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을 앓았던 엄마가 수술 후 3년째 되던 추적 검사를 하고 결과를 들으러 가던 날. 세브란스로 향하던 차 안에서 엄마는 갑작스레 나에게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아들, 엄마 오늘 결과 좋으면 너랑 XX(동생)랑 시간 될 때 같이 여행 가고 싶어."
퉁명스러운 경상도 출신 아들은 그때까지도 엄마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툴툴대며 대답했다.
"아 엄마 맨날 어디 가면 제대로 구경도 안 하고 중간에 힘들다고 집에 가잔 말만 하잖아. 나나 XX나 요즘 엄청 바쁜 거 알면서 그래. 아직 완치 판정난 것도 아닌데... 일단 집 가면 다시 이야기해." (※유방암은 5년의 추적 검사 기간을 요한다.)
평소에 이렇게 이야기하면 자기주장보단 자식들 이야기에 "그래, 알겠어" 하고 마는 엄마가 그날은 이상하게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뷰티 인사이드' 스틸 컷
"엄마가 한창 항암 치료하면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언제였더라... 그때 누워서 병실에서 옆에 아줌마랑 TV 보면서 수다 떨고 있었거든. OCN인가 어디서 '뷰티 인사이드(2015)' 영화를 해서 봤는데, 그 영화 마지막에 걔 남자애 어디 해외로 나가서 살잖아. 그거 보는데 거기는 사람들 눈 신경도 안 쓰고 되게 자유롭게 좋아 보이대. 프라하라고 하던데 엄마 죽기 전에 동유럽 꼭 한번 가보고 싶다. 너나 XX이나 회사 적응하고, 엄마 옆에 다니고 하느라 바빠서 정신없었던 거 아니까 엄마가 말 안 했는데. 요새도 많이 바쁘나. 아들 어떻게 안되나?"
"아니 뭐 재수 없게 죽는다는 이야기를 해. 엄마 요새 건강하기만 하거든? 알았어, 집 가서 XX랑 이야기해볼게."
다시 한번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고만 나였지만, 검사 결과를 들으러 들어간 엄마를 기다리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엄마는 적지 않은 돈을 쓰는 어떤 행위를 저렇게 요청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행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저렇게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있었고, 그걸 몇 년 간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게다가 프라하를 가보고 싶다는 이유가 사람들 눈치 안 보고 자유로워 보여서 좋다고 하니, 항암 치료 당시 머리도 빠지고 갑자기 사람이 늙게 되어 외모적인 부분에서 크게 스트레스를 받아 주변 사람 만나기를 꺼려했던 엄마가 다시 생각나 혼자 병원 화장실에서 꺽꺽 소리를 내며 울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우리 세 가족이 표현에 있어 서로 엄청 살갑게 대하는 가족은 아니었어도, 서로 원하는 바는 이야기하고 들어주려고 하는 화목한 가족으로 똘똘 잘 뭉쳐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날 내 무심함에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렇게 업무를 좀 정리하고, 엄마가 이야기를 꺼낸 지 두 달 만에 우리 세 가족이 동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엄마와 함께 가는 첫 번째 유럽 여행이라 준비에 있어 정말 고민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엄마와 동생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다닐 자신이 없어 패키지여행을 알아봤었는데, 또 패키지여행은 일정들이 너무 타이트해 엄마 체력으로는 따라가기가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시 자유여행으로 내가 좀 고생하는 방향으로 준비를 했다. 여태 여행을 다닐 때 내 생각만 하면서 여러 일정들을 짰던 것과 다르게 처음 누군가를 고려하면서 여행 준비를 하는 것은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혼자일 때야 어떤 문제 상황이 닥치면 그때그때 융통성을 발휘해서 해결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100% 컨디션도 아닌 엄마를 생각하면 최대한 여행에서 발생하는 여러 급작스러운 문제들이 생기지 않길 바랬기 때문이다.
프라하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엄마에게 처음으로 내 취미(영화 로케이션 여행)를 이야기했던 것 같다. 영화와 여행을 모두 좋아하는 아들은 어떤 여행을 떠날 때 항상 여행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 여행지가 잘 나오는 영화들을 미리 준비해 보면서 간다고. 그리고 엄마에게 보여줬던 영화가 바로 '미션 임파서블(1996)'이었다. 그때 엄마에게 들었던 이야기도 불효자 아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
"맞네! 엄마 이거 아빠랑 니 초등학생 때 학교 보내고 극장 가서 봤었는데. 그때만 해도 참 엄마도 영화 좋아해서 너 아빠 졸라서 대구에 새로 하는 영화 막 보러 다니고 그랬는데."
나는 엄마가 영화를 좋아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동생이나 내가 가끔 엄마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면, 돈 아깝다거나 시간이 아깝다며 같이 밥 먹거나 산책이나 하자고 했던 우리 엄마가 영화가 좋아서 개봉관을 찾아다니며 보던 젊은 날이 있었다니. 너무나 당연하게도 아버지 돌아가시고 자식들 키우면서 엄마가 좋아하는 취미는 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쓰고, 볼링도 열심히 다니는 외향적이고 활발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희생'이라는 이 진부하고 신파적인 이야기가 막상 내 이야기가 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감정들은 차마 글로 다 형용하기 어렵다.
'미션 임파서블' 스틸 컷
무사히 도착한 프라하에서 5박 7일의 짧았던 우리 가족의 첫 여행은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비행기에서 동생과 했던 다짐은 이번 여행에서 만큼은 '엄마의 소감을 많이 묻고, 많이 듣고, 짜증 내지 않기'였고, 다행히 여행 내내 그 3가지는 지킬 수 있었다. 엄마와 카를교를 걸으며 '뷰티 인사이드'의 한효주 너무 예쁘지 않았냐며 나랑 한 살 차이인데 어울릴 것 같지 않냐'는 말도 되지 않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온 가족이 같이 웃었다. 또 프라하 구시가지를 걸으며 저 위치쯤에서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톰 크루즈)과 사라(크리스틴 스콧 토머스)가 키스하는 척했던 곳이라며 설명을 해줬다. 엄마가 처음 '미션 임파서블'을 봤던 때 몇 살이었냐는 동생의 물음에 엄마의 대답도 잊을 수가 없다.
"오빠 초등학교 1~2학년 때니까 엄마 31살인가 32살인가 그랬을걸? 톰 크루즈가 엄마보다 나이 몇 살 더 많은데, 톰 크루즈는 아직도 저렇게 젊게 살고 액션도 잘하는데 엄마 봐. 엄마 이제 늙어서 할머니 다됐다. 옛날에 엄마가 톰 크루즈 잘생겼다고 했다가 너 아빠랑 싸울뻔했는데"라고 대답하며 웃던 엄마.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그때의 엄마는 영화도 좋아하고 나처럼 이렇게 여행도 다녀보고 싶었을 텐데...' 이미 늦어버렸지만, 그래도 이 깨달음과 후회를 다시 반복하는 일이 없기를.
그녀에게도 낭만은 있었다. 아니 지금 그녀에게도 낭만이 있다.
(+ 우리 사랑하는 박 여사님은 지금은 건강하시고, 놀랍게도 여행을 가자고 하면 돈 아까워 가기 싫다고 말씀하시지만, 그래도 가끔 아들이나 딸과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즐기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