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웨이 엄마와 꼴통 딸의 스페인 여행 12
전망대를 쭉 걸어서 오면 우리가 방금 전 있던 곳이 맞은편에서 잘 보인다. 이렇게 보니까 아찔하다. 인간은 대단한 거 같다. 어떻게 절벽 위를 끊임없이 깎고 다듬어서 지을까. 건축이란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인간 욕망의 가장 첨예한 꼭대기에 있는 게 아닐까.
론다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누에보 다리. 와서 보니까 헉 소리가 난다. 그 규모가 압도적이라 그냥 입을 쩍 벌리고 볼 수밖에 없다. 누에보 다리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나누는 120m 깊이의 엘 타호 협곡에 놓인 다리로 한가운데 과달레빈강이 흘러야 맞지만 보다시피 가뭄이 심해서 강이 바싹 말라있다.
40년간의 공사를 거쳐 1793년에 완성되었지만 무너져내려 90여 명의 사람들이 사망한 후 다시 40년에 걸쳐 재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리 중앙 아치형 위에 창문이 보이는데 이 방은 감옥부터 바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예전에 감옥과 고문 장소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다리에 관한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다리 맞은편으로 보이는 엘 타호 협곡이다. 협곡을 따라 구불구불 산책로도 보인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자연경관에 눈을 뗄 수가 없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직접 가서 봐야 얼마나 크고 경이로운 지 알 수 있다.
누에보 다리를 보는 전망대 포인트가 몇 군데 있는데 다리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금지라 가이드 따라서 몇 군데 옮겨 다니며 봤다. 역시 가이드 투어에 빼놓을 수 없는 인증샷도 찍고 이날 내내 사진 찍느라 입술에 경련이 난 것 같다.
누에보 다리는 밤에 봐도 예쁘다고 한다. 여기서 묵고 가는 일행이 부럽기도 했지만 론다에서 누에보 다리 야경 말고는 딱히 할 게 없어 보여 굳이 묵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든 다리 구경을 실컷 하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점심을 이곳에서 먹고 가기로 했다. 투어 하면 관광지부터 맛집 리스트까지 쫙 뽑아 주는데 그게 쏠쏠했다. 론다 맛집도 몇 군데 뽑아 줬는데 투어 일행 모두 한 곳을 선택해서 모두 같은 식당에서 식사하게 되었다. 가이드가 주문하는 것도 도와주고 가서 수월하게 먹을 수 있었다.
우리가 간 곳은 '푸에르타 그란데'로 이미 한국 사람들에겐 꽤 유명한 레스토랑이다. 분위기는 정통 유럽식 레스토랑 같다. 식탁보 깔려 있고 일하는 분들이 모두 정겹고 친절하다.
음료는 역시 띤또 데 베라노. 오랜만에 사진으로 보니까 또 마시고 싶다. 이 레스토랑의 직원 분이 유독 장난끼가 많아서 나랑 장난도 치고 주먹 인사도 하고 그랬다. 우리 말고도 한국인들 밖에 없어서 둘러보니 여기가 한국 식당인지 스페인 식당인지 모를 정도였다.
맛있다고 추천해 준 '가지 튀김' 진짜 맛있다. 바삭바삭 식감이 예술이다. 마치 과자 먹는 것 같다. 솔직히 나 혼자 다 먹어도 될 거 같다.
론다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는 소꼬리 찜이다. 다른 건 모르겠고 고기가 굉장히 부드럽다. 하다 하다 소꼬리도 먹는구나. 꼬리에 이렇게 살이 많나? 이 레스토랑 자체가 맛과 서비스 모두 한국 친화적이라 한국인들 입맛에 딱 좋을 정도로 해준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전반적으로 맛있게 먹었다.
드디어 먹어 본 빠에야. 그중에서 우리가 먹은 건 먹물 빠에야다. 입술과 입안이 새까맣게 변하는 것 말고는 맛있었다. 생각보다 짜지 않았는데 아마 여기가 한국인들이 워낙 많이 오는 곳이라 알아서 조절해 주는 것 같았다. 왜냐면 다음에 다른 곳에 가서 먹은 빠에야는 이곳보다 훨씬 짰거든.
가이드와는 맥도널드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시간이 남아서 일행들과 디저트로 추로스 먹으러 갔다. 이곳 추로스 집도 론다에서 유명한 곳인데 일행들만 따라가서 어딘지 이름은 잊어버렸다.
