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킬링 조크>
※ 작품에 대한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읽는 데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미국 사회의 계급 갈등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 <조커>의 충격적인 성공으로 인해 DC 코믹스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태초에 조커란 캐릭터는 배트맨 코믹스의 단역으로 잠깐 등장했다 사망할 운명이었지만 뜻밖의 인기를 끄는 바람에 편집부가 개입해 사망 전개를 막았고,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을 받는 DC 코믹스의 메인 빌런이 되었다. 광기와 혼돈의 화신이면서도 배트맨을 가장 닮은 이해자라는 이중성이 특징이다. 이런 조커의 기원과 배트맨과의 관계에 대해 상세히 다룬 작품이 바로 <배트맨: 킬링 조크>다.
이 작품에서 배트맨과 조커는 도플갱어와 같은 존재다. 둘이 기묘하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으로 미쳐있다는 사실은 작품 내내 부정할 수 없도록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배트맨이 아캄 수용소로 조커를 만나러 가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배트맨이 얼굴이 보이지 않는 조커와 마주앉아 독백처럼 말한다. 그들은 아마 서로를 죽이게 될 것 같지만 그런 결과를 피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싶다고. 그러나 반대편에 앉아 있던 남자는 대역이었고, 배트맨은 탈출한 조커를 잡으러 나간다.
DC 코믹스 중 배트맨 세계관 전체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명작이다. DC 확장 유니버스와는 다른 세계관이지만 걸작이라 인정받는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부터 2019년 최고 문제작인 <조커>에 이르기까지 <배트맨: 킬링 조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아캄 수용소를 빠져나온 조커는 폐쇄된 놀이동산으로 향한다. 다양한 기형을 가진 이들을 모아 구경거리로 삼는 일종의 ‘프릭쇼’를 열려는 목적이다. 정신병동과 놀이동산이라는 대비가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로 작용한다. 배트맨은 정신병자들을 가두고 치료함으로써 세상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공리주의적 관점을 보여준다면 조커는 그런 이들조차 사회의 일부이니 오히려 공공에 전시해야 하며 일반인과 정신병자의 차이는 ‘운수 나쁜 하루’ 정도로 미세하다는 주장을 편다. 배트맨과 조커의 대칭성은 정신병동과 놀이동산 외에도 부자와 빈자, 미혼과 기혼 등으로도 변주된다.
조커는 고담 시 경찰청장 제임스 고든을 놀이동산으로 납치해 고문을 가하고 딸을 불구로 만듦으로써 이런 대칭성, 차이점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한다. 고담 시에서 가장 완벽한 선인인 고든을 굴복시킬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볼 필요도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고든은 구하러 온 배트맨에게 “그놈을 잡아다 주게, 하지만 원칙대로 잡아야 해”라며 조커를 죽이지 말라고 부탁할 만큼 온전한 정신을 유지한다. ‘겉으로 보이는 육체엔 눈에 띄는 점이 없으나, 대신 가치 체계가 기형인 존재’라며 고든의 실성을 확신했던 조커에게는 뼈아픈 실패가 아닐 수 없다.
이 대목에서 배트맨의 승리로 막을 내리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 독자가 있다면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마지막 몸싸움에서 패배한 조커는 주저앉아 배트맨의 처분을 기다린다. ‘무방비 여자애에게 총을 쏘고, 한 노인을 공포로 몰아넣은 범인’인 자신을 ‘혼쭐이 빠지도록 걷어차준 다음에 모여든 구경꾼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으라’며 배트맨을 다그친다. 원칙을 지켜야 하는 배트맨은 늦지 않았다며 함께 갱생의 길을 걷자고 제안하고 조커는 죽이는 농담 하나를 들려주며 우회적으로 거절한다. 영화 <조커> 마지막 장면에서 미친 듯이 웃는 조커에게 상담사가 왜 웃냐고 묻자 농담이 떠올랐다고 말하지만 ‘어차피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들려주기를 거부한 것과 사뭇 다른 결말이다.
배트맨은 이 농담을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동조해 미친 듯이 웃다가 (불확실하게 처리되나) 조커를 목 졸라 살해한다. 이로써 고담에 평화가 찾아온 것이 아니다. 자석에는 항상 N극과 S극이 있다. N극을 없애면 S극만 가진 자석이 되지 않고 남은 절반에 N극이 생길 뿐이다. 고담 시 광기의 상징인 조커를 없앴지만 예상되는 결과는 또 다른 광기의 부상이다. 배트맨은 자신의 도플갱어인 조커를 죽였지만 결국 죽인 건 자기 자신이고 조커는 잘린 N극처럼 다시 부활할 뿐이다.
이 작품의 조커가 다른 작품에 끼친 흔적을 들춰보는 것도 작품의 재미 중 하나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혼란 좀 보여주고 정립된 질서를 뒤엎으면 모든 게 개판이 되지. 나는 혼돈의 대리인이야. 혼돈의 특징이 뭔지 아나? 공평하단 거야.”라며 조커란 빌런의 근원은 혼돈임을 강조한다. 여기에 경도된 하비 덴트는 결국 투페이스란 빌런으로 전락하고 만다.
<조커>의 조커는 “외톨이 정신병자와 그를 냉대하고 쓰레기 취급하는 사회를 합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라며 사회의 약자를 짓누르고 방치하며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하는 기득권들에게 일침을 날린다. 단순한 범죄자가 아닌 사상, 이데올로기로까지 도약한 것이다. 영화 후반부, 자동차 보닛 위에서 피로 활짝 웃는 입모양을 그리는 아서 플렉과 극장 뒷골목에서 부모를 잃고 오도카니 서 있는 브루스 웨인을 교차편집을 통해 보여주는 장면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둘의 관계를 잔인하리만큼 담담하게 그려낸다.
배트맨 세계관이나 DC 코믹스, 심지어 미국 코믹스 전체에서도 의미가 깊은 작품이다. 스토리 작가인 앨런 무어는 <미라클맨>, <왓치맨>, <브이 포 벤데타> 등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킨 (영국인이지만) 미국 코믹스의 거장이다. 분량이 비교적 짧아 부담이 적다는 점에서 대작가의 입문작으로 적당하다. 스토리 전개보다는 장면 연출, 액션에 비중을 둔 일본 만화를 즐겨 읽었던 독자라면 컷 하나에도 스토리가 빠지지 않는 코믹스의 컷 배분과 대사의 밀도에 다소 숨이 막힐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게도 감히 ‘일독을 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