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필름으로 카메라를 찍던 시절
아마 기말고사였을 것이다. 한 선배가 나한테 “너 왜 그렇게 열심히 해? 굳이 그럴 필요 없어”라고 말하며 날 안타깝게 바라봤다. 내가 한 학기 내내 사진 인화한다고 암실에 들락거렸기 때문이다. 다들 한 장씩 인화하고 끝냈는데 나는 계속 암실에 있었다. 그제야 내가 여기에 약간 미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학교 때 사진 수업을 들었는데 좀 독특했다.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흑백 필름 세 롤을 나눠주셨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필름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직접 인화해서 전시하는 수업이었다. 전시 결과물이 기말고사였다
그런데 나는 세 롤도 모자랐다. 찍고 인화한 롤에 마음에 드는 사진이 없었다. 다시 또 찍고 인화하고 다시 또 찍고 인화했는데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시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찍어야 했는데 필름이 없었다. 수소문 끝에 필름이 남은 동기가 있었다. (당시에도 흑백 필름은 구하기 힘들어서 교수님이 미국에서 사 온 필름을 학생들에게 주셨다)
흑백 필름을 얻기 위해 그녀의 집에 간 날.
기쁘기도 하고 지치기도 했던 그 밤.
그녀는 나에게 이제는 필요 없다며
필름 두 롤을 흔쾌히 줬다.
그리고는 갑자기 비밀연애를 털어놨다.
기묘한 밤이었다.
결국 나는 마음에 든 사진을 찍지 못했다. 차선으로 고른 사진으로 전시했다. 나보다 잘 찍은 사진들이 너무 많아 좀 우울했다. 전시가 끝나고 암실 벽보에 공개적으로 성적표가 붙었다. 그걸 보고 난 희미하게 웃었다. 에이뿔이었다. 교수님은 아셨던 걸까. 나의 광기를.
가끔 이렇게 여름이 느껴지는 밤이면 연애 듣던 그 밤이 생각난다. 왜 그녀는 나에게 비밀연애를 털어놨을까. 결국 학과에 모든 아이들이 다 알았지만.
이후 나는 사진에 열광했지만 결혼하고 아이 놓으면서 사진 찍기가 재미없어졌다. 그런데 요즘 필름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배회하고 싶다. 이제 자유인이 돼서일까. 어두운 암실에서 더듬더듬 사진을 인화하고 싶은 날이다.
#내가 잠시 미쳤다는 것을
#비밀연애 듣던 그 밤
#갑자기 다시 사진 찍고 싶은 밤
#퇴사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