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어떤 흠이 삶을 완전하게 한다고 생각하나요?
<독서시>
참조 : 『할아버지의 기도』, 레이첼 나오미 레멘, 문예출판사, 2005 에서 발췌해 엮음
삶에는 흠도 필요하다.
이란 사람들은 아름다운 양탄자에 의도적으로 흠 하나를 남겨 놓았다.
그것을 '페르시아의 흠'이라고 불렀다.
인디언들은 목걸이를 만들 때 살짝 깨진 구슬 하나를 꿰어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영혼의 구슬' 이라고 불렀다.
영혼을 지닌 어떤 존재도 완벽할 수 없다.
우리가 만들어 가는 삶에 '페르시아의 흠' 같은 올 하나가 들어갈 때
삶은 오히려 완벽해진다.
불완전함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삶을 완성한다.
옛날에 한 거룩한 존재가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불꽃으로 쪼개져
우주에 흩어졌다.
모든 생명은 태어날 때, 그 불꽃 하나씩을 안고 생겨난다.
그러므로 존재 자체가 불꽃이며 폭죽이며 축복이다.
고통스러운 상처 하나를 입을 때 우리는 진정한 삶과 대면한다.
그 순간 삶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성찰하게 된다.
삶이 신비로운 이유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방법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삶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 다가오더라도
삶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눈을 키워가면 삶을 축복할 수 있다.
레치얌, 삶을 위하여 축배를 들어라
<아빠의 읽기>
저자인 레이첼 나오미 레멘은 중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열 다섯 살에 6개월 동안 정신을 잃고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독한 약을 먹어야 했고, 그 때문에 외모가 변했고, 자신의 몸도 홀로 가누기 어려웠습니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축복과 어머니의 도움으로 그리고 무엇 보다 자신의 의지로 홀로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혼이 아름다운 소아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깨진 구슬이었고, 페르시아의 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삶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할아버지의 기도'는 그녀의 일상과 생각을 담은 필독의 책입니다. 하루만에 읽어 낼 수도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오늘 새벽에 어깨의 통증이 심해 평소보다 더 일찍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고통이 나를 깨웠습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이 편지를 씁니다. 다시 잔잔해졌고 고요해졌습니다. 내가 심심해하지 않도록, 권태와 공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삶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에서 무찔러 옵니다. 그러니 그것이 어찌 축복이 아닐 수 있을까요 ? 그대의 어떤 흠이 삶을 완전하게 해준다고 생각합니까?
<딸의 답변>
누군가 제게 물었습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순간이 언제였는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 앞이었기에 밝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제를 들었을 때 마음 속에 떠오른 장면은 그런 제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기억은 한 병실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침대에 누운 환자에게는 시간이 별로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젊은 의사가 머리맡에서 공기주머니를 짜 산소를 환자의 입안에 넣어주고 있었습니다. 환자의 폐가 제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산소농도를 표시하는 기계의 수치가 점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기계는 환자의 생명이 위급하다는 조급한 경고음을 쏟아냈습니다.
이윽고 침대에 누워있는 중년 남자의 가족들과 사제들이 병실에 모였습니다. 남자의 큰 딸은 의사에게 더 이상 산소를 주입하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몇 시간째 주머니를 짜느라 땀범벅이 된 젊은 의사는 안 된다고 했지만 가족들 모두 이제 충분하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빠를 더 이상 커다란 고통 속에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남자에게는 신이 준 수명만이 남았습니다.
그의 두 딸이 침대 양쪽에 섰습니다. 두 사람은 남자의 손을 잡고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고맙다, 사랑한다, 앞으로 아빠가 계시지 않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짧은 인사가 건네졌습니다. 이윽고 두 딸은 허리를 굽혀 그를 안았습니다.
요란하게 울리던 기계의 검은 모니터에 잠깐, 생명 신호가 반짝거렸습니다. 기계의 알림 소리가 잠시 멈췄습니다. 산소 농도를 나타내는 그래프가 정상 궤도에 올라온 것입니다. 그래프는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몇 분 남짓 흐른 뒤, 남자는 평온하게, 조용히 숨을 내뱉고는 다시는 들이마시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아빠의 임종을 다시 꺼내보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시간 흐른 뒤, 아빠를 꼭 안았던 마지막 포옹은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가장 소중한 장면입니다. 죽음에 이를 만큼 큰 고통이 있음에도 딸들의 포옹으로 아빠가 숨을 쉬었던 일은 기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가장 두려워했던 슬픔 앞에서 제게 생명을 주었던 사랑의 실체를 마주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포옹은, 나 자신에 대한 끝없는 긍정이며, 태어날 때 받은 자신으로 힘껏 살아가라는 격려였습니다. '나'를 알고 싶은 열망이 깊은 한 획처럼 마음 속에 그어졌습니다. 저는 공부했습니다. 아빠의 제자들에게 배우고, 아빠가 읽던 책을 읽었습니다. 아빠와의 기억이 슬픔으로 남는 것이 싫어 책으로 그 축제와 같았던 즐거운 장면들을 남겼습니다. 그러면서 부족한 부분만 크게 보이던 자신과 화해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첫 책을 쓰며, 이때의 변화들을 고스란히 글에 담았습니다. 엄마는 제가 좀 달라졌다고 말합니다.
가장 소중한 순간에 대해 질문 받았을 때, 저는 아빠의 임종이 생각난 것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아빠가 돌아가신 일은 무력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매우 불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저에게도 불행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순간이 가져다 준 강렬한 그리움과 나아지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도 있었고, 저의 첫 책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빠가 살아 계셨다면 아마 책을 쓰겠다는 목표는 아직도 막연한 꿈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불행에도 제 나름대로의 축복이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깨진 구슬과 페르시아의 흠에 관한 이야기에서 저는 삶을 바라봅니다. 흠은 불량이지만, 인생의 흠은 영혼의 완벽함을 위한 필연적인 조건입니다. 삶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 완벽한 삶에 집착하고, 고난에 넘어져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그 순간이 바로 완전한 삶이 싹트는 때일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조용히 축배를 듭니다. 레치얌, 삶을 위하여. 행복을 위해서도, 즐거움을 위해서도 아닌, 오직 삶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