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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Aug 23. 2023

새도 의미 없이 날지는 않잖아

story 2. Nowhere, Now here

Nowhere, Now here.
살아있음을 깨닫기 위해선
아주 작은 공간 하나뿐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을

2019.10.12 Madrid - Saint Jean Pied de Port


 마드리드에 도착하니 저녁 9시를 향해간다. 새벽 4시에 집을 나왔고 스페인은 한국과 6시간 시차가 있으니 장장 23시간에 걸쳐 몸을 뉘이지 못한 꼴이었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스페인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모르면서 핸드폰이 먹통이 된 줄도 모르고 종종걸음을 뛰다시피 걸어 열차를 타러 갔다. 핸드폰은 데이터도 없어 먹통에, 설상가상으로 배터리도 다 죽어가는데 지하철은 흡사 거미줄을 연상케 한다. 여행 초장부터 이렇게 시원히 말아먹고 노숙을 하게 되려나 하던 차에, 옆에 계신 인상 좋은 할머니께 몸짓 발짓 섞어가며 아는 스페인어로 "Sol 광장, 어디?"만 반복하니 돌아오는 대답은 단 하나의 쉼표도 없는 스페인어. 내 동공이 가차 없이 흔들리는 소리 때문이었는지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저들끼리 스페인어로 흥분 섞인 울분을 토하고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겠는 스페인어로 설명을 해줬다. '스페인어 공부 좀 열심히 할걸'... 후회하기엔 늦었을지 몰라도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은 통하는 법. Sol 광장으로 향하는 티켓을 뽑아 들고 사람들에게 들어 보이니 박수를 쳐준다. "Gracias, gracias." 내가 아는 말은 이 것뿐이에요.

무식함을 이겨낸 전리품 혹은 트로피
내가 가는 길의 경로에 보이는 'Sol' 글자가 반가워서 눈물날뻔

Sol 광장에 어찌어찌 도착은 했는데... 그럼 이다음부턴 어떻게 가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어떻게든 했다. 자정을 향해가는 시간에 낯선 땅을 걷고 또 걸어 숙소를 찾아갔다. (그 사이에 작은 구멍가게에 들러 맥주도 두 캔 샀다. 참 칭찬해.) 숙소에 도착한 후 몸을 씻은 뒤, 맥주를 마시고 잠에 들었다.

(좌) 무슨 정신으로 찍었는지 모를 건물 (우)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는 솔광장

해서, 다음날엔 유심이 꼭 필요했는데, Sol 광장에 있던 두 개의 가게는 문을 열 생각을 안 한다. 그래, 10시까지만 기다려보자. 이게 유럽인들의 여유 아니겠는가. 근처 카페에 들러 계란 부치기 (추후에 이 음식이 토르티야라는 것을 눈치챘다.)를 간신히 시켜 먹고서 커피를 마셨다. 한참을 묵묵히 닫혀있는 통신사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자니, 보다 못한 환전소 직원이 말한다. "Hoy es feriado(오늘 휴일이야)" 나는 답한다. "¿Que es fe-ria-doooo?(휴-이르- 가 뭔데?)" 직원이 눈동자를 크게 한 바퀴 돌리고는 셔터를 닫는 시늉을 몸소 보이고 나서야 나는 깨닫는다. '아, 나 망했네‘ 라고.


빠른 포기가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 버스나 타러 가자. 택시를 타고 역으로 이동했다. 다행히, 아주 감사히도 거기에 유심 파는 곳이 있었다. 사실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도 눈만 돌리면 통신사가 있는 세상에서 이 무슨 바보 같은 조바심이었을까. 어찌 됐든 모든 것이 반가워지는 순간이다. 우여곡절 끝에 유심을 사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를 떠나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점인 프랑스 '생장 (Saint-Jean-Pied-de-Port)'로 가야 한다. 버스를 타고 7시간을 달렸다. 버스 안에서도 wifi가 터져서, 어렵지 않게 유튜브도 보고 스페인어 공부(생존을 위한 길임을 어제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5시간이 넘는 여정은 역시나 힘들다. 스페인 버스엔 화장실도 있더라. 사용하진 않았지만.

