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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느 Dec 30. 2023

원주에서 마주한 새로운 세계

슬스레터 #19


"인공 홀드만 만지다가 찐 바위 만지니까 느낌이 달라."
"자연에서 등반하니까 풍경이 멋져서 사진이 정말 잘 나오더라."
"바위만의 그, 감기는 손맛이 있어!"


이게 다 무슨 소리냐고? '자연 암벽을 어떤 형태로든 경험하자'고 다짐하게 만든 암장 회원들의 영업 멘트였다. 지난 4~5월쯤, 따뜻한 봄이 되자 자연에서 하는 볼더링과 리드 클라이밍 후기가 여기저기서 들리기 시작했다. 현장감 넘치는 말을 들으며 무슨 기분일지 상상해 보았으나 내 얄팍한 상상력으로는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올해가 끝나가는 지금에서야 밝히지만, 자연 암벽은 아주 자연스럽게 2023년 목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때쯤 슬스팀에서도 빅 프로젝트(?) 얘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언젠가 끄라비에서 자연 암벽 등반을, 그것도 리드 클라이밍을 해보자고. 끄라비에서 멋지게 등반하려면 풍부한 자연 암벽 경험이 필요했다. 국내에서라도 하루빨리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자차가 없어 혼자 이동하기는 어렵고 휴무일이 들쭉날쭉한 직업 특성상 팀원들과 일정을 맞추기도 힘들었다. 이렇게 한 해가 가는구나, 싶을 때쯤 다니는 암장에서 공지가 올라왔다.


'간현유원지 자연리드 참여 투표'


날짜를 확인하니 하늘이 도왔는지 마침 아무런 일정 없이 쉬는 날이었다. 망설임 없이 가겠다고 투표했다.


첫 자연 암벽을 경험하게 해준, 간현관광지 안에 위치한 간현암벽공원의 모습



빛나는 윤슬 너머에서 만난 오늘의 루트

      

11월 초, 서늘한 바람 부는 이른 아침. 암장에 도착해 오늘의 등반지인 원주 간현암벽공원의 정보를 찾아보며 사람들을 기다렸다. 지금은 소금산 그랜드밸리와 출렁다리가 더 유명하지만, 산 일부를 깎아 관광지로 조성하기 전엔 지금보다 더 많은 산악 동호인이 등반을 위해 찾는 곳이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2시간여를 달려 원주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잘 닦인 길을 따라 줄지어진 음식점, 카페, 그 사이사이에 놓인 특산 막걸리, 동동주들이었다. 일찍 길을 나선 터라 배가 고팠다. 하지만 얼른 가서 등반해야 이른 저녁에 끝낼 수 있다는 말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가게 사이를 지나치고, 출렁다리를 가기 위해 늘어선 인파를 헤치며 나아갔다.


주차장에서 간현암벽공원으로 가려면 호객 행위 일색인 상점가를 지나 구불구불하고 긴 길을 걸어야 한다. 암벽화와 초크백, 간식거리, 하강을 위한 장비 등을 담은 가방이 점점 무겁게 느껴질 무렵 강이 나타났다.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섬강 너머에 커다랗고 웅장한 산맥이 펼쳐져 있었다. 높이 솟은 산 위로는 출렁다리가 길게 이어졌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암벽을 뚫어져라 바라보니 헬멧을 쓴 채로, 몸에 줄을 매달고 오르는 서너 명의 형체가 희미하게 보였다.


색색의 인공 홀드가 아닌 온통 돌과 흙으로 이뤄진 바위를 오르는 일, 그동안 사람들의 말로만 어렴풋이 짐작한 일. 그것을 오늘 내가 해낸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어딘가 마음이 울렁거렸다. 암벽과 가까워질수록 흐릿하고 작게만 보이던 사람들이 점점 뚜렷해졌다. 그들이 손으로 잡고 발로 딛는 바위틈을 보며 루트를 짐작할 정도까지 되었을 때, <간현암벽공원> 표지판이 등장했다.


