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이 글은 영화 '싱글라이더'의 핵심 소재인 반전 요소를 글 전체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스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영화를 먼저 보고 글을 읽어주세요.
누군가 나에게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나는 스스로를 시니컬하고,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이야기한다. MBTI를 신봉하진 않지만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굉장히 전형적인 INTJ 유형의 성격과 행동 양식을 지녔고, 컨설팅이나 사업 기획 업무를 하면서 뭔가 그런 성격 유형이 더 강화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브런치에 처음 작가를 신청할 때 직장 생활하면서 감수성이라는 걸 다 잃어버리는 것 같아서 글을 쓰며 이를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싶다고 신청 사유를 썼었다. 과거에 연애를 할 때 감수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기도 했으니, 이 부분에 있어서 나는 조금 구제불능이긴 한가보다. 브런치에서 쓰고 있는 이 몇 편의 글들이 정말 내 깊은 감수성을 끄집어내 힘겹게 쓰고 있다는 사실을 내 과거 연인이라면 알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내가 없는 감수성을 쥐어짜 모든 사물과 사건을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 바로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떠나는 순간들이다. 특히 여행을 떠날 때는 여행 자체가 주는 설렘이 자연스럽게 나를 열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의식적으로 더 열린 태도를 갖기 위해 노력을 하기도 한다. 새로운 경험들을 도전하고, 조금이라도 덜 시니컬하게 생각하려 노력하고, 평소라면 하지 않는 상상이나 공상들을 해본다. 이런 변화를 내 일상에서 계속 지속하는 노력은 어렵지만 여행은 아무래도 한정적인 짧은 기간 진행되기 때문에 잠깐의 변화가 가능한 부분들이 있다.
3년 전 시드니를 여행할 때도 그랬다. 시니컬하게 현실적인 생각만 하는 내가 일상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어떤 가정'을 한 편의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여행하며 계속 이어나갔다. 그 가정은 '내가 만약 내일 죽고 이후 남은 사람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싱글라이더' 스틸 컷
시드니와 나의 죽음, 이쯤 되면 내 가정의 영감이 된 영화가 많은 분들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바로 이주영 감독의 '싱글라이더(2017)'다. 햇살과 생(生)이 요동치는 한 여름의 골드코스트에서 여행을 마치고, 시드니로 넘어가는 호주 국내선에서 미리 준비해둔 이 영화를 처음 보았다. 사실 나는 이 영화의 핵심 반전이나 내용을 전혀 몰랐고, 그냥 시드니 풍광을 예쁘게 그린 한국 영화 정도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보았다가 많이 놀랐었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처음 소개하는 한국 영화 기도한데 해외 여행지를 매력적인 로케이션으로 연출한 한국 영화가 아쉽게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싱글라이더'는 서울을 벗어난 주인공 재훈(이병헌)의 관점에서 낯선 장소의 이미지로 시드니라는 로케이션을 매우 잘 차용하고 있다. 영화는 하버브리지, 본다이 비치, 오페라하우스 등 시드니의 아름다운 모습을 이병헌의 탁월한 감정 연기와 잘 결합해 장면마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증권사 지점장으로 나름 성공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던 주인공 재훈은 부실채권 사건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기러기 남편으로 남은 가족들이 있는 호주로 떠난 그는 가족들을 만나려 했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스스로가 부끄러운 데다, 다른 남자와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것 같은 아내 수진(공효진)의 모습에 가족 앞에 서지 못한다. 그리고 재훈은 새로운 삶을 사는 것 같은 가족들을 먼발치에서 며칠간 지켜보는데, 수진의 진실한 마음을 알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재훈이 겪는 감정 등이 세밀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결말로 가면서 작품의 핵심 반전이 드러나는데, 이미 재훈은 사망한 혼령 상태였다는 것. 마지막으로 재훈은 테즈매니아로 떠나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내가 죽고 나서 남은 내 가까운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고 내 인생을 돌아볼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으로 그 시간들을 보내게 될까? 그리고 내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여행 내내 이 생각을 하면서 영화 속에 나왔던 유명 시드니 관광지들을 여행을 하였다. 여행인데 너무 우울한 것 같다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 가정이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감정들을 훨씬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다. 특히나 여행을 떠나기 전 일상에서 있었던 많은 고민들을 그 순간만큼은 명료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효과가 있었다.
본다이 비치(출처: Waverley Council)
처음 느낀 삶에 대한 명료함은 나에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나의 연애는 이미 떠나버린 상대방의 마음을 애써 외면하면서 내가 억지로 버티며 이어가는 위태로운 관계가 지속되던 시기였다. 우리 관계가 더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사실도 인지를 못하다가, 영화 속 재훈처럼 본다이 비치에서 바다를 즐기고 한가롭게 수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정말 집중해야 할 사람들은 어머니와 동생, 내 반려견들이라는 것과 서로를 상처 주는 관계는 그만해야 할 때가 왔음을. 조심스럽게 그 친구에게 연락해 서로 마음을 다시 솔직하게 이야기 나누며 나름 건강한 이별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창하지만 살아가는 목적과 삶의 방향성에 대해서 다시 고민해보는 계기도 되었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재훈이 마지막으로 떠났던 태즈메이니아의 실제 촬영지 그레이트 오션 로드를 여행하며 대자연 앞에서는 너무나 작은 나를 느끼며 내 죽음 뒤에 덧없어질 것들을 생각하니, 그전까지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던 직장 생활이나 삶의 고민들이 가벼워지고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생각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거나 고민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문제와 고민 자체를 받아들이는 내 태도가 변화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들이 원래대로 되돌아갈지 모르지만, 그런 느낌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 것과 경험해보지 못한 것 그 자체에 큰 차이가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감수성 부족한 나는 겨우 2시간 남짓한 영화와 일주일 정도의 여행이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우리가 영화를 보고 여행을 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약간의 영감을 더하면, 일상에서는 깨닫지 못했을 작은 경험들이 쌓이고, 그것이 모여 다시 우리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