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주의보인데 마음이 답답해서 쌓인 눈을 한참 밟다가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돌아왔다. 한 해가 다 가는데 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뒤돌아 보니 똑같은 트리거에 발작하고, 참을성이 조금도 없을뿐더러,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도 못해서 후회로 점철된 삶이었다.
반면에 정작 움직여야 할 때는 코끼리가 퍼질러 싸놓은 똥에 엉덩이 박고 앉아 있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아서 나조차도 내가 어이가 없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인간 실격'의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란 문장이 바로 2023년의 내 삶이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는 부고 전문 기자가 쓴 글이다. 가족의 부고부터 자신의 부고를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굳이 유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자신의 인생이 이야기가 되는지 보여주는 글이랄까. 예전부터 엄마에 대한 글이나 내 인생에 대한 얘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서 읽고 있다.
나는 유명인도 아니고 가정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내 부고를 쓴다고 해도 읽어 줄 자녀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죽기 전 뭔가 나에 대한 흔적을 남겨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내 삶의 첫 문장을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로 쓰고 싶어졌다. 다자이 오사무가 표절 시비를 걸어도 소용없다. 나는 시비가 붙을 만큼 유명하지도 않으니까.
2023년은 나한테는 유독 부침이 심한 한 해였다. 이래저래 세 번의 이별을 해야 했다.
첫 번째는 잘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져 희망퇴직자로 나오게 되었다. 주옥같은 회사 이야기에 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회사에서 꽃다발도 받았고, 울어 준 직원도 있어서 마음이 대게 묘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인가. 하지만 이곳을 나가 꽃길만 걸으라는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길고 길었던 반 백수 프리랜서 생활을 끝내고 마음을 다잡고 들어간 곳이라 오랫동안 다닐 생각이었지만 일장춘몽처럼 끝났다. 한 여름에 그만뒀는데 벌써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한 겨울이 되었다.
두 번째는 교회를 옮기게 되었다. 내 삶에 있어 두 번째 교회였다. 첫 번째 교회가 기본기를 닦았다면 이곳에선 자유함과 절차를 배웠다. '자유'란 말과 '절차'란 말이 모순적이지만 사실이다. 교회 옮기는 게 단순히 내 맘대로 안 나가면 그만이 아니라 절차에 따라 순서를 지켜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줬다. 진정한 디아스포라 말이다.
한국 교회 전부가 그렇진 않지만 대게 자기 교회 아니면 안 되고, 자기 목사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렇게 사람과의 관계가 끈끈해지고, 유대가 깊어지면 정작 신과 나와의 믿음은 약해지고 중간에 '사람'이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교회 옮길 때는 솔직하지 못하다.
어느 교회든 자신과 맞지 않다면 '상의' 하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대부분 '상의'라는 절차를 건너뛸 텐데 나 같은 경우에는 목사님과 상의 하에 올해 10월 말, 추수 감사절을 끝으로 교회를 나왔다. 모두의 환송과 커다란 꽃바구니와 함께였다. 10년이 넘도록 다닌 교회여서 눈물을 쏟긴 했지만 이별이 아름다울 수 있구나를 알게 해 줘서 고마운 기억으로 남았다.
세 번째는 눈으로 보이는 이별은 아니나, 5년 넘게 유지한 사업자를 올해 말로 폐업하기로 결정했다. 변변치 않은 영업 실력으로 고작 전 직장에서 알음알음 건네주는 일만 받아서 했던 사업자였지만 그래도 지난 5년 넘게 그걸로 먹고살 수 있었다. 사실 더 유지하면서 일을 받아서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디자인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커졌다. 이건 자의 반, 타의 반인데 이미 내 연차로 현장에서 실무진으로 일하기는 버겁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AI 인공지능이 올해 엄청난 발전 속도를 보이면서 사실상 어도비 프로그램에서도 AI 기능이 대폭 업그레이드되었다.
이젠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꽤 그럴듯한 디자인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펜툴로 하나하나 누끼 땄던 내 시대는 가고, 클릭 한 번이면 배경이 사라지고 다른 배경으로 합성도 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물론, 배움의 길은 끝이 없으니 신 기술을 익히면 되겠지만 이젠 기술력보다는 사고력이 필요한 시대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나로선 20년이 넘게 해온 이 일을 그만 놔줄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아직 40:60 정도의 생각으로 이러다가 다시 디자인 일 한다고 다른 곳에 들어갈 수도 있다.(배운 게 도둑질 아닌가...뭐해 먹고 살;;;) 나는 아직 뭘로 환생할지 정하지 못하고 정처 없이 바르도 공간에서 떠도는 한낱 미생에 불과하다.
이렇게 해서 2023년을 보내며 세 번의 이별을 했다.
이별은 아름다워야 한다. 그리고 뒤도 돌아봐선 안 된다. 그래야 기억에 더 많이 남고 나중에 추억할 수 있다.
2023, 아름답게 굿바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질척거리는 내 마음 때문이야. 아름답게 끝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