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 provides Rules.
1997년 여름, 필자가 영국에서 처음 유학 생활을 시작할 때였다. 나잇 브리지 Night Bridge 지하철역에 하비 니콜스 Harvey Nichols라는 백화점이 있다. 이층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마다 느꼈지만 디스플레이가 참 독특했다. 사진 1과 2에 나와 있는 그 당시 백화점 디스플레이는 필자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마침 백화점 디스플레이 공사 중이라, 들어가서 누구의 작업인지 물어보았다. Royal College of Art(이하, RCA)를 졸업한 토머스 헤더윅 Thomas Heatherwick이었다. 필자가 RCA 1학기를 시작하기 전, 그의 프로세스를 본 것이 신선한 자극과 도전이 되었다.
사진 1. 하비 니콜스 Harvey Nichols, 1997년
사진 2. 하비 니콜스 Harvey Nichols, 1997년
그는 사물과 공간의 조형 관계를 해석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다. 상당히 뛰어났다. 필자가 생각해왔던 조형 규칙을 완전히 어긴 것이었다. 여러 가지 조형 요소 중에 비례와 스케일 측면에서 파격적이었다. 감정이입을 통해 추상적 형태를 끌어내던 프로세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결과물이었다. 격투기로 말한다면 헤비급에서 느낄 수 있는 힘이었다. 인식의 힘이다. 일반적인 조형 규칙을 탈피한 공간 해석이 적용된 것이다.
사물과 현상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필자의 생각을 강력하게 붙잡은 질문이었다. 필자가 RCA 입학 인터뷰를 왔을 때 당시 두 학생이 진행했던 가구디자인 프로세스를 보고 놀랐었다. 미국이 아닌 영국으로 마음을 바꾸게 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유사한 프로세스로 진행된 결과물을 현장에서 보았으니 자극을 받은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토머스 헤더윅 Thomas Heatherwick의 대표적인 첫 작품의 현장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이 작품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영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불릴 정도로 지난 20년의 작업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검색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필자는 현대카드가 디자인으로 가장 공이 많이 들어간 브랜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카드 회사가 왜 슈퍼 콘서트를 처음에 시작했을까? 그리고 왜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시리즈를 만들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차별화된 브랜드 전략이다. 디자인, 여행, 음악, 요리라는 일상의 주제가 담긴 라이브러리를 영감의 공간으로 해석하였다. 도시의 빠른 속도에서 벗어나 일상을 사유하고, 아날로그 감성과 영감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다.
사진 3.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Design Library = 몰입의 시간+영감의 공간
Travel Library = 발견의 시간+영감의 공간
Music Library = 울림의 시간+영감의 공간
Cooking Library = 채움의 시간+영감의 공간
새로운 관점의 시간과 공간의 규칙을 브랜드 가치와 철학에 담아냈다. 위의 네 가지 콘텐츠를 시간과 공간의 프레임 속에 넣어 현대카드가 제안하는 라이프스타일의 규칙을 적용한 것이다. 브랜드 철학의 규칙에 따라 브랜드를 경험하고, 브랜드에 충성하게끔 했다. 이것이 현대카드의 철학적 전략이자 문화적 전술이다.
시간과 공간의 본질, 그 관계를 통해 고민한 전략이기에 그만큼 디자인 해석과 적용 측면에서 밀도가 높다. 지금도 많은 사람의 지갑 속에는 현대카드 시리즈로 자리가 채워지고 있다. 2001년 시장에 진출한 현대카드는 카드업계를 점령했다. 크기, 비례, 컬러, 서비스의 차별성과 특히 얇은 측면의 (컬러)디테일을 담고서.
필자는 분당에 13년째 살고 있다. 판교 현대백화점과 수내 롯데백화점 사이에서 나름대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는 AK 플라자가 있다. 몇 년 전부터 중앙 광장에 항상 디스플레이를 새롭게 선보이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고 생각을 했다. 앞에서 언급한 하비 니콜스 Harvey Nichols 백화점을 기억하게 한 것을 보면 나쁘지 않았다. 최근 60년 만에 사옥을 이전하여 홍대시대를 열겠다고 하는 애경그룹에 관련된 기사가 떠오른다.
사진 4. 분당 AK플라자 © 2018. Bedro Ko
예전처럼 AK 플라자는 여름을 위해 새 단장을 했다. 나름대로 스토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자신 있게 초대하려는 노력이 보였다. 시계탑을 중심의 광장을 새롭게 하여 사람들이 그 중심에 항상 머무르게 한다. 얼마 전, 그곳을 지나가면서 새로운 디스플레이를 다른 눈높이에서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광장 중앙에 나선형 층계가 있었기 때문에 층마다 다르게 보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4층이 기대되었다. 직관적인 감각과 사진의 렌즈가 어떻게 일치가 되는지 궁금했다. 역시 시계탑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간이 마치 거실에 있는 가구처럼 보였다. 공공 가구 Public Furniture, or Street Furniture였다. 스케일감 때문이다. 사람, 사물 그리고 공간의 규칙성을 관찰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은 것이다.
스마트 폰 때문에 사람들의 행동이 제한되어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이 사용하는 각각의 스마트폰 속에 콘텐츠는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이 주는 규칙 속에서 자유롭다. 사람들의 행동과 감정을 적절하게 분출하도록 돕는 공간이 된다. 사물과 공간에 펼쳐진 무대 위에 사람들은 반응하고, 공간 연출이 주는 규칙을 따르고 있다.
공간이 주는 힘은 강하다. 사물과 공간은 사람들을 공감각적으로 느끼고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 동질감을 느낀다. 공간에 담겨 있는 가치와 철학이 규칙이 되어 사람들을 움직인다. 공간이 주는 관계의 힘이다.
사진 1 출처: 하비 니콜스 Harvey Nichols, 1997년
사진 2 출처: 하비 니콜스 Harvey Nichols, 1997년
사진 3 출처: 현대카드 라이브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