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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조이 Sep 13. 2022

목욕 후 바나나 우유와 홍콩 영화

<화양연화>의 홍콩 골드핀치 레스토랑

벌써 15년이란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명절 때나 기일이 아니면 아버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게다가 이번 추석에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고, 벌초도 따로 맡겨서 그런지 딱히 아버지를 떠올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연휴가 지나갔다. 그러던 차에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다음 달에 진행할 본인 결혼식에 신부 입장에서 아버지 대신 같이 서줄 수 있느냐고 묻는 연락이었다. 요즘은 신랑 신부가 함께 입장하는 게 그림이 예쁘지 않으냐고 에둘러 말했지만, 사실 내가 아버지 대신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 잘 상상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당황한 점이 있었다. 동생이 주인공이니 가급적 동생이 원한다면 해주는 것이 맞겠지만, 일단은 추후에 따로 다시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와 나는 그리 살가운 관계는 아니었다. 많은 사연들이 그러하듯 IMF 이전까지는 꽤나 부유하게 사업을 했던 아버지가 IMF 이후 다시 시작한 여러 사업들이 그리 좋지 못한 결과를 내었고, 사람이 좋아 서줬던 보증들은 그의 가족들에게는 좋은 일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가정이 불화가 가득한 집은 아니었지만, 내가 중학생일 때는 여러모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던 것은 틀림없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고등학생이 된 나는 머리가 조금 컸다고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거의 집에 있을 시간이 없었고, 가끔 당뇨 합병증으로 건강을 찾기 위해 집에서 요양을 하는 아버지와 잠시 마주칠 뿐이었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 둘은 '밥 먹었냐'와 '공부 열심히 해라' 이 두 마디 말고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사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빨리 아버지의 몸상태가 나빠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가 되어 아버지는 당뇨 합병증으로 신장 투석을 시작했다. 몸에 장기 하나가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그 사실과 함께 갑작스레 그는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수치가 많이 안 좋을 때는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고, 아이러니하게도 무뚝뚝한 부자는 태어나 17년 간 나누지 않았던 대화들을 그제서야 나눌 수 있었다. 남자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인 학창 시절 이야기, 군대 이야기, 그리고 엄마와 연애 이야기. 아마 그게 아버지의 화양연화(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였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할 때면 아버지는 투석과 수액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른 때보다 활색이 도는 얼굴로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엔 1년 뒤 아버지는 어느 날 우리 가족에게는 갑작스럽게 새벽 심정지로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떠나시기 전 마지막 1년 간 둘이 나눴던 대화들은 잊을 수가 없다.


돌이켜보면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도 아버지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머리가 커서 친구들과 목욕탕을 다니기 시작한 중학교 고학년 이전의 주말에는 항상 아버지와 함께 목욕을 갔었다. 목욕 후에는 긴 시간이 걸리는 엄마와 여동생을 잠시 제쳐두고, 바나나 우유를 마시며 가끔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아마 아버지와 내가 나눈 가장 행복한 시간이 그것일 것이다. 멀티플렉스도 없던 2000년쯤 촌동네 안동에서 아버지와 내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 장르는 홍콩 액션 영화들이었다. 성룡이나 이연걸이 출연했던 액션 영화, 역시 남자인 아버지와 나만 좋아할 수밖에 없는 플레이버가 있었다. 아버지와 둘이 마지막 대화들을 나눌 때도 이때 보았던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다시 하곤 했고, 가끔은 병실에 항상 틀어져있는 OCN에서 예전 홍콩 영화들을 방영해주면 함께 보면서 낄낄대기도 했었다. 


