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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하이커 Apr 20. 2024

TV가 없다

지난 20년간 대략 다섯 번 정도 발생한 대화에 이런 것이 있다. 이를테면 어떤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TV에서 방영된 프로그램에 대해 "그 프로그램 보았느냐"라고 물으면 "나는 TV가 없어."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20년 전만 해도 아직 시청료 수신원들이 집집마다 방문해서 TV나 라디오가 있는지 확인하고 수신료를 받아가던 때였기 때문에 그때는 TV가 없다는 것이 단순히 수신료를 아끼기 위해서였을꺼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TV가 없어도 수신료를 납부해야만 하는 요즘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지난 대화들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곱씹어보니 그 말의 어감은 "난 TV 따위 곁에 두지 않아."와 비슷했을 것 같다. 내 기억이 100% 정직하지 않음을 감안하더라도 대화의 전후사정을 이용해 해당 문장을 재구성해 보면 그 말의 숨은 뜻은 필경 "나는 책 읽는 사람이야. TV 따위 보는 사람이 아니라고."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 대화는 누가 봐도 지식이 넘쳐흐를 것 같은 아우라를 내는 사람들과 오고 간 것이니 나의 뒤늦은 속뜻 재구성이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한국에 비하자면 아직은 열차 안에서 스마트폰 대신 책을 꺼내는 인구가 월등히 많은 독일이니 '실질적' 문맹화가 급속하게 번지고 있는 멀티미디어 사회에 절로 혀가 차질 것은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요즘같이 폭풍처럼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에 읽기만으로 충분한 정보 습득이 가능한가도 의문이다.


독일은 수신료로 커버가 되는 채널은 공영 방송사 채널까지다. ARD, ZDF, 3SAT, PHOENIX, ZDF-Info, ARTE같은 채널들로 다큐멘터리, 뉴스, 또는 맹숭맹숭한 정보성 예능과 조금은 구식의 범죄 드라마를 광고 없이 보여준다.


그 이외의 사설 채널들은 따로 돈을 내고 보는데 돈을 낸 만큼의 자극을 책임진다. 아드레날린 생성 목적의 예능이 많고 시시각각 광고가 튀어나와 시청을 방해하기까지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능이라는 콘텐츠를 소비하지 않는 나는 처음부터 사설 채널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프로그램들을 나열할 수는 없지만 요즘은 그런 프로그램을 접하지 못해서 대화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가끔 발생하고 있다.


정말 오랜만에 '나는 TV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 생각에 빠지다 보니 '예능을 보지 않는다'라는 말도 누군가에게는 같은 맥락으로 생각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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