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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Aug 24. 2023

나만의 삶을 연주하는 방법

story 3. SING YOUR SONG

SING YOUR SONG
당신만의 음악을 연주하세요
당신만의 삶을 살아가듯이

2019.10.13 (07:30) Saint Jean - Roncesvalles (16:30) (24.7km)

2019.10.14 (07:40) Roncesvalles - Zubiri (15:00) (21.7km)


새벽에 일어나 알베르게(순례자 전용 게스트하우스) 공용시설에서 커피 한 잔을 내려먹고 졸음을 씻어냈다. 함께 방을 쓴 노르웨이 언니는 동이 트기도 전에 부지런을 떨었는지 보이질 않았다. 아무리 순례길이 하루의 만남과 헤어짐에 익숙해져야 하는 길이라지만 첫날부터 가혹하다. 이름도 묻질 못했는데. 곰곰이 생각하다 금방 털어 보냈다. 여긴 순례길이지 않은가. 누군가와의 관계보다 나를 찾으러 오는 길. 혹은 나를 버리러 오는 길이니까. 길을 나서고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꿈에 그리던 'Camino'를 걷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엉엉 울었다. 어린애처럼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면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소똥 냄새도 감동이었고, 풍경은 두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자리에 서서, 그냥 눈물이 나는 걸 내버려 뒀다. 오며 가며 지나는 이들도 모두가 순례자라, '아 쟤 뭔가 사연이 있구나' 하고 알아서 신경을 꺼주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사실 별 사연이랄 건 없지만 말이다.

Orisson 까지 8km. 여기서 따듯한 라떼를 마셨다.
어제 만난 노르웨이 언니가 생수를 챙기라 으름장을 놓았지만 결론은 실패. 무겁기만 했음.

피레네 산맥에 들어서자, 어딜 감히 올라오냐는 듯이 그 바람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바람에 날아갈 것 같다'는 표현이 우스갯소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배낭을 등에 지고 도합 8kg이 늘었음에도 초강풍이 불어오면 바닥에 몸을 숙이고 지나가길 기다려야 했다. 조금이라도 발을 뗄라치면 중심을 잃고 도랑에 쓰러지거나, 찻길로 내던져졌다. 한국에서 이런 바람이 불었으면 현수막과 간판, 우산과 나무가 사이좋게 날아다녔겠지. 첫날이 제일 힘들다더니, 가히 그렇구나. 이보다 더 힘든 날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더라면 첫날이 지나고 과감히 포기했을 테다. 걷다가 울고, 걷다가 울고. 멈춰 서서 다시 울었다. 힘들어서였을까, 감동이어서였을까. 그래, 난 감정에 충실하러 온 거니까. 이유가 어찌 되었든 울고 싶을 때 울었다. (아마도 초반부엔 기쁨과 환희의 눈물에서 후반부엔 엄마가 조금 보고 싶었던 것도 같다.)

 뒷모습도 부은 것 같다.
그래도 신나 보인다.

 1,400m의 고도에서 걷는 24.7km. 스카이다이빙을 방불케 하는 바람에 이대로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싶었다. 각오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우아하지 못한 여정이었다.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끊임없이 흐르는 콧물에 이 많은 게 다 어디서 오는 걸까 궁금할 지경이었다. 혈당이 죽죽 바닥을 치는 느낌에 그저께 사 둔 젤리를 꺼내 먹었는데, 그 좋아하는 젤리를 두 개만 먹고 다시 묶어둘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맛을 느낄 여력도 기력도 여유도 없었다. 양 떼와 풍경을 보고 감동하는 것도 잠시, 몸에 난 모든 구멍으로 바람이 들이쳤고 머리가 아팠다. 더 이상 못 가겠다고 생각했을 때 Steve를 만나, Roncesvalles까지 7km가 남은 시점으로부터 3시간을 함께 걸었다. 내가 힘들어 뒤처질 때마다 스티브는, "자. JJ. 크고, 차가워서 얼어붙을 것만 같은, 황금 빛깔의 맥주를 상상해 봐. 그게 저기 있어. 우린 저기에 도착하면 거기에서 수영을 할 거고, 다 먹어 치울 때까지 나오지 않을 거야."라고 말해줬다. 스티브가 없었다면 지금쯤 저 어디 말똥밭에 처박혀 구르고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씻고 해쳐 모여 맥주를 마셨다.

