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봄날 흐릿한 사진 한 장의 추억을 찾아 여행을 떠났다. 새벽부터 아내는 김밥을 싸며, 늦깎이 글쓰기 공부에 나선 나를 응원한다. 춘천 버스터미널을 떠나 한 시간 반쯤 만에 도착한 수원. 햇살은 봄기운을 느낄 만큼 따뜻해 반갑게 맞이하는 친구를 만난 것 같다.
화성행궁에는 봄나들이 나온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재잘대며 걷고, 꽃 사진을 찍는 연세 지긋한 어르신도 연신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다. 풀밭에 자리를 펴고 피크닉을 즐기는 젊은 남녀는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손을 꼭 잡고 있다. 예쁘다. 햇살이 수원 화성을 넉넉하게 만든다.
화성행궁은 현재에서 과거로 순간 이동이라도 한 전경을 파노라마로 보여주었다. 수원 화성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고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기도 했다. 이후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1975~1979년까지 원형에 가깝게 대부분 보수·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성을 돌아보며 정조대왕의 뛰어난 국가 통치관과 미래를 예견한 혜안에 놀랐고 그 추진력에 감탄했다.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도 흐르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 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다. 역사를 지켜온 이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조금 쌀쌀했던 지난주를 생각해 따뜻한 점퍼까지 걸치고 왔는데, 한 겨울 추위를 피해 떠난 동남아 여행지 공항에 도착했을 때 느낌처럼 겉옷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다. 산수유도 노랑 병아리같이 예쁘게 피었다. 서장대에 오르니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수원 시내가 한눈에 보이고, 산들바람이 짧은 수고를 위로해 준다.
시원한 바람이 스치면서 수원 화성을 배경으로 한 오래전 사진 한 장이 떠오른다. 올림픽이 있었던 그 해 봄날. 감색 양복에 넥타이를 한 청년과 흰 바지에 붉은색과 흰색이 섞인 스웨터를 입은 앳된 소녀가 옅은 미소로 수줍게 찍은 사진. 초점도 맞지 않았고 색도 약간 바랬지만 30년도 훌쩍 넘은 지금도 몽글몽글한 그때의 설렘을 기억한다.
그땐 수원 화성의 역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연애 초기라 청춘의 열정으로 성곽을 걷고 있어도 밝고 예쁜 그녀에게만 집중했었을 때이니 정조대왕의 업적을 기릴 여유가 내 머릿속에는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역사를 알고 화성에 좀 더 진지했다면 청춘사업은 물 건너갔을 거다. 세월이 흘러 흰머리와 잔주름은 늘었고 성을 오르는데 숨은 차지만, 흐릿한 사진 한 장 속 그곳에서, 그때의 감정을 오롯이 느끼는 것을 보면 아직 마음은 청춘인가 보다.
춘천행 버스가 어둠을 뚫고 달린다. 청춘의 풋풋했던 사진 속에서 현재의 나와 그녀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