우리는 야외 테이블에서 먹었다. 한 번쯤 노천카페에서 먹고 싶었는데 여기서 해보네. 다만 카페에서 현금 밖에 안 받아서 좀 전의 레스토랑에서 남은 현금을 탈탈 털어 냈던 나는 낭패였다.(스페인에서 유일하게 현금받는 곳은 여기뿐이다. 대부분은 카드 사용이다.) 고맙게도 일행 중 오늘 여기서 묵는 분이 선뜻 현금으로 우리 것까지 내주셨다. 계좌번호나 연락처를 물으니 얼마 되지 않는다고 손사래를 쳐서 어쩔 수 없이 감사히 먹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아직 여행 일정이 많이 남았고 계산하면서 쓰는 여행자 신분에 쉽지 않은 일이라 너무 고마웠다. 덕분에 노천카페에서 추로스 먹으면서 처음으로 이런저런 서로의 얘기들을 할 수 있었다.
추로스를 처음 먹었다면 이곳 추로스와 초콜릿도 맛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세비야에서 먹은 '엘 코메르시오' 추로스와 진한 초콜릿 라떼와는 솔직히 비교할 수 없다.(이건 절대적으로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론다 투어는 오후 6시면 끝나는 일정으로 세비야에 다시 도착했을 땐 6시가 채 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해본 현지 일일투어였는데 굉장히 만족하고 돌아왔다. 역시 세비야에 다시 오니 덥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 후 쉬다가 숙소 근처에 있는 ATM기를 찾아 나가보기로 했다. 현지에서 현금을 뽑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론다에서 남아 있던 현금을 다 쓴 터라 비상금으로 얼마 더 뽑기로 했다.
그동안 해가 지고 나서 나올 일은 거의 없어서 몰랐는데 밤이 되니 전혀 다른 분위기라 깜짝 놀랐다. 금요일 밤이라 더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잘 차려 입은 젊은 애들이 엄청 많이 나와 있었다. 대성당 근처에 삼삼오오 모여 파티 분위기라 평일에도 이런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더운 낮을 피해 밤에 노는 문화인 거 같았다.
하긴 여긴 저녁 식사도 밤 10시에 먹는 사람들이라 우리가 너무 일찍 들어오는 거지. 엄마랑 가서 한 가지 아쉬웠던 건 밤 문화를 전혀 즐기지 못했다는 것. 나 혼자 갔어도 늦은 밤까지 다니지 않았겠지만 타파스 문화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온 건 아쉽다.
현금 뽑으러 나갔다가 덩달아 분위기에 취해 들어와서 우리도 세비야에서의 마지막 밤을 불태워 보기로 했다. 따로 저녁 식사를 먹진 않았지만 배가 불러서 대신 호텔 루프트 바에 올라갔다. 호텔 잉글라테라에서 보는 대성당 야경이 멋지다는 후기를 봐서 기대가 됐다.
와! 이건 진짜 눈으로 담아야 한다. 내 사진 실력으로는 무리. 훨씬 가깝게 잘 보인다. 론다는 누에보 다리라면, 역시 세비야는 대성당이 먹여 살리는구나. 밤에 보는 대성당은 근사했다.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처럼 황홀했다.
불금이라 젊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른 시간이라 자리가 꽤 남아 있었다. 우리 자리는 요기. 대성당이 한눈에 잘 보이는 명당자리였다. 조명과 무드가 근사해서 데이트 장소로도 좋을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한국 사람은 우리뿐인 데다 나이 든 사람도 우리 밖에 없다. 하하. 심지어 샤워 후 맨 얼굴에 머리조차 안 해서 그야말로 호텔 루프트 바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엄마와 딸. 그 잡채...
내가 마지막 밤이라고 대성당 야경은 꼭 봐야 한다고 해서 데리고 왔지만 엄마는 이미 눈이 풀려 있다. 이날 찍은 엄마 사진 올리고 싶은데 참겠다. 볼 때마다 빵 터진다. 이 꼴을 하고 여길 왔구나 싶어서.
엄마는 띤또 데 베라노, 나는 샹그리아. 호텔 샹그리아는 뭘 많이 넣어주더라. 두 잔해서 약 14유로.
확실히 알코올 맛이 많이 나서 술에 취하는 느낌이라 다 마시지도 못했다. 같이 주는 젤리가 맛있더라.
바로 옆에 인형처럼 예쁜 여자애들이 앉아서 셀카를 얼마나 많이 찍어대는지... 그래, 그 얼굴로 예쁘게 입고 나왔으니, 나 같아도 100장은 찍겠다. 뭐랄까, SNS로 글로벌 대통합이 된 후에는 한국이든, 유럽 한복판이든 젊은애들 살아가는 건 다 똑같아진 것 같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옆 테이블에 앉은 젊은 남녀의 후끈한 분위기와 점점 샹그리아에 취해서...
우리도 마침내 신나는 불금을 즐겼다. 야호!
마음 같아선 더 있고 싶었으나 엄마가 거의 반수면 상태라 어쩔 수 없이 내려왔다.
그리고 느낀 건데 노는 건 다 한때야.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