않은 별명을 얻었다.) 이제는 나도 사람들 손에 이끌려 가보고 싶기도 한 귀찮러가 되었지만, 지난 세월 쌓아놓은 명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전히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내가 외식할 때 단 한 번도 용납하지 못한 음식이 있다. 바로 김치다. 채소가 없으면 고기 한 점도 삼키기 어려워 할 만큼 채소에 진심인 편이지만, 김치만큼은 식당에서 잘 먹지 않는다. 삼삼하다고 말하기엔 깊이가 없고, 간의 문제라고 단정 짓기엔 감칠맛이 떨어진다. 마진 상 중국산 김치가 가장 널리 사용되기 때문이겠지만 한국에서 한국산 김치를 먹기 힘들다는 사실도 서러운데 한국인에게 소울푸드와 같은 음식을 엉성한 맛 때문에 손대지 못한다니 비참하기 그지없다.

우리 집은 세 가족이서 한 해 동안 스무 포기는 너끈히 먹어치울 만큼 김치에 조예가 깊다. 친언니가 함께 살 때는 스물다섯 포기까지도 먹었을 것이다. 엄마는 김치와 밥만 먹어도 좋다며 김장철이면 김장을 하고 남은 양념으로 무친 겉절이로 한 주가 넘도록 식사를 하시는 것은 물론 종종 반찬으로 김치볶음을 해놓는다. 아빠는 타지에 장기간 다녀오면 김치가 담긴 반찬 뚜껑부터 열고 식사를 하신다. 그리고 꼭 곁들이는 말이 “이만큼 개운한 게 없지”다. 나는 외부에서 채우지 못한 김치 할당량을 모두 집에서 채운다. 언뜻 식당에서 먹는 김치들이 허술해 집에서 먹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듯이 들릴 수 있지만 엄연히는 엄마의 김치가 너무 훌륭해서 다른 김치에 엄격해진 것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죽하면 나는 최근에 비건지향을 시작했지만, 영원히 완전 비건은 되지 못할 것을 직감했는데, 그건 바로 엄마의 김치 때문이다. 엄마의 김치 맛만큼은 아무래도 포기할 수가 없다. 그 부분에서만 미안하지만 환경에 빚지겠다. 

그런 엄마를 뛰어넘는 절대적인 존재가 있었다. 엄마의 언니, 이모다. 이모는 그 너그러운 품성만큼 소담한 음식솜씨를 자랑했다. 뭐든 빨리 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엄마의 음식은 짜릿하게 맛있다면, 이모의 음식은 여운이 짙어 두고두고 생각나는 맛이었다. 그래도 대체로 익숙해진 엄마의 음식에 마음이 기울었지만, 김치와 된장은 언제나 이모 쪽이 압도적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나는 이모가 만든 된장은 귀신 같이 알아차렸다. 이번 된장찌개는 유독 전 내가 난다 싶어 숟가락을 내려놓으면, 마침 이모가 보내준 된장이 다 떨어져 엄마가 새로 사온 된장으로 만든 것이었다. 사실 학창시절의 이야기라 나는 또렷이 기억나지는 않고, 단지 맛이 별로면 안 먹고 맛있으면 잘 먹었을 따름이었는데 나중에야 엄마가 그 내막을 알려줬다. 어쩐지 그때마다 엄마가 한숨을 푹 내쉬며 슬쩍 흘기던 것이 기억난다. 김치로 말할 것 같으면 여름날 이모네 집의 너른 베란다 창으로 한껏 내달려오던 시원한 바람이 그대로 그려지는 맛이었다. 새빨간 양념으로 뒤덮여 군침을 자극하는 엄마의 김치와 달리 이모의 김치는 고춧가루가 별처럼 총총히 박힌 가운데 하얀 배추의 살갗이 선홍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을 만큼 맑았다. 엄마는 젓갈로 간을 맞춰 단숨에 입맛을 휘어잡는 김치를 탄생시켰다면, 이모는 물고추를 가득 넣어 씹을 때마다 채수분이 입안을 흠뻑 적시는 듯한 깔끔하고 상쾌한 김치를 만들었다. 나이답지 않게 슴슴한 맛을 좋아하는 나는 당연히 이모의 손맛을 선호했다. 얼큰한 맛이 아빠에게 ‘개운함’이면, 위장과 혈관까지 시원해지는 듯한 기분을 선사한 이모의 김치가 내게는 지상 최대의 ‘개운함’이었다.

이모의 김치를 못 먹은 지는 7~8년 정도 됐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먹을 수 없다. 이모는 4년 전 차가운 겨울날 세상을 등지셨다. 떠나시기 2년 전부터 이모는 김치나 된장을 담기 어려울 만큼 손이 퉁퉁 부었다. 마지막으로 이모를 보러갔을 때, 집에서 밥을 먹는 것은 고사하고 같이 걸어 나가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다는 것만도 지금 떠올려보면 참 감사한 일이었다. 이모는 애써 된장을 담가보려 했던 모양인데, 제대로 관리되지 못한 장은 쿰쿰하게 삭아가고 있었다. 엄마는 되다만 장을 다 버리고 장독대를 싹 씻어냈다. 귀중한 것일수록 영원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이때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 나는 엄마가 김장을 할 때 옆에 꼭 붙어서 돕고 배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또 다른 김치를 잃고 싶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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