(좌) 붉은 경량 패딩을 입은 스티브의 볼록한 뱃살. (우) 너무 추워 실내에서 진행한 2차전.

 수도원을 개조해서 만든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는 160명 가까이 되는 인원을 수용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숙소에서 만나 함께 힘들어하고 오늘 불었던 바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만인의 공통사였다. 그 바람을 뚫고 여기까지 당도했기에, 우리가 힘을 합쳐 바람을 이겨낸 것도 아닐터인데 일종의 동료애가 있었다. 저녁을 먹는 도중에 독일 청년 로버트를 만났다. 함께 맥주와 와인을 나누어마시고, 순례자 메뉴를 시켜 먹고는 헤어졌다. (순례자 메뉴라고 할 것이, 렌틸콩 수프와 또르띠야, 바게트 한 조각 따위이다. 순례자에겐 턱없이 부족한 칼로리지만 가성비는 기가 막힌다.) 저녁 9시였던가, 잠시 쉬려고 누웠다가 까무룩 잠에 들어버렸다.


시차 때문인지, 근육통 때문인지 1시쯤에 잠에서 깼다.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다. 돌을 매달아 놓은 듯 무겁고 뻐근했다. 침대 밑으로 가라앉아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다리를 절다시피 물을 한 잔 하고 돌아와선 욱신대는 다리를 애써 무시했다. 아침까지 계속되지는 않았다. 아침 6시에 다시 눈을 떴다. 신기하게도 카미노에 오르니 잠 욕심이 없어진다. 아마 잠에 대한 욕구를 잠재울만한 중요하고 심오한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을까.

Zubiri로 향하던 숲길

 Zubiri 까지는 어제 만난 로버트와 함께 걸었다. 어제에 비하면 오늘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Zubiri로 향하는 내내 같이 콧노래를 부르곤 했으나 어제의 여파로 부풀어 오르는 물집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발바닥이 불타는 느낌에 신발을 벗고 잠시 쉬었는데, 난 나의 발바닥이 그런 고통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오늘이 되어서야 알았다. 중간에 혼자 걷고 싶어 Zubiri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가는 길이 온통 숲길이고 사람도 없어 혼자 오렌지도 까먹고 노래도 불렀다. 물집아 부풀어 올라라, 나는 노래를 부를 테니. Zubiri에 도착한 후, 여력이 없어 마을 초입에 있는 다리 옆 알베르게에서 묵었다. 아침 조식까지 15€. 그다지 저렴하진 않지만 그래도 편안하다. 도착하고 장을 보고 들어와 맥주와 음식을 나눠먹고 있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걷잡을 수 없이 굵어지고는 태풍이 불었다. 지금 걷고 있는 사람들은 어쩌려나, 무사해야 할 텐데. 조금 더 쉬다 빗방울이 잦아들 때 즈음 슈퍼마켓에 들를 참으로 길을 나섰다가 스티브를 만났고, 그의 초대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좌) 발바닥이 불탈 때 파스를 붙혀놓으면 효과가 좋다. (우) 로버트 일행과 함께한 간식타임

  어쨌든 오늘도 무사히 잘 걸었다. 온몸의 근육통에 곧 익숙해지겠지. 내일은 Pamplona, 21.8km를 걷는다. 오늘도, 내일도 역시나. Buen Camino!


Question 3.  순례길 초보의 심정이 어때?

사실 벌써 익숙해진 느낌이다. 거만하기도 하지. 발의 고통과 배낭의 무게에, 땀 냄새와 축축한 등까지 모든 게 익숙해졌다. 어제의 피레네 산맥을 넘었던 경험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초보랄 것도 사실 없다. 초보 (初步)라는 것이, '처음 내딛는 발걸음'이라는 의미인 만큼 우리는 모두 초보다. 순례길에선 모든 길에 내 발걸음이 처음으로 닿는다. 우리는 이 길 속에서 항상 초보라는 뜻이다. 그러니 별 느낌이 없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넘어지며 어떠한 창피함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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