루트를 안내하는 표지판. 눈앞에 마주하니 실감 나기 시작했다.



클라이밍이 아니었다면 절대 몰랐을  


하네스*를 착용하면서 위용을 자랑하는 산맥을 올려다봤다. 오르기로 한 루트는 산의 ⅓ 지점만 가면 되는 문제였다. 산 꼭대기까지 가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서도 두려움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외투를 벗고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후, 후 내뱉으며 몸을 풀었다.


*등반 로프를 몸에 고정하기 위해 착용하는 장비, 안전벨트라고도 한다.


선등자*로 센터장님들이 나섰다. 순식간에 2인 1조가 되어 장비를 착용하고, 회원들이 비교적 쉽게 등반할 수 있게 바위에 줄을 걸기 시작했다. 프로다운 그들의 모습과 인간을 압도하는 자연 암벽의 위용에 나는 그저 혀를 내두르기 바빴다. 암벽을 코앞에서 바라보니 틈의 깊고 얕음이 제각각 다른 게 확연히 느껴졌다. 손, 발이 그 사이로 잘 들어가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떨어질 모양새였다. 하지만 미세한 틈이 그들에게는 잘 잡히는 홀드라도 되는 양 딛고 서서 잠시 숨을 고르기도 하고, 손을 털며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한 루트를 오르내리는 걸 보며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등산대의 맨 앞에서 오르는 사람.


거침없이 오르는 센터장님의 모습.


언젠가는 저들처럼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순간 또 남과 비교하고 말았다. 지금은 내 체력에 맞춰 안전하게 등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클라이밍은 내게 초점을 맞춰야 하는 운동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센터장님이 내게 건넨 로프를 손에 쥐었다.


첫 루트를 올라갈 때였다. 선등자가 먼저 설치한 줄을 내 몸에 단단히 묶고, 밑에서 그 줄을 잡아주는 친구를 믿고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다. 위아래로 응원해 주는 소리를 들으며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 마침내 완등에 다다랐다. 바위 끄트머리를 잡고 ‘완료!’라고 소리쳤다.


아래에 있는 친구가 로프를 자신의 몸 쪽으로 힘껏 당겼다. 내 몸에 묶인 줄이 팽팽해짐과 동시에 점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긴장이 풀리며 그제야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울긋불긋하게 단풍 물이 들어가는 숲, 산맥을 따라 좁아졌다가 넓어졌다 하며 잔잔히 흐르는 강의 모습이. 클라이밍을 몰랐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세계였다.


제법 멋지게 찍어 주셨지만, 속으로는 손, 발 자리를 찾지 못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등반 결과만 말하자면, 나는 10m 높이의 쉬운 루트 2개를 올랐다. 하나는 완등했고, 하나는 ⅔ 지점에서 힘이 점점 빠져 두려움이 커지고 말았고, 결국 내려달라고 외쳤다. 아쉬움이 남을 법도 하지만 벌써부터 다시 자연 암벽에 도전할 내년 봄이 기다려졌다. 멀지 않은 미래에 끄라비의 자연 암벽 앞에 선 슬스팀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봄과 여름에 암장에서 들었던 모든 말이 퍼즐이 맞춰진 듯이 이해됐다.


자연이 만들어 낸 바위의 촉감은 그야말로 미묘했다. 어릴 적 놀이터에서 돌을 주워 집을 만들고, 풀과 흙을 찧어 음식이랍시고 만들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물수제비를 뜨겠다며 강변에서 놀았던 일 말고는 성인이 되어 맨질맨질하기도 하고 까슬거리기도 한 바위를 만질 날이 또 있었을까?


그 어린아이가 다 커서 낑낑거리며 바위를 오를 줄은, 먼지를 다 뒤집어쓰고서 완등했다며 함박웃음을 지을 줄 누가 알았을까. 어떻게든 틈을 디뎌보겠다며 발로 더듬거리며 찾은 일, 흙이 얼굴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잡초가 손에 잡혀도 오르겠다는 일념으로 암벽을 탄 경험은,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한 유년시절만큼이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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