마드리드로부터 팜플로나로 가는 길

본래 속 멀미를 앓지도 않는 체질이거니와 18시간 가까이되는 비행에도 멀쩡했는데 희한한 일이다. 버스가 크게 흔들린 것도 아니고 꼬부랑 길을 달린 것도 아닌데, 장차 900km는 걷게 될 밀밭의 색 때문에 속이 제멋대로 설레었는지 팜플로나로 가는 5시간 동안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렸다.

 버스를 타고 스쳤던 풍경들

팜플로나에 겨우 도착해서 울렁거리는 텅 빈 속을 달래려 근처 음식점에 들러 국수를 시켜 먹었는데 아, 짜다. 다음부턴 꼭 외우리 "Sin Sal. Por Favor. (소금 빼주세요)". 그리 만족스러운 식사는 아니었지만 곧 배는 찼기 때문에, 근처 공원에 들러 냅다 누워버리고는 신발을 벗었다. 걷지는 않았지만 하루종일 장거리를 이동하는 탓에 온몸이 눅눅하고 찌뿌둥했다. 햇빛을 받으며 지쳐버린 몸도, 설레는 탓인지 들쭉날쭉한 마음도 뽀송하게 말렸다.

(좌) 먹자마자 절로 미간이 오그라들었던 소금 국수. (우) 그러거나 말거나 통통 배를 두드리며 누워있었던 잔디밭

 환승시간이 가까워져 다시 버스에 올랐고, 프랑스 국경을 넘어 생장에 도착했다. 스페인어가 익숙해질 만했는데 이제 불어라니. 가혹하기도 하다. 하루종일 제대로 먹은 음식이 하나도 없어 숙소 앞에 나와 간단히 먹을 겸 샌드위치를 시켰는데 웬 사람 팔뚝이 나왔다. 크레덴시알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고, 처음으로 말로만 듣고 글로만 봤던 "Buen Camino (좋은 길 되세요!) "를 들었다. 이제 나도 순례자구나. 크레덴시알을 발급받으려 좁은 골목길을 오가는 순례자들과 작은 목례를 나눴다. 일련의 유대감이 벌써부터 우리를 묶어주는 듯했다. 조금 먹먹한 마음을 담아 가방에 조가비를 달았다. 내일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한다. 순례길 첫 날인 셈이다. 어째, 출국 전날보다 더 떨린다.

(좌) 내 팔뚝만 한 샌드위치 (근데 다 먹음) (우) 순례자의 상징인 조가비를 가방에 달다
Saint-Jean-Pied-de-Port의 풍경
노을 지던 생장, 프랑스의 작은 시골마을답게 노을도 겸손해 보였다.

 오늘 나와 방을 함께할 노르웨이 언니가 왜 이 길을 걸으러 왔느냐 묻는다. 그냥, 그냥. 이유를 모른다고 답한다. 이유는 없어. 나도 모르겠어. 그녀도 같은 처지라 답한다. 그래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새도 이유 없이 날지는 않잖아. 우리는 그렇게 결론을 내린다. 인터넷이 없어도 난 어떻게든 하더라. 처음 오프라인으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약한 모습이 실망스러웠대도 나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침착하더라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하고, 많은 것을 할 수 있더라. 이런 걸 알게 되는 것이 여행의 가장 큰 묘미이지 않을까. 잠들기 전, 노르웨이 언니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조심히 스스로에게 말해보았다. "Buen Camino. (좋은 길 되길.)"


Question 1. 오늘 하루 가장 많이 들은 노래는?

이동하는 내내 Dusk til Dawn, Thunder, Young Domb시리즈 들으며 리듬 탔다. 애지간히 지루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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