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노벨문학상 수장자, 유진 오닐
사후 25년 동안 발표하지 말라고 했으나 세 번째 아내가 유언을 어기며 3년 만에 세상에 알려지게 된 유진 오닐의 희극 <밤으로의 긴 여로>
밝히지 말라고 했던 이유는 참담한 이 희극은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일랜드계 이민자 출신으로 연극배우가 되어 성공하지만, 돈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아버지와 약물 중독자 어머니, 술과 유흥에 빠져 살다가 알코올 중독으로 죽은 형까지 유진 오닐의 가족사는 그야말로 어둠이었다. 결혼한 후 집필한 <지평선 너머>가 흥행을 하여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도 길고 짧은 단막극들은 발표할 때마다 히트를 치는 등 작가로서 탄탄대로를 걸었던 그였지만 가족들에게 받은 유년 시절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옭아맸다.
그리고 결국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 내려가기로 한다. 그렇게 쓰인 <밤으로의 긴 여로>는 헌사에 “내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극”이라고 표현한 부분에서 알 수 있듯 그만큼 사적이고 아픈 이야기이다.
동이 틀 때부터 질 때까지 하루 동안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시간 순대로 보여준다. 처음에는 별 문제없어 보이지만 가족들의 말 곳곳에서 드러나는 갈등 양상과 그로 인해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 막히게 한다. 이런 엉망인 가족이 어디 있어 싶다가도 또 한 명 한 명의 입장을 들여다보면 이해 못할 것이 없고 저마다 다른 결핍과 아픔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중 공통으로 드러나는 건 ‘자기 연민’이다.
내 말 좀 들어달라고, 나를 좀 이해해주고 사랑을 달라며 각자 다른 화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 방식이 아버지는 화를 내는 것으로, 어머니는 울면서 행복했던 소녀 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로, 형은 유흥에 빠져 삐딱해지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넷 중 누구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이 숨 막히는 전개는 계속 이어진다.
그래서 이 가정의 문제는 뭘까. 왜 톱니바퀴 굴러가듯이 맞물리지 않는 서로에 대한 질타와 원망이 반복되고 있으며 그 순환의 고리는 끊어낼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이 책을 보면서 각각의 인물이 가진 문제점과 해결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앞으로 가정을 꾸려나가게 되면 이와 같은 불행한 가정의 모습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반면교사로 삼고자 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물어보기도 하고 유사한 예시도 찾아보며 ‘누군 잘했고 누군 못했다’ 식의 결론을 내리기도 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 책을 집필할 당시 유진 오늘은 항시 눈이 빨갛게 부어있었고 십 년은 늙은 모습처럼 보였다는 아내의 후일담에서 그렇게까지 힘들게 가정사를 써 내려간 유진 오닐에게 나의 평가가 모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가정의 진짜 모습은 오로지 그들만 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들에서 배울 점만 배우리라 생각했다.
형식적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함께 겪어야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제삼자에게 설명하기 어렵다. 그 어려운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내 감정을 합리화시키고 변호할 때가 종종 있는데 그들은 나의 말만 듣고 조언과 격려를 해주지만 가끔 그런 행동들이 어리석게 느껴지고 후회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행동에서 나도 몰랐던 내 기저 심리와 종종 마주치곤 한다. 결핍이나 과잉 감정 같은 것들 말이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철들 나이가 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경험이 계속 덧대어지면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보는 시각이 더욱 뚜렷해진다.
그렇게 살면서 겪는 많은 인간관계와 무수한 감정들과 싸움에서 얻는 교훈과 반성이 없다면 주체적인 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없고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의 폭도 좁아지리라 생각하는 나는 문학책들을 볼 때 주인공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으로 간접경험을 할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런 면에서 볼 때 <밤으로의 긴 여로>는 내 가치관과 맞아떨어졌다.
또한, 내 삶의 근원이 되는 것은 ‘가족’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됐고, 훗날 꾸려나갈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실제로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생각하게 됐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먼저 정확히 파악하고 나의 가치관과 맞지 않은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ex. 술꾼은 술꾼을 만날 때 가장 이상적이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의 역할을 강조하기보다 각각의 사람으로 보고 이해하며 공감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도 누군가에게는 딸이었고, 아들이었을 테니까.
원제는 ‘Long Day’s Journey into Night’
대부분의 책은 제목과 내용이 상관관계가 있고 없어도 전혀 없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이 책은 다 읽고 나서도 모르겠다. 결국 문장이 가진 의미를 살펴보게 됐다. ‘Long Day’, ‘ Journey ’, ‘Night’로 이루어진 제목에서 밝고 긍정적인 느낌의 ‘ Journey ’와 사람에 따라 중의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Night’가 엮인 부분이 눈에 띄었고 그냥 ‘Night’도 아닌 ‘into Night’라 표현된 부분에서 단순하지 않은 , 혹은 무언가가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이전의 몇몇 후기 작품들은 프로이트적인 해석 형식을 띠고 있고 어머니, 아버지, 형제와 화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강조했던 것으로 볼 때 제목의 온전한 해석은 밤으로 치닫는 가정의 파국이 아닌, 정말 ‘Journey’를 뜻하는 것이었겠다는 생각을 한다. 유진 오닐이 원했던 곳. 조용한 휴식과 안녕이 있는 밤으로의 ‘Journey’ 말이다. 그러나 결국은 열린 결말. 유진 오닐이 죽고 나서 발표됐고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저마다 가지는 해석이 가지각색일 것 같다.
자전적 희곡을 쓴 작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많은 작품은 감성적인 깊이가 있고 독창적인 기교와 신선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가정은 불우했지만, 퓰리처상과 노벨문학상 등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작품들은 그의 삶 속에서 나왔다. 그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것들이 결국 그를 최고의 극작가로 키워낸 것이었다.
이 책 속의 어머니인 메리의 입을 빌려 “운명이 저렇게 만든 거지 저 아이 탓은 아닐 거야. 사람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지.”라고 말하는 걸 보면 어찌 보면 ‘운명론자’ 혹은 '정신 승리자'처럼 보인다. 그렇게까지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삶이 힘들기도 했을 테니 말이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각 다르다”라고 했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보게 된 <밤으로의 긴 여로>를 통해 유명한 작가의 불행한 가정사를 또 하나 알게 됐다. 유진 오닐과 우리는 132년이라는 긴 간극이 있지만, 인물들의 세세한 감정표현 방법을 보며 시간이 지나도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불행과 행복 모두 운명론이 아닌 스스로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은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