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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Dec 21. 2023

눈부신 사하라 마을과 론다의 헤밍웨이 길을 걸으며...

마이웨이 엄마와 꼴통 딸의 스페인 여행 11

일일 여행 가이드는 제시간에 딱 맞춰서 왔다. 가이드는 스페인에 유학 왔다가 졸업하고 스페인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분으로 현지인 여자 친구와 함께였다. 스페인에서 여행 가이드를 하기 위해선 현지 가이드의 동행이 필요한 곳들이 있다. 


오늘 함께 떠날 일행은 총 6명으로 커플 한 쌍에 홀로 오신 2분과 우리였다. 일일 투어는 처음이라 어떤 분위기일까 했는데 투어 일행마다 분위기가 다르겠지만 우리는 전혀 통성명도 하지 않고 반나절을 함께 보냈다. 그래도 커플 제외하고 4명은 함께 식사도 하고 같이 다녔는데 이름조차 서로 묻지 않았네. 


여행에서 만나는 건 이래서 좋은 것 같다. 나이도, 심지어 이름도 안 궁금하고, 어디서 뭘 하는지도 전혀 궁금하지 않다. 그저 함께 같은 곳을 여행하고 또다시 각자 갈길로 헤어지는 것. 그렇게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 진정한 의미의 여행 디아스포라 아닌가.

날씨가 정말 좋았다. 청명하고 맑은 날씨. 하지만 햇빛은 선글라스 없으면 눈이 부실 정도다. 가이드의 운전 실력이 뛰어나서 미안하지만 풍경은 구경도 못하고 내내 자기만 했다. 이런저런 얘기도 많이 해줬는데 나는 의식이 흐릿해서 기억에 없다. 하하.


엄마와 단둘이 떠났다면 론다만 갔겠지만 투어는 사하라 마을에도 들러준다. 사하라 마을은 최근에 한국 관광객들이 일일 투어로 많이 찾게 된 곳이다. 그도 그럴 게 이런 투어 아니면 대중교통으로 오기 힘들다. 

마을 전경을 구경하기 위해 올라가다 만난 아몬드 나무. 고흐의 '아몬드 나무'를 좋아하는데 '이 나무가 그 나무여?!' 내적 친밀감에 유독 오랫동안 보다가 올라갔다.

마을 전경도 눈에 담고 가이드 분이 돌아가면서 사진도 한 장, 한 장 정성 들여 찍어준다. 우리는 일행이 몇 명 없어서 여유롭게 구경하고 찍었다. 근데 사실 나는 인증 사진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엄마가 아니었다면 찍지도 않았을 것 같다. 남이 찍어줄 때마다 어색한 나의 입꼬리와 포즈. 

사하라 호수를 바라보면서 가이드 분과 기후 변화로 인한 가뭄에 대해서 토론 아닌 토론도 했다.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서 이제는 무덤덤해졌는데 막상 가서 보니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 마을에도 가뭄 때문에 사하라 호수의 수위가 많이 낮아졌고 물 부족에 물 사용 시간도 제한된다고 들었던 것 같다. 예전 호수의 수위는 사진 속 구릉의 풀이 안나는 퇴적층까지 올라가 있던 게 저만큼 낮아진 거였다. 실제 가서 보면 상황은 더 심각해 보인다.  

마을은 조용하고 고요했다. 관광객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토록 한적하고 예쁜 마을이라니. 평일이 아닌 주말엔 사람이 꽤 많다고 했다. 관광객들이 라이딩을 하다가 들러 음식을 먹고 쉬었다 간다고 했다.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관광업에 종사하거나 은퇴한 사람들이 많았고 연금으로 여유롭게 생활하는 게 부럽기도 했다. 

가이드는 이곳에 자주 오다 보니 마을 사람들과 모두 아는 듯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눴다. 이 나무 이름이 뭐였더라. 키가 엄청 커서 사진에도 안 담길 정도로 근사해서 찍었는데 이름을 들었는데 잊어버렸다. 이래서 일기를 안 쓰면, 여행 다녀와서 빠르게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벌써 스페인 다녀온 게 전생 같아져서 다 잊어버렸다. 


평소 기억력이 나빠 기록에 대한 강박증이 있는 편인데 좀 심하긴 하다. 다른 가족들은 전부 기억하는 옛날 일들도 나는 전부 다 잊어버렸다. 어린 시절 일들도 스냅사진처럼 몇 장만 기억에 있고 다른 일들은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쩌면 내 대책 없는 낙천주의도 망각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다.  

