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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해언Onion Nov 16. 2019

나는 걷는다

당신이 걸었던 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길은 어디인가요? 

<독서시>

참조 :『걷기예찬』, 다비드 르 브르통, 현대문학, 2002 /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 피에르 쌍소, 공명, 2014에서 발췌해 엮음>


세상의 모든 길은 땅바닥에 새겨진 기억을 가지고 있다

무수한 보행자들은 길 위에 자신의 서명을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써놓고 간다

걸으면서 우리는 풍요로운 생각을 가지에 달린 과일처럼 따낸다

걸으면서 얻은 생각은 그래서 무겁지 않고 달다

쓸 때조차 우리는 손만 가지고 쓰지 않는다

발도 항상 한 몫을 한다

때때로 들판을 건너고 때때로 산을 오르던 발은 손을 빌어 종이 위에 생각을 쏟아낸다


걸음으로써 배낭을 가볍게 할 수 밖에 없게 하는 자발적 빈곤을 배우고

구불구불 내면을 따라 걷다가 문득 자기로 향한 길을 연다

신발 한 결레 배낭 하나로 남도의 바다를 돌고, 강물을 따라 굽이굽이 휘어들고

꼿꼿한 산의 등어리를 넘어 간다

먼저 발로 걷지 않고는 순례의 길을 떠날 수 없고

침묵을 횡단하지 않고 신에게 기도할 수 없다


<아빠의 걷기> 

 동물은 움직입니다. 그래서 동물입니다. 모두 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로 걷습니다. 걷지 못할 때 그 동물은 동물이기를 그만두고 죽게 됩니다.


 마흔 여섯의 나이로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을 때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배낭을 매고 2달간 남도를 걷는 일이었습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나는 매일 25키로 내외를 걸었습니다. 아침에 여관을 나와 저녁에 다른 여관에서 잘 때까지 하루종일 내가 한 일은 걷는 일 뿐이었습니다. 배낭이 어깨를 누르면 경관이 좋은 곳에서 잠시 쉬었고, 이내 다시 걸었습니다. 우체국을 만나면 짧은 엽서와 한두 권의 무거운 책과 입던 옷 몇 개를 싸서 집으로 돌려 보내곤 했습니다. 짐을 덜어내면 걸음이 가벼웠습니다.


두 달 후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회사원이었던 20년간의 묵은 때를 훌떡 벗어낼 수 있었습니다. 두 달간의 남도 걷기는 새 인생을 살기 시작한 내가 첫 번 째로 한 가장 멋진 일이었습니다.


 나는 늘 걷습니다. 산을 걷고 길을 걷고 골목길 안으로 들어섭니다. 그러면 거리마다 다른 삶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골목의 초라한 삶, 큰 거리의 소비적 삶, 산 속의 조용한 삶을 만날 때마다 내 생각의 스펙트럼이 달라집니다. 나는 걷습니다. 살아있습니다.


*****  


<딸의 걷기>

 혼자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몇 정거장 일찍 버스에서 내려 걸으면 빠르게 스치던 풍경들이 천천히 다가옵니다. 기웃거리고, 거리의 냄새를 맡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하고, 가게 진열장을 구경합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먼 곳도 쉽게 갈 수 있게 되었지만, 오직 자기 발로 걸을 때에만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길 위에 서면, 평소에는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발이 새로움 앞으로 걸어갑니다. 


 걷기에는 비싼 자동차도, 두둑한 지갑도 필요없습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운동화와 가벼운 짐, 그리고 호기심입니다. 차창 밖을 바라보다 마음에 드는 곳이 나오면 걷습니다. 저는 이것을 도시탐험이라고 부릅니다.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느슨한 목적지만 있어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입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골목을 무심코 골라 들어갑니다. 담벼락을 따라 흐르는 꽃나무를 구경하다 지나가는 길고양이가 걸어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봅니다. 막다른 길이어도 괜찮습니다. 얽혀있는 다른 골목을 탐험하면 되니까요. 


 걷기 편한 길이 나오면 그대로 잠시 즐깁니다. 한 발, 한 발 자신 안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러면 생각들이 뭉게 구름처럼 머릿속을 떠다닙니다. 구름의 모양을 살펴보듯 눈여겨봅니다. 길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 같던 고민들을 걸음으로써 피해 지나갈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별 거 아니구만'하는 생각이 듭니다. 걸으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들은 그래서 산뜻합니다. 머리에 발도 힘을 합치니 아주 든든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풀어놓기 좋은 길을 몇 개 알고 있습니다.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산길, 광화문 사거리, 윤중로, 계동, 잠실나루역 근방, 합정 절두산 공원 등 서울에는 산책을 위한 길이 많이 있습니다. 그 길을 걸으며 저는 자라왔습니다. 

 길을 걸으며 생각과 길을 바느질하듯 몇몇 장소는 예전의 생각과 강력하게 연결돼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곳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당시의 감정과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수년 전, 제 첫째 조카는 서울아산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퇴근하고 지하철을 타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전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지하철역에서 내려 아산병원까지 십여분을 걸으면서 한걸음씩 조카를 만날 순간에 다가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마치 클라이막스를 향해가는 영화처럼, 약간 느리게 흘러가는 그 시간동안 좋은 이모가 되겠다는 다짐을 마음 속에서 몇 번이고 했습니다. 아직도 잠실나루역에 가면 그 때의 마음이 되살아납니다. 


 그렇다면 즐겨 걸었던 장소들을 모으면 저의 성장 지도가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저는 이런 컨셉을 한번 실현해보자는 생각으로 친구 하나와 서울에 얽힌 추억들을 같이 모으고 있습니다. 이제 이 기억들을 이어 붙이면 나만의, 아주 사적인 지도가 됩니다. 지도의 개인화 작업이지요. 작업을 하다보니 오랜 시간 걷기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달라진 나의 모습도 언뜻언뜻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 작업은 예전보다 성장한 나를 생각해보는 기회 또한 되어줍니다.


 도시탐험은 하나의 긴 호흡이라기보단 틈날때 하는 짧은 호흡에 더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걷기의 줄거움을 충분히 누릴 수 있으니 틈날때마다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혹시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인간의 인생처럼 긴 길을 오랜 시간 걸어보고 싶습니다. 아마 그 후에는 길을 떠나기 전의 저는 제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길 위에서 새로운 나를 만나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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