그런 아버지와 내가 함께 본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영화가 한편이 있다. 바로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2000)'다. 홍콩 액션 영화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웬 로맨스 영화 '화양연화'냐고 당황스러우실 수도 있겠다. 사실 우리도 그랬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쯤 그날도 어김없이 목욕을 하고 영화를 보러 갔다가, 우리 두부자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홍콩 영화에 제목도 누아르 느낌이 나서 스파이 액션물이겠거니 하고 보았던 영화가 '화양연화'다. 근데 그 영화가 그렇게나 절절한 사랑을 다룬 영화일 줄이야. 솔직하게 나는 그 당시에 영화의 거의 반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고, 정말 재미가 없었고, 중반부 이후에는 나른함에 잠을 잤던 것으로 기억한다. 명작의 힘을 느끼기에도 사랑의 'ㅅ'자도 모르는 나에겐 너무나 어려웠던 것이다. 그때 영화를 끝까지 다 보신 아버지도 허허하고 웃기만 했지 영화에 대한 별다른 코멘트 없이 어영부영 넘어갔었던 기억이 난다. 그 시대 보수적인 경상도 남자에게 불륜을 다룬 사랑 이야기는 아마 쉽지 않았으리라.


'화양연화' 스틸 컷


그리고 대학생이 된 이후에 '화양연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내 기억 속에는 더럽게 재미없고 지루한 사랑 영화였기에 나는 별로 이영화를 다시 볼 생각이 없었는데, 대학 3학년 때쯤 이 영화가 재개봉을 했고 그때 만나던 친구가 꼭 봐야 한다고 우겨서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 뒤 결말은 다들 예상하시는 대로다. 머리가 많이 컸고, 사랑의 전체는 몰라도 '사ㄹ' 정도는 알게 된 20대 중반의 나는 완전히 이 영화에 빠져들었다. 재개봉을 길게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2번이나 더 영화관을 찾아 다시 영화를 보았다. 지금도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일이 많지 않은 내가 1년에 한 번쯤은 다시 보게 되는 영화로 '화양연화'를 꼽는다.


이후 처음 홍콩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당연히 나는 '화양연화' 속 영화 장소들을 찾아가고 싶었다. 홍콩은 굳이 '화양연화'가 아니더라도 그리 크지 않은 도시에서 수많은 영화들이 촬영되었기에, 도시 그 자체가 커다란 영화 세트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반면에 홍콩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들과 다르게 당시에만 하더라도 영화 촬영지가 잘 정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나 '청킹맨션'처럼 유명한 랜드마크들이 아닌 영화에 나온 작은 식당이나 카페 같은 곳들은 현지에서 물어물어 방문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화양연화' 스틸 컷(골드핀치 레스토랑)

 

다행히도 '화양연화'에서 매우 인상적인 장면인 주인공 차우(양조위)와 리첸(장만옥)이 처음 식사를 함께 하며 자기 배우자들의 불륜을 무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식당인 '골드핀치 레스토랑'은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었고, 영화 촬영지로 잘 알려져 있었기에 수월하게 찾아갈 수 있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먹었다는 세트 메뉴를 화양연화 메뉴로 판매하고, 영화 연출 당시 인테리어와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그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20대 후반인 내가 아버지와 함께 이 공간에 있었다면, 처음으로 '사랑이 주는 행복과 사랑을 통해 겪는 쓴맛까지 모두 이야기 나눠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기며 식사를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너무나 아쉽게도 이 레스토랑은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찾아보니 2018년에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더는 운영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가 결혼을 하고 나를 낳았던 나이보다도 몇 살이나 더 먹은 어른이 되었다. 잘은 모르지만 어쩌면 내가 아버지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해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랑은 어렵다. 지금쯤이면 아버지와 내가 인생의 화양연화를 이야기하며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 나눠볼 수 있지 않을까? 뭐 이제 나도 그 정도가 되었으니 내가 아버지 대신 동생 손을 잡고 신부 입장에 함께해도 괜찮으려나?


다음 여행지로 앙코르와트를 고민해봐야겠다. 차우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영원한 사랑을 아무도 모르게 고백했던 곳에서, 아버지에 대한 내 마음을 조용히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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