사하라 마을은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딱 일주일 정도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내면 좋을 곳이었다.

스페인에서 가장 예쁜 마을 중 하나라는 표지판이 걸려있다. 

워낙 고지대에 있어서 어딜 가든 위에서 바라보는 근사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하얀색의 벽과 적갈색의 지붕이 모두 동일하다.


사하라 마을에선 특별히 할 게 없어서 주스와 차 한잔씩 마시고 나왔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론다. 차에서 내리니 기온 차이가 확 느껴진다. 세비야는 그렇게 덥더니 론다는 딱 좋다. 론다에서 살고 싶다! 내린 순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래서 헤밍웨이가 그토록 사랑했구나. 후훗.

가이드가 차를 대는 동안 바로 앞 공원에서 쉬었다. 와, 공원이 대리석 바닥으로 되어 있는데 완전 직진으로 뻥 뚫려 있어서 전경이 탁 트였다. 유럽에 오면 항상 부러운 게 공원이라 어쩔 수 없다. 동네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는 평화로운 분위기도 좋았다. 

아직 투우 경기장은 가보기 전이었지만 공원에서 먼저 만난 전설의 투우사 '페드로 로메로'의 동상. 론다는 거의 페드로 로메로와 헤밍웨이가 먹여 살리는 거 아닌가 싶다. 식당 이름도 이 투우사의 이름을 딴 곳이 바로 앞에 있을 정도였다. 

투우장은 걸어서 갈 수 있고 투우 경기는 현재 하고 있지 않다. 론다는 투우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고 이곳은 가장 오래된 투우 경기장이다. 대부분 들어가지 않고 겉에서 사진만 찍고 가는 코스다. 투우사들이 돈도 많이 벌기도 했지만 예전엔 거의 국민 영웅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도 나는 투우 경기는 보고 싶지 않다.   

설명을 들으며 쭉 가다 보면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비롯한 여러 유명인들의 흉상이 걸려 있다. 모두 론다를 사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들로 일본 작가도 있던데 그 옛날 먼 동양에서 이곳까지 와서 정착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헤밍웨이 길로 알려진 이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전망대가 나온다. 론다에 와보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기암절벽으로 지어진 론다 누에보 다리를 보고 싶었던 것인데, 누에보 다리가 아니더라도 어디를 둘러봐도 대단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절벽 가까이 지은 호텔이나 레스토랑은 가격은 더 비싼데 가격에 비해 맛과 퀄리티는 보장하지 않는다. 사실 론다에 오려고 했을 때, 누에보 다리 전망의 그 유명한 파라도르 호텔에 묵고 싶단 생각도 들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야경 때문이 아니라면 굳이 묵을 정도는 아니었다. 

 

일행 중 한 명은 론다에서 묵을 계획이라 이곳에서 헤어졌는데 슬로 힐링 여행이라면 오히려 사람이 없는 야간에 한적하지 않을까 싶다. 낮의 론다는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누에보 다리에는 약간 과장해서 사람들로 바글바글 거린다. 

전망대의 이 무대는 공연을 하는 곳으로 플라멩고 같은 공연도 한다. 물론 시청의 허락이 필요하고 불법으로 공연하다 적발되면 벌금을 문다고 했다. 지금 보니 바이올린 연주자가 공연을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 같네. 사과를 먹고 있는 여자분이 연주자인가? 사진 정리하다가 지금에야 봤다.  

어쩐지 명동 남산도 생각나는 자물쇠와 낙서들. 자물쇠 위에 저건 사람 이름 아닌가? 훈과 안토니오라니..., 동성 커플이었나? 동양인과 서양인 커플이었나? 남산도 아니고 론다의 전망대 위에 묶어둔 사랑이라니.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길...(네, N의 망상은 끝이 없습니다.)

요렇게 헤밍웨이가 산책하는 길이라는 걸 알려주는 표지판도 있다. 론다는 헤밍웨이가 말년을 보내며 사랑했던 마을이라는데, 누구라도 이런 길을 산책하고 누에보 다리가 보이는 호텔에서 투숙하며 소설을 구상하면 뭐라도 써내지 않을까 싶다. 


지중해성 기후로 연중 온화한 날씨인 론다 같은 곳에서 일 년 정도 보내면 나도 헤밍웨이 같은 작가가 될 순... 없겠지, 없는데 적어도 몸과 마음은 조금은 건강해지지 않을까. 


*ps-

올해가 가기 전에 스페인 여행기를 끝내길 바라며...

론다